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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통일 타임머신! | 베를린 장벽 붕괴 … “문을 열라!” 2014년 6월호

베를린 장벽 붕괴 25주년 기념 | 독일통일 타임머신! 2
베를린 장벽 붕괴 … “문을 열라!”

1989년 10월 16일 라이프치히에서 진행되었던 월요시위. 출처 : undesarchiv(독일연방문서보관소)

1989년 10월 16일 라이프치히에서 진행되었던 월요시위. 출처 : undesarchiv(독일연방문서보관소)

지금으로부터 25년 전인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독일은 통일을 향한 길을 열었다. 비록 세부적 조건은 상이하지만 분단이라는 상황 아래 한국과 독일은 다양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독일의 통일과정을 반추해 보는 것은 평화적 통일을 위한 한국의 여정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독일통일의 결정적 분수령이 되었던 10대 사건을 되돌아 봄으로써 한국의 통일정책에 대한 시사점을 찾아본다(편집자주).

동독 내부에서 불만이 높아지면서 두 가지 현상이 나타났는데, 그 중 하나는 많은 동독주민들이 동독을 벗어나서 인근 사회주의 국가에 있는 서독 대사관으로 탈출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동독 내에서 수년간 활동하고 있던 저항세력들이 동독 내부의 잘못된 상황들을 알리기 위한 방법을 강력하게 모색하기 시작한 것이다. 시위의 시발점은 라이프치히의 니콜라이 교회에서 행해졌던 평화예배였는데, 니콜라이 교회는 이미 1980년대 중반부터 크리스티안 퓌러(Christian Fhrer), 크리스토프 본네베르거(Christoph Wonneberger)와 같은 2명의 용감한 목사들의 주도 하에 소규모 반정권 세력들을 위한 은신처 역할을 하였다.

라이프치히 가을 박람회가 열렸던 1989년 9월 4일은 박람회 취재차 서독 언론인들도 라이프치히를 많이 방문했던 시점이기도 했는데, 이때 카트린 핫텐하우어(Katrin Hattenhauer)와 게진데 올트만스(Gesinde Oltmanns)와 같은 반정권 활동가들이 월요예배를 마친 후에 자유를 요구하는 시위 참가자들에게 다섯 개의 현수막을 배포하였고, 그 중 대표적인 문구는 ‘자유로운 시민이 구성원인 열린 국가를 원한다.’였다.

1989년 9월 … 니콜라이 평화예배 후 터진 자유의 신호탄

1989년 10월 30일 플라우엔 시에 모인 40,000명의 월요시위 참가자들. 시민들은 민주적이며 평화적인 새출발을 요구하였다. 출처 : Bundesarchiv(독일연방문서보관소)

1989년 10월 30일 플라우엔 시에 모인 40,000명의 월요시위 참가자들. 시민들은 민주적이며 평화적인 새출발을 요구하였다. 출처 : Bundesarchiv(독일연방문서보관소)

동독의 슈타지(비밀경찰)는 서독 언론인들이 사진 촬영을 하고 있는 와중에도 현수막을 압수하고 시위대를 해산시키려 시도하였으며, 그로 인해 심한 야유를 받았다. 이를 계기로 소위 ‘월요시위’는 동독 정권에 반대하는 확고한 저항의 방편이 되었으며, 빠르게 확산되었다. 시위의 날짜와 시간을 월요일 오후 5시로 잡은 것은 여러 가지 장점이 있었는데, 우선 시위에 참가하는 사람들이 생업에 지장을 받지 않았으며, 사회주의 통일당에 충성하는 당원들은 매주 월요일에 개최되었던 당 회의에 참석하는 시간이었다. 서독으로 유출된 사진들은 주요 뉴스시간대인 저녁 7시와 8시 사이에 보도되었다. 한편 9월 4일 라이프치히에서 일어났던 사건으로 인해 슈타지가 곤경에 처한 직후 일정기간 동안 서독 기자들에 대한 라이프치히의 방문 금지령이 내려지기도 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동독 내 반정권 세력들을 위한 중요하고 성공적인 선전효과의 의미를 지녔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동독주민들이 시청하고 있던 서독 TV를 통해 동독에서 주민들의 불만이 계속 증가하며 시위가 확산되고 있다는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졌다. 시위는 더욱 활발하게 전개되기 시작했다. 첫 번째 월요시위 때에는 참가자 수가 1천명 남짓으로, 그 중 80명 이상이 체포되었으나 9월 25일 네 번째 월요시위 때에는 참가자 수가 8천명으로 늘어나더니 10월 2일 1만명, 10월 9일 7만명으로 증가하였으며, 10월 16일에는 그 수가 12만명 이상으로 늘어 명실상부한 대규모 시위가 되었고, 진압을 위해 군대가 동원되어야 하는 상황으로 발전하였다.

시위는 라이프치히뿐만 아니라 드레스덴(10월 4일 5천명), 플라우엔(10월 4일 1만명), 할레, 막데부르크 및 다른 소도시들까지 번져 나갔다. 동독 정권은 진압봉 사용과 체포의 방식으로 대응하였으며, 특히 드레스덴의 분위기는 긴박하였다. 10월 4일 동독을 탈출하려는 사람들을 실은 열차들이 드레스덴 기차역을 경유하였으며, 이 사람들 중에는 이미 몇 주 동안 체코 주재 서독 대사관에서 체류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시위 참가자들은 기차를 타기 위해 몰려들었으며, 기차역 일부가 파손되기도 하였다. 10월 8일까지 동독 경찰은 1,300명 이상을 체포하였는데, 이들 중 상당수는 시위에 참가하지 않은 시민들이었다.

시위 참가자들의 우선적인 요구사항은 정치적 자유였다. 감시국가의 종식을 원했다. 일부 사람들은 “동독을 떠나겠다.”고 외쳤는데, 특히 드레스덴 또는 플라우엔과 같이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 소재 서독 대사관에 망명했던 동독사람들을 실은 기차가 경유했던 도시들의 경우가 그러하였다. ‘여행의 자유, 의사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 등이 가장 흔하게 현수막에 등장했던 문구들이었으며, 시위의 우선적인 목표는 평화적이며 민주적인 새 출발이었다. 동독 공산당은 늘 ‘인민’을 위한다고 주장하였고, 동독 정권은 ‘인민’이라는 단어를 늘상 강조했지만, 실제로 이들은 인민을 억압하는 존재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시위 참가자들은 ‘우리가 바로 인민이다(Wir sind das Volk)’라는 것을 핵심구호로 사용함으로써 자신들이 진정한 의미의 인민임을 알리려고 하였다.

1989년 10월 … 동독 40주년 기념행사, 시위 정점으로

1990년 2월에 발행된 마지막 동독 우표 중 하나로, 시위 참가자들과 그들이 외쳤던 ‘우리가 바로 인민이다(Wir sind das Volk).’라는 구호를 기념하고 있다.

1990년 2월에 발행된 마지막 동독 우표 중 하나로,
시위 참가자들과 그들이 외쳤던 ‘우리가 바로 인민이다(Wir sind das Volk).’라는 구호를 기념하고 있다.

1989년 10월 7일 동독 창립 40주년 기념 행사일은 동독 정권과 시위대의 대결양상이 극명하게 전개되었던 날이다. 동독의 지도부는 이 날을 성대한 행사로 기념하며 사회주의 국가로서 동독이 이루어 낸 성과를 자축하려 하였지만, 이미 시작된 동독 탈출 행렬과 시위를 통해 동독의 사회적 기반이 붕괴되고 있음이 드러났다. 시위로 인해 계획하고 있던 대규모 행사들 중 일부가 취소되기는 했지만 사회주의통일당은 체면을 잃지 않기 위해 행사들을 강행하였다. 인민축제와 군사퍼레이드 그리고 자유독일청소년연맹(FDJ)과 에른스트 탤만(Ernst Thlmann) 개척자 조직에 소속된 청소년들이 벌이는 횃불 행진이 베를린에서 진행될 예정이었다. 이 행사들을 앞두고 동독 전역에서 1천여 명의 반정권 인사들이 체포되었으며, 예정된 축제는 엉망이 되었다.

주민들은 공개적으로 축제에 반대하는 시위를 전개하였으며, 소련 국가수반이며 당 서기장인 고르바초프의 방문에 맞춰 소련에서 이미 시작된 바와 같이 동독의 개혁을 요구하고 나섰다. 고르바초프 스스로도 개혁의 필요성이 존재하는 정권의 초청을 받은 귀빈으로서 불편한 심기를 표출하였다. 베를린 쉐네펠트 공항에 내린 고르바초프는 마중 나온 호네커에게 이례적으로 다음과 같은 직설적인 발언을 하였다. “내 생각에 위험은 삶에 제대로 반응하지 않는 사람에게 찾아옵니다.” 고르바초프가 자신의 회고록에 쓴 바와 같이, 이틀 후에 그는 호네커에게 다시 한 번 “삶은 결단을 필요로 합니다. 늦게 오는 자는 삶이 내리는 형벌을 받을 것입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경찰과 국가보위부(슈타지)의 월요시위 진압 시도가 실패로 끝난 이후에 시위대에 대한 군 투입 여부에 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플라우엔과 다른 도시들에서 모든 직장에 존재하고 있던 준군사조직인 직장전투조에 대한 동원령이 떨어졌다. 가장 극적인 상황은 10월 9일 라이프치히에서 벌어졌는데, 이날 예정된 대규모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이미 준군사조직 및 군대에 대한 동원령이 내려진 상황이었다.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악장을 맡고 있던 쿠르트 마주르와 같은 명사들이 사회주의통일당 수뇌부와 면담을 가진 후에 평화적인 대화를 통한 문제해결을 촉구하는 호소문을 채택하였으며, 한 병영에서는 일단의 하사관 후보생들이 자국민을 진압하기 위해 투입되는 데 대한 명령을 거부한 이후에 경찰 책임자는 보안요원들의 철수를 지시함으로써 7만명의 시위 참가자들은 자유롭게 시위를 전개할 수 있었다. 병영의 문은 닫힌 채로 유지되었으며, 책임권한을 지닌 자들 중 어느 누구도 자국민에 대한 학살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이로써 시위대는 동독 지도부와 대화를 시작하게 되었다. 호네커는 1989년 10월 17일에 국가수반 겸 당 서기장 직에서 물러났으며, 이미 오래 전에 베를린에서도 시위가 시작된 이후 11월 9일이 되자 사회주의 통일당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새로운 여행관계법이 의결되었다. 여행의 자유는 시위참가자들의 핵심 요구사항이었는데, 결국 서독으로의 상시적인 자유여행을 보장하는 규정이 통과된 것이다.

1989년 11월 … 베를린 장벽 붕괴

시위 참가자들이 현수막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현수막에는 사회주의통일당(SED)의 권력독점이 없는 상태에서의 자유선거를 요구하는 내용이 표시되어 있다. 출처 : Bundesarchiv(독일연방문서보관소)

시위 참가자들이 현수막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현수막에는 사회주의통일당(SED)의 권력독점이 없는 상태에서의 자유선거를 요구하는 내용이 표시되어 있다. 출처 : Bundesarchiv(독일연방문서보관소)

이날 저녁 귄터 샤보브스키 정치국원이 참석한 기자회견에서 한 이탈리아 기자가 해당 규정의 효력발생 시점이 언제인지 물었으며, 이 질문에 대해 샤보브스키는 생방송 중계에서 “지금 당장 유효하다.”고 답변을 하였다. 그러자 그날 밤 수천명의 주민들이 1961년부터 동독에 의해 완전히 가로 막혀 있던 베를린 장벽으로 몰려나왔다. 장벽의 통과지점들 중 하나인 보른홀머 거리에 있는 검문소 주변에는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지만, 동독 국경수비대 병사들은 아무런 명령도 받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출입 허가증이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통행을 허용하지 않았다.

운집한 군중은 “문을 열라, 문을 열라!”는 구호를 외쳤으며, 자정을 조금 앞둔 시점이 되자 검문소 책임자들은 개별적으로 스스로의 책임 하에 통로를 개방하는 쪽으로 결정을 내렸다. 베를린뿐만 아니라 내독 간 경계선의 통과지점들을 통해 수천명의 동독주민들이 서독으로 향했다. 1989년 11월 9일 밤은 독일통일을 위한 거대한 축제의 밤이었으며, 분단의 시간이 서서히 종말을 고하고 있었던 것이다.

베른하르트 젤리거 (Bernhard Seliger) / 독일 한스자이델재단 한국사무소 대표
번역 : 김영수 / 한스자이델재단 한국사무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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