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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분쟁 25시 | 100만 종족 대학살 … 르완다에 드리워진 죽음의 그림자 2014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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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분쟁 25시 2 | 100만 종족 대학살 … 르완다에 드리워진 죽음의 그림자

르완다 인종대학살 희생자들의 두개골이 키갈리 기념센터에 전시되어 있다. 1994년 4월 후투족 주브날 하비라이마나 르완다 대통령이 탄 여객기가 격추되자, 후투족은 이 사고를 투치족에 의한 암살로 간주하고 투치족을 무차별 학살했다.

르완다 인종대학살 희생자들의 두개골이 키갈리 기념센터에 전시되어 있다. 1994년 4월 후투족 주브날 하비라이마나 르완다 대통령이 탄 여객기가 격추되자, 후투족은 이 사고를 투치족에 의한 암살로 간주하고 투치족을 무차별 학살했다.

르완다는 아프리카 중앙부에 위치한 내륙국가로 북쪽은 우간다, 동쪽은 빅토리아 호수에 인접한 탄자니아, 서쪽은 콩고, 남쪽은 부룬디 등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 면적은 한반도의 약 1/10정도이며 국토의 대부분은 2,000m를 넘는 고산지대로 이루어져 있다. 1인당 GDP가 530달러로 아프리카 중에서도 최빈국에 속하는 나라이다. 인구는 약 1,100만 명이며, 후투족(85%)과 투치족(14%)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1994년 르완다 인종대학살의 근원은 1950년대 벨기에가 르완다에서 실시했던 후투족과 투치족에 대한 분리통치정책에 있다. 벨기에는 근거 없는 인종 우세론을 내세우며 투치족에게는 기초교육과 식민지 경영에 필요한 최소한의 교육을 제공했지만, 후투족에게는 그런 기회를 주지 않았다. 이런 정책에 힘입어 투치족은 자신들이 에티오피아와 수단, 이집트에서 남하한 후 야만국을 문명국으로 개조한 우수한 종족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사회적 인식 때문에 투치족은 도시의 공무원이나 사업가, 지주 등으로 등용된 반면, 후투족은 소작농으로 전락하여 하층민의 삶을 영위할 수밖에 없었다.

“무덤이 반밖에 차지 않았다! 더 분발해야 한다!”

1959년 르완다에서 후투족과 투치족 간에 처음으로 폭력충돌이 발생했다. 벨기에는 식민지 르완다의 독립이 가시화되자 독립 이후 르완다를 구상하게 된다. 투치족에 대한 우대를 점차 축소하면서 종족 구성 대부분을 차지하는 후투족에 관심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되자 후투족 지도자들은 이 기회를 이용해 보다 큰 권력과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활동에 나선다. 이런 과정에서 후투족과 투치족의 갈등은 후투족의 소수 투치족에 대한 일련의 폭력사태로 이어졌고 후투족은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인종대학살을 동반한 르완다의 본격적인 내전은 1994년 4월 6일 르완다 대통령이 탄 비행기가 정체불명의 집단으로부터 피격당해 탑승자 전원이 사망하면서 시작되었다. 사건 발생 직후 누가 비행기를 공격했는지 바로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투치족 반군의 소행이라는 유언비어가 확산되기 시작했다. 비행기가 추락한 다음날부터 라디오에서는 살인을 부추기는 광적인 메시지가 전해졌다. 후투족 정부군과 민병대 대원들은 바나나맥주에 잔뜩 취하거나 대마초, 혹은 약국에서 강탈한 약을 먹고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마을을 돌아다니며 마체테(정글도)로 사람들을 살해했다. 사람들은 잘려진 머리로 내기를 하며 경쟁적으로 살인을 해나갔다. 당시 가까스로 살아남은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마치 살인에 취한 환각자들과 같은 모습이었다고 한다.

학살은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다. 약 2개월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라디오에서는 “무덤이 반밖에 차지 않았다! 더 분발해야 한다!”와 같이 살인을 선동하는 내용의 방송이 계속되었다. 후투족 정부군은 집단 밀집시설에 피신해 있는 투치족과 온건 후투족을 찾아내 학살했다. 이런 학살과정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강간이었다. 강간은 대량학살 사건마다 여성을 성적 불구자로 만드는 등의 형태로 흔히 발생해 왔지만 르완다 인종대학살 당시 성적 폭력은 전례가 없는 수준이었다. 투치족과 온건 후투족 여성들 약 50만명이 강간을 당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1994년 7월 르완다애국전선이 르완다로 진입해 수도키갈리를 점령하면서 대량살육은 마침내 끝이 났다. 인종대학살이 시작되고 약 100일 정도가 지난 뒤였다. 이 기간 중 투치족과 온건 후투족 약 100만명이 후투족 정부군과 민병대에 의해 살해되었고, 300만명 이상이 인접한 콩고민주공화국, 우간다, 부룬디 등으로 피신하는 난민 신세가 되었다.

세계경찰을 자처하며 인도주의와 민주주의 등의 가치를 내세워 다른 나라의 내정과 각종 분쟁에 개입해온 미국은 르완다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할 때 사활적인 이해관계가 걸려 있지 않다고 판단해 개입하지 않았다. 여기에는 소말리아 신드롬이 한 몫을 한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미국은 르완다의 참상이 언론에 알려진 뒤에 후투족 민병대의 인종청소가 대량학살로 규정되지 않도록 하는 데 신경을 썼다. 왜냐하면 대량학살로 규정될 경우 제네바협정과 유엔 헌장에 따라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입장에서 책임을 회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1994년 4월 30일 통과된 유엔 안보리 결의안에서는 대량학살이라는 단어가 빠지게 된다.

죽음의 땅, 화해와 용서의 희망 선사하나?

지난 4월 7일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 폴 카가메 르완다 대통령이 20년 전 대학살을 추모하기 위한 기념식에 참여하여 점화하고 있다. 르완다 대학살은 100여 일 만에 전체 인구 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약 100만명이 목숨을 잃은 20세기 말 최대의 비극이었다

지난 4월 7일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 폴 카가메 르완다 대통령이 20년 전 대학살을 추모하기 위한 기념식에 참여하여 점화하고 있다. 르완다 대학살은 100여 일 만에 전체 인구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약 100만명이 목숨을 잃은 20세기 말 최대의 비극이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 폴 카가메 르완다 대통령은 2014년 4월 7일 르완다 수도 키갈리에 위치한 대학살 추모관에서 20년 전 100만명이 희생당한 대학살을 추모하고 통합과 화해를 염원하며 점화대에 불을 붙였다. 죽음의 땅이었던 르완다는 이제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다. 2010년 재선을 확정지은 카가메 대통령은 내부 갈등을 최소화하고 국제적 지원을 끌어내는 데 다소 진척을 보였으며, 최근 4년간 세계적인 경제위기 속에서도 약 8%대의 성장을 유지하는 등 르완다의 경제기적을 이끌고 있다. 이런 희망적인 모습에서 국제금융기구에서도 르완다의 경제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등 국가회생의 추진동력을 얻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르완다의 국내 정치 상황이 그리 녹록지 만은 않은 것이 사실이다. 2013년에도 정부와 야당의 갈등이 비폭력위기로 고조된 바 있다. 화해와 용서를 통해 국가 재건과 부흥에 나선 르완다 국민들의 통합적 지혜가 필요한 시점으로 보인다.

조상현 / 군사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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