자세히보기 2014년 4월 1일

통통 인터뷰 | “북한사회를 화폭으로 꺼내 물음표를 던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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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통 인터뷰 | 송벽 화백
“북한사회를 화폭으로 꺼내 물음표를 던집니다”

 
 
ITV_201404_60 붉은 화가 송벽(45). 그의 캔버스에는 고통 받고 있는 북한주민들의 모습과 자유를 갈구하는 표현법이 도드라진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직설적으로 나타내기보다 해학적이고 풍자적인 유머로 풀어낸다. 그 때문에 북한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도 그의 그림을 쉽게 접하며 모르던 현실을 알아갈 수 있다. 그림들은 북한에서 살던 30여 년 경험이 표출된 작가 송벽의 자화상이다.
 
“제가 북한에서 태어난 게 잘못인가요?”
 
 황해도의 한 공장에 다니며 평범하게 살았던 그는 평소 그림에 대한 재주를 인정받았다. 입소문은 조선노동당 비서들에게까지 들어갔고, 선전부에 발탁되어 당의 포스터를 그리게 되었다. 일반 노동자가 선전화 일꾼이 된다는 것은 최고의 긍지였다. 그는 자긍심을 가지고 밤을 새워가며 북한 체제를 찬양하고, 당을 선전하는 포스터를 그렸다. 그가 그린 포스터는 거리 곳곳에 걸렸다. 하지만 생계는 여전히 어려웠다. 모두가 곤궁하던 때라 먹는 날보다 굶는 날이 많았다. 어느 날, 아버지는 식량을 구하러 중국으로 가자고 했다. 먹을 것만 가지고 어머니와 여동생이 기다리는 곳으로 서둘러 돌아오기로 했다.
 
 두만강 앞에 선 부자는 강가에 숨어 날이 어두워지길 기다렸다. 날이 저물자 적막만이 그들을 감쌌다. 주변에는 세찬 물소리만 들렸다. 그는 아버지와 떨어지지 않도록 끈을 한 쪽씩 잡고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날따라 두만강의 물살은 세찼다. 평소 허리까지 오던 물이 장마의 영향으로 가슴팍까지 차올랐다. 거센 물살 속을 헤치며 떠내려가지 않게 안간힘을 쓰던 도중, 끈이 가벼워짐을 느꼈다. 손에 쥐고 있던 끈이 힘없이 흔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아버지가 저 멀리 떠내려가고 있었다. “아버지…” 크게 외칠 수도 없었다. “아버지가 며칠을 굶어서 기운이 없으셨던 것 같아요.” 정신없이 아버지를 좇아 헤엄쳤지만, 결국 아버지는 찾을 수 없었다.
 
 그때 북한 경비대 군인들을 발견했다. 발각되면 처벌이 뒤따르겠지만, 아버지를 찾는 것이 먼저였다. 군인들에게 달려가 아버지를 찾아 달라고 사정했다. 하지만 도움을 주기는커녕 반역자를 흠칫 두들겨 패고 청진 구류장에 감금시켰다. “그저 아버지를 구해 달라는 것이었는데, 시체만이라도 찾게 해달라고 한 것뿐인데.”
 
“동서독이 분단되었던 곳에서 전시회를 갖고 싶어요”

〈벗어라〉, 2010

〈벗어라〉, 2010

 구류장의 생활은 끔찍했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가혹한 강제노동과 끊임없는 매질이 이어졌다.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 조국에 대한 환멸마저 들었다. 그날도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나무를 하러 갔다. 한겨울이었지만 장갑조차 없이 작업을 하다 검지에 큰 가시가 박혀버렸다. 다행히도 가시는 뽑았지만, 손가락은 고름이 나고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썩어 들어갔다. 붓을 들던 그 손가락은 제대로 치료도 받지 못한 채 잘라야만 했다.
 
 우여곡절 끝에 돌아간 집에는 어머니만 계셨다. 그가 아버지를 잃는 시간 동안, 여동생은 굶어 죽었다고 했다. 그는 차마 아버지의 소식을 전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중국에 먼저 가셨어요. 제가 먼저 갈테니 어머니는 소식 보낼 때까지 기다려 주세요.” 가지 말라고 통곡하는 어머니를 뒤로 한 채 그는 중국 한인 교회를 통해 대한민국의 품에 안겼다.
 
 가슴에 상처 하나 없는 탈북자가 어디 있겠냐만은 그의 사연은 좀 더 특별하게 다가온다. 아버지와 여동생을 잃었다. 한국에 들어온 그는 어머니마저 얼마지 않아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접했다. “제 가족은 파탄났어요. 제가 북한에서 태어난 게 잘못인가요?”
 
 서른을 넘긴 나이, 그는 홀로 대한민국이라는 새로운 곳에 섰다. 이제 그에게는 고향도, 가족도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할지 고민해야 했다. 당국에서 정해주는 대로 살았던 이전의 삶과는 달랐다. 주변에서는 빨리 직장을 갖고 가정도 꾸려 안정된 삶을 갖으라고 조언해줬다. 물론 그도 안정된 삶과 행복을 원했다. 하지만 낯선 이곳까지 온 것은 새로운 삶에 대한 도전 자체이기도 했다. 그는 도전을 이어나가기로 했다. 34세, 공주사범대 미술교육과 03학번 새내기가 되었다.
 
 북한에 있을 때는 집안 사정이 너무 어려워 대학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만큼 대학생활은 소중했다. 낮에는 수업을 들으며, 건설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하거나 횟집에서 그릇을 닦고, 밤에는 그림을 그렸다. 악으로 버티며 생활했다. 언젠가는 일주일간 컵라면만 먹으며 그림을 그린 적도 있다. 그래도 행복했다. 내가 굶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그러면서도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사실에. 그렇게 졸업을 하며 홍익대 대학원 동양화과에 입학했다. 이제 하늘에서 부모님을 만나도 웃을 수 있을 것 같다. “아버지, 어머니. 외롭고 힘들었지만 열심히 공부했고 부끄럽지 않게 살아왔습니다.” 이 말을 전하는 날을 그려본다.

〈우리 수령님〉, 2010 (좌) , 〈아프카니스탄의 여성상들〉, 2011(우)

〈우리 수령님〉, 2010 (좌) , 〈아프카니스탄의 여성상들〉, 2011(우)

 2011년 1월, 첫 전시회를 개최하게 되었다. 신선한 표현과 그림이 담고 있는 신랄한 메시지는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특히 미국 영화배우 메릴린 먼로가 바람에 휘날리는 치맛자락을 잡고 있는 유명한 포즈를 패러디한 작품은 눈길을 모았다. 대중에게 친숙한 모습과 김정일 위원장의 얼굴이 배치되어 북한의 개방을 촉구하는 인상이 강렬하게 각인된 듯 했다. 국내 언론은 물론 미국, 일본, 프랑스 등 해외 언론사들도 탈북화가가 그린 북한사회를 취재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전시회는 1주일 일정에서 2주일로 연장됐고, 1개 층의 갤러리는 3개 층으로 확대됐다.

〈꼬마 전사〉, 2009(좌), 〈희망〉, 2010(우)

〈꼬마 전사〉, 2009(좌), 〈희망〉, 2010(우)

 해외 러브콜도 잇따랐다. 재작년 애틀랜타 전시를 시작으로 이미 수차례의 해외 전시를 가졌고, 곧 홍콩, 영국 전시회가 예정되어 있다. 그의 그림이 알려질수록, 세상이 인정해줄수록 힘들었던 과거를 아는 그의 주변 사람들이 더욱 좋아한다.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또 다시 송 작가가 기쁘고 뿌듯해짐을 느낀다. “기회가 된다면 독일에서 전시회를 갖고 싶어요. 동서독이 분단되었던 그 지점에서 전시회를 개최한다면 더 상징성이 있을 것 같아요.”
 
“열정과 노력이 있다면 세상은 언젠가 알아줍니다”
 
 남한과 북한의 그림 기법은 기본적으로 같다. 하지만 북한에서는 찬양하는 작품 내지 풍경화밖에 없을 뿐이다. “북한에서 이런 그림을 그렸다면 아마 3대가 멸족 당했겠죠? 새삼 예술의 자유가 무엇인지 깨닫습니다.” 남한에서는 무엇보다 자신만의 개성이 중요하다. 그래서 그는 늘 고민한다. 그림을 보는 이들이 ‘송벽의 메시지는 뭐지?’라는 궁금증을 던지고 작품을 봤을 때 함께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전 북한사회를 화폭으로 꺼내어 물음표를 던지려 해요.” 사람들이 잘 깨닫지 못하는 자유의 소중함, 북한 주민들의 비극적인 삶을 세상에 던지는 일은 이제 그의 사명이 되었다. “북한이 아무리 계급사회라고 하지만, 주민들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존엄함을 가지고 있죠. 그런데 주민들은 이조차 자각하지 못하고 살고 있어요. 저도 그랬고요.”

〈꽃보살들〉, 2010

〈꽃보살들〉, 2010

 가끔 미술에 관심 있는 탈북자들이 그를 찾는다. 개중에는 북한에서 전문 미술교육을 받은 이들도 있고, 만수대창작사 출신도 있었다. 하지만 한국 예술계에서 살아 남은 이들은 손에 꼽는다. “대다수는 중간에 포기했어요. 열정과 노력이 있다면 세상은 언젠가 알아줍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경쟁사회라 인정받으려면 피나는 노력이 필요해요.” 많은 탈북 출신 화가들에게서 처음 이 곳에 정착할 때의 마음가짐이나 결심이 사라져 가는 것을 보면 안타까움을 느낀다. 한 번은 한 탈북 청소년이 찾아와 진로 상담을 했다. 해줄 수 있는 얘기는 많지 않았지만 이 말만은 꼭 하고 싶었다. “네가 하고 싶으면 해라. 대신 꿈을 가지고 꾸준히, 실패하고 인정받지 못해도 계속한다는 생각으로 해야 돼.” 이는 비단 그 아이에게만 던진 말이 아닐 것이다. 송벽 스스로에게 하는 이야기이자, 수많은 동료들에게 전하고 싶은 뜻이다.
 
 그림을 그리는 만큼 매일을 사색하고 기록하는 그는 출간이라는 또 다른 도전을 앞두고 있다. 매일 매일이 도전으로 가득 차 있는 붉은 화가 송벽. 북한을 선전하는 포스터를 그리던 그는 이제 북한의 현실을 풍자하는 그림을 그린다. 북한의 선전화를 칠하던 색채로 북한주민들의 자유를 희망하는 색을 덧칠한다. 붉은 붓질을 캔버스에 더하는 그의 사명은 그의 도전처럼 날로 강렬해진다.
 
 
선수현 / 본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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