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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통일 타임머신! | 동독 지방선거 조작, 평화혁명 도화선으로! 2014년 5월호

베를린 장벽 붕괴 25주년 기념 | 독일통일 타임머신! 1
동독 지방선거 조작, 평화혁명 도화선으로!

1988년 동독 저항세력의 평화시위 모습. 고르바쵸프의 개혁 이후에 교회의 보호 아래 시민사회가 태동하게 된다. 사진출처 : Br. Thomas(Wikimedia Commons)

지금으로부터 25년 전인 1989년 11월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평화적인 독일통일을 위한 길이 열렸다.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이후 1990년 10월 독일이 통일될 때까지 불과 1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비록 처음에는 힘든 시기를 겪었지만 독일은 통일 25년째를 맞이하는 현 시점에서 정치·경제적으로 유럽의 중심에 위치한 강력한 국가로 자리매김하였다. 한국은 언제나 통일을 꿈꿔왔다. 박근혜 대통령은 최근에 행한 드레스덴 연설을 통해 독일의 경험을 바탕으로 통일정책의 청사진을 밝혔다.

한·독 양국이 가진 기본조건들은 상이하지만, 분단이라는 상황에 따른 여러 공통점들이 있기 때문에 독일의 사례는 한국의 통일정책에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이번 호부터 총 10회에 걸쳐 독일이 평화통일을 이루는 과정에서 발생한 주요 사건들을 돌이켜보려 한다.

1989년 1월 동독(공식명칭 : 독일민주공화국)을 통치하고 있던 사회주의통일당(SED)이 같은 해 5월에 지방선거를 실시할 계획을 공포하였을 당시 이 지방선거가 독일민주공화국(DDR)을 파국으로 이끄는 동시에 독일을 평화통일에 이르게 하리라고는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사회주의통일당 기관지  1989년 5월 8일자에 게재된 지방선거 결과

사회주의통일당 기관지 <노이에스 도이칠란트(Neues Deutschland)>
1989년 5월 8일자에 게재된 지방선거 결과

동독의 선거는 공식적으로는 자유, 비밀, 평등선거였지만, 실제로는 지배정당인 사회주의통일당과 그에 준하는 소위 블록정당으로만 구성된 단일목록에 찬성 혹은 반대하는 매우 우스꽝스러운 형태로 이루어져 있었다.

1989년은 독일민주공화국 창립 40주년을 맞는 해였으며, 이를 기념하는 행사의 준비가 한창이었다. 그러나 주민들의 분위기는 더욱 비판적이고 불만의 목소리가 높아져 가고 있었다.

정권의 온갖 속임수에도 불구하고 수천명의 주민들은 서독(공식명칭 : 독일연방공화국)으로 가는 여행신청서를 제출하였으며, 자동차 또는 집에 흰 천을 달아서 이를 표시하였다.

1989년 5월 … 동독 선거조작과 최초 대규모 시위 촉발

교회를 중심으로 환경운동과 평화운동을 전개하는 그룹들이 생겨났는데, 이들은 당시 동독에 매우 심각한 위협이 되었으며, 부분적으로는 재앙수준에 달했던 환경파괴 실상 등 정권 차원에서 알리는 것을 막고 있던 정보들의 대한 공개를 시도하였다.

이러한 그룹들은 소수에 불과했지만, 당시 동독의 국가보위부(슈타지)는 약 160개의 그룹이 활동 중이며, 관련 인원은 2,500명에 불과하고 반(反)정권 ‘핵심인사’는 60명밖에 되지 않는 것으로 파악하였지만, 그들의 요구사항과 목소리는 더욱 커지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선거를 앞두고 독립적인 후보들의 공천을 요구하였으며, 이러한 요구가 예상한 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자 1989년 5월 7일에 실시되었던 지방선거에 대한 감시기구를 조직하였다. 공식적인 선거결과에 따르면 총 투표율은 99.91%였으며, 단일제안에 대해 단 1.15%만 반대표를 던졌고, 나머지 98.85%는 찬성표를 행사했다고 발표하였다. 동독이 선거의 정당성을 증명하기 위해 서독의 언론과 같이 활동을 허용하였던 독립적인 선거감시인들은 투표율이 60~80% 수준으로 훨씬 낮았으며, 반대표의 비율은 훨씬 높았다고 판단하였다.

슈타지의 공작에도 불구하고 선거감시인들은 선거조작에 대해 공식적으로 제소하였으며, 이에 관해 동(東)베를린에 주재하고 있던 서독 특파원들에게 비밀리에 정보를 제공하였다.

제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반정권 세력은 매달 7일마다 선거조작에 항의하는 시위에 참여할 것을 호소하였으며, 이로부터 대규모 시위가 촉발되었다. 이 대규모 시위는 결국 10월 7일에 있었던 독일민주공화국 창립 40주년 행사와 동시에 진행되었으며, 동독 인민경찰은 이 시위를 무자비하게 진압하였다.

1989년 7월 … 동독주민들 서독으로 대규모 탈출 시작

(좌) 범 유럽연합의 유럽운동 일환으로 전개되었던 범 유럽 아침식사에서 800명 이상의 동독주민들이 헝가리에서 오스트리아로 넘어갔다. 이것이 대량탈출 의 시초였다. 사진출처 : Wik1966total(Creative Commons) (우) 는 동독의 저항단체였던 베를린 환경 도서관 베를리너 움벨트비블리오텍 (BerlinerUmweltbibliothek)이 등사기를 사용하여 제작했던 전단이다. 이러한 지하신문들이나 서독으로 몰래 흘러 들어간 소식들을 통해 동독의 상황이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좌) 범 유럽연합의 유럽운동 일환으로 전개되었던 범 유럽 아침식사에서 800명 이상의 동독주민들이 헝가리에서 오스트리아로 넘어갔다. 이것이 대량탈출
의 시초였다. 사진출처 : Wik1966total(Creative Commons)
(우) <텔레그라프>는 동독의 저항단체였던 베를린 환경 도서관 베를리너 움벨트비블리오텍 (BerlinerUmweltbibliothek)이 등사기를 사용하여 제작했던 전단이다. 이러한 지하신문들이나 서독으로 몰래 흘러 들어간 소식들을 통해 동독의 상황이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동독 지도부는 지방선거 결과에 반대하는 이러한 시위가 일어나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하였으나, 수십년간 억압을 받아왔던 공산정권에 대한 비판론자들이 새로운 용기를 가질 수 있는 분위기로 국제적인 환경이 이미 변한 상황이었다.

소련의 국가수반이었던 고르바쵸프는 1985년 정권을 잡은 이후부터 이른바 ‘페레스트로이카’로 불리는, 소련사회를 바꾸기 위한 시도를 하고 있었다. 비록 실패하기는 했지만 알콜 남용에 반대하는 캠페인이나 더 많은 자기 책임에 비중을 둔 경제개혁 그리고 그때까지 기술해 왔던 사회주의 역사에 관한 비판적인 접근 등의 시도가 여기에 속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했던 것은 새로운 개방을 의미하는 ‘글라스노스트’였으며, 고르바쵸프는 이를 통해 국민들을 개혁으로 이끌고자 하였다. 소련이 군사력을 동원하여 전체 사회주의 블록 내에서의 반사회주의 움직임의 분쇄를 정당화했던 ‘브레즈네프 독트린’으로부터 각 개별 국가들은 스스로 책임을 진다는 외교 분야에 있어서의 혁명적인 전환에 대해 초기에는 모두 반신반의하였다.

1953년 동독, 1956년 헝가리,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의 민중봉기에 대한 진압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 존재하였으며, 또한 소련군의 아프가니스탄 진주와 폴란드의 독립적인 자유노조에 반하는 전쟁법률의 포고에 대한 기억도 뇌리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89년 당시에는 모든 곳에서 새로운 역학관계가 형성되고 있었다. 특히 폴란드에서는 1986년부터 자유노조가 새로운 힘을 얻어 활동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결국에는 공산주의 지도부와 ‘라운드테이블’의 설치에 합의하였고, 헝가리에서는 새로운 사회주의 지도부가 경제개혁을 실시하고 기존 공산당 지도층의 요구사항들을 포기하여 결국 오스트리아와 맞닿은 국경을 개방함으로써 많은 동독시민들에게 새로운 용기를 주었다.

그러나 동독정권은 이러한 개혁의 물결을 거부하였으며, 이념적 경직성을 더욱 강화하였다. 1939년에 있었던 히틀러-스탈린 조약에 관한 비판적인 기사로 인해 소련의 청소년 신문인 <스푸트니크>가 1988년 가을에 발행금지를 당하자 청소년들 사이에서는 커다란 불만이 생겨났다.

1989년 6월 27일에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양국의 귤라 호른(Gyula Horn) 외무장관과 알로이스 목(Alois Mock) 외무장관은 이전에는 통과가 불가능했으며, 동서를 갈라놓았던 ‘철의 장막’에 대한 상징적인 절단식 행사를 가졌다. 많은 동독시민들은 7월에 시작하는 여름휴가 기간에 자신들의 나라는 용인하려고 하지 않는 자유의 길을 찾아 헝가리로 떠났는데, 1989년 8월 19일에 있었던 ‘범 유럽 아침식사’에서 800~900명에 이르는 동독주민들이 이 국경선을 넘어서 탈출하였다.

9월 11일에 헝가리가 동독주민들을 위해 서독으로 향하는 국경을 개방하자 사흘 만에 1만5천명이 탈출하였으며, 이후 3주 동안 2만명의 추가 탈출자가 발생하였다. 이 밖에도 수천명의 탈출자들이 프라하 및 바르샤바 주재 서독 대사관에 체류하고 있었다.

이에 대한 동독의 조치는 주민들에 대한 헝가리와 체코슬로바키아로의 여행금지였다. 동유럽 소재 서독 대사관들의 상황이 계속해서 극적으로 전개되고 폴란드 및 체코슬로바키아 정부가 상황에 대해 책임을 지라는 동독 측의 요구를 거부하면서 동독지도부는 동독탈주민들의 서독행을 허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1989년 9월 … 헝가리, 동독탈주민 서독행 위한 국경개방

1989년 9월 30일 서독의 외무장관이며, 동독의 작센-안할트 출신인 한스 디트리히 겐셔는 많은 어려움을 참고 견뎌온 4,700명의 동독탈주민들이 환호하는 가운데 서독으로의 입국허가를 천명하였다. 동독을 벗어나는 방식은 기차를 타고 동독을 통과하는 방법이었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동독이 스스로 결정을 내린 것과 같은 모양새를 만들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동독에서는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였으며, 민심의 향배가 심상치 않게 전개되고 있었다.

1989년 10월 3일에 이미 프라하 주재 서독 대사관 마당에 또 다시 6천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드레스덴에서는 동독을 떠나려는 사람들을 실은 기차가 역을 통과하는 순간 체코슬로바키아 국경에서 동독 국경 수비대에 의해 송환된 동독주민들의 폭력저항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 저항은 동독인민군 특수부대에 의해 무력진압 되었으나, 이후 드레스덴시 프랑크 리히터 목사의 중재노력으로 경찰과 시위대 간의 평화로운 대화가 가능해졌다. 급기야는 공산당 소속의 베르크호퍼 시장도 20명의 시위자 대표들과 대화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의사를 표명하였는데, 이는 궁극적으로는 1989년 11월의 평화혁명으로 이어지는 평화로운 저항운동의 이정표 역할을 한 사건이었다.

수만명에 달하는 동독탈출자들은 자신들을 위해서만 행동한 것이 아니라 피폐할 대로 피폐해진 동독정권에 대해 저항하였으며, 동독에 남은 사람들은 좀 더 자유롭고 큰 목소리로 의견을 밝히는 등 체제를 변화시키고자 노력하였다. 고르바쵸프의 개혁과 같은 외부의 상황들도 교회의 보호 아래 생겨나고 존재했던 시민사회와 같이 기여한 바가 크며, 동독의 거의 모든 주민들이 전파를 수신하여 볼 수 있었던 서독의 TV를 통해 모든 동독인들이 상황에 관해 잘 파악하고 있었던 점 또한 큰 의미를 지닌다 하겠다.

현재 북한 정권은 자신들의 정보독점 상태를 유지하기 위하여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현재 북한에서 사용되고 있는 200만대의 휴대전화와 중국과의 교류 증가, 무엇보다도 허가를 받고 중국을 왕래하는 10만여 명의 북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위와 같은 노력은 점점 더 불가능한 목표로 보여진다. 이러한 상황은 과연 북한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가?

베른하르트 젤리거(Bernhard Seliger) / 독일 한스자이델재단 한국사무소 대표
번역 : 김영수 / 독일 한스자이델재단 한국사무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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