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통일 타임머신! | 40년 공산당 독재 종말 “죄 지은 자에게 책임을!” 2014년 7월호
베를린 장벽 붕괴 25주년 기념 | 독일통일 타임머신! 3
40년 공산당 독재 종말
“죄 지은 자에게 책임을!”
지금으로부터 25년 전인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독일은 통일을 향한 길을 열었다. 비록 세부적 조건은 상이하지만 분단이라는 상황 아래 한국과 독일은 다양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독일의 통일과정을 반추해 보는 것은 평화적 통일을 위한 한국의 여정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독일통일의 결정적 분수령이 되었던 10대 사건을 되돌아 봄으로써 한국의 통일정책에 대한 시사점을 찾아본다(편집자주).
소련 모델에 따른 사회주의 국가들의 주요 특징 중 하나가 공산당의 독점적인 역할이었다. 여러 사회주의 국가의 경우를 보면 이전 복수정당 체제에서 존재했던 공산당 이외의 정당이 살아남은 경우가 있기는 하였다. 그러나 이는 외관상 다원주의를 선전하려는 형식상의 제스처에 불과하였다. 실제로 이러한 정당들은 정치적인 자율성을 전혀 갖지 못했다.
동독에서 노동자 계급을 대변하는 대표정당은 1946년에 소련 점령지역에서 탄생하게 된다. 규모가 크고 전통이 있던 독일 사회민주당(SPD : 사민당)과 독일 공산당(KPD)이 합쳐져 생겨난 것이다. 이들의 합당은 제1차 세계대전 시절에 경험하였던 ‘노동자 계급의 분열’의 교훈에서 비롯된 것이다. 당시 사민당원들 중에서 전쟁을 반대했던 사람들은 독자적으로 분리해 나와 새로 사민당을 설립하였다. 이로써 1919년부터 1933년 사이에 존속했던 바이마르 공화국에서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목표로 삼았던 공산주의자들과 다원적 민주주의를 지향했던 사민당 간에 극심한 대립양상이 전개된 바 있다.
이러한 연유에서 독일 공산당은 1945년 국가사회주의(나치즘)의 붕괴 직후에 활동을 재개하자마자 사민당과의 합병을 시도했던 것이다. 절대 다수의 사민당 소속 당원들은 이러한 시도를 거부하였으며, 불과 소수의 당원들만이 합병에 찬성하였다. 그러나 노동자 운동을 주도하는 데 있어서 공산당원들의 영향력이 불가피하게 압도적이었고 동독지역에서는 소비에트 점령군의 지원으로 합당이 이뤄졌다.
동독 전체주의 상징, 사회주의통일당의 탄생과 몰락

1989년 말 동독의 사회주의통일당(SED)은 사회주의통일당-민주사회당(SED-PDS)으로 개명하였다. 그러나 동독 주민들은 새로운 당을 신뢰하지 않았다. 출처 : Creative Commons
이렇게 해서 새로 탄생한 것이 독일 사회주의통일당(SED)이다. 사회주의통일당은 이후 40여 년간 유일한 통치정당의 위치를 점한다. 기독교민주당과 자유민주당, 민족자유당 그리고 농민연맹과 같은 정당들을 포괄하는 소위 ‘블록정당’들은 사회주의통일당의 지침에 따랐다. 이는 비단 정치적 분야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체 사회를 포괄하는 양상으로 전개되었으며 따라서 전체주의적 통치체제가 탄생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언론, 학교, 대학, 협회 등에 대한 통제가 이루어졌고 모든 통제요건을 사회주의통일당이 제시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나마 자율성이 존재하는 공간이 있었는데, 바로 교회였다. 사회주의통일당은 교회 또한 통제 아래 두었지만 철저하게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이 밖에도 많은 동독사람들은 사회주의통일당이 통치하는 국가에서 일정부분 체제와 타협하는 것이 가능하였다. 특히 1970년 이후, 예를 들면 거의 모든 동독주민들이 저녁에 서독 TV를 시청하던 것을 대표적인 사례로 들 수 있다. 서독 TV를 보는 것은 공식적으로는 금지되어 있었지만, 공공연한 비밀로서 허용되었다.
이렇듯 동독 시절의 상대적인 개방성은 서독과의 끊임없는 체제대결과 강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었다. 이로 인해 사회주의통일당은 정당성 확보의 필요성에 쫓기지 않았던 여타 사회주의 국가들과는 다른 환경을 맞았다. 훨씬 더 큰 운신의 폭을 허용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 결과 1989년 동독의 시위대가 대규모로 개혁과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시점이 되자 사회주의통일당의 통치역량은 이미 상당부분 누수되기 시작하고 있었다.
사회주의통일당은 우선 연로한 지도부 구성원들을 교체함으로써 체제운영 주체로서의 역할을 지속해 나가는 방법을 시도하였다. 1989년 10월 18일 사회주의통일당 정치국 회의에서 당 청년 조직이었던 자유독일청년회(FDJ)의 회장직을 역임한 바 있는 에곤 크렌츠가 에리히 호네커의 자리를 물려받으며, 동독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TV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 회의를 계기로 우리는 하나의 전환점을 맞이할 것이다. 우리는 정치적으로, 이념적으로 더욱 강화된 노력을 경주할 것이다.” 즉, 사회주의통일당은 저항운동의 정점에서 표면적인 개혁을 통해 기존의 주도적인 역할을 지속하기를 희망한다는 의미의 연설이었던 것이다.
주민들은 이 연설을 신뢰하지 않았으며 시위는 보다 과격해졌다. 사회주의 시절에 자주 등장하는 선전구호였던 ‘사회주의를 위한 전진!’은 시위대에 의해 ‘새로운 퇴진을 위한 전진!’으로 바뀌어 사용되었다. 사회주의통일당에 대한 신뢰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이 추락하였다. 시위대는 다음과 같은 말장난을 통해 세태를 풍자하였다. “울브리히트 log(거짓말장이), 호네커 log, 크렌츠 log, Dialog!(이제는 거짓말이 아닌 진정한 대화가 필요하다!)”
1989년 12월 … 사회주의통일당 해체

니스키(Niesky)시 소재 슈타지 지부 사무실에 시민들이 진입한 이후 사진. 슈타지 본부와 지부에 시민들로 구
성된 시위대가 진입하는 과정에서 일부 유리창과 의자 및 책상과 같은 사무집기들이 파손된 사례는 있었지만
사람에 대한 폭력은 없었으며, 단 한발의 총성도 울리지 않았다. 출처 : BStU(독일연방 슈타지문서보관소
1989년 12월 1일 동독 의회였던 인민회의는 마침내 동독 헌법에서 사회주의통일당의 통치요구 조항을 삭제하였다. 1989년 12월 3일에는 사회주의통일당의 중앙위원회 및 정치국 구성원 모두가 총 사퇴하였다. 12월 6일이 되자 에곤 크렌츠도 마침내 국가수반 자리에서 물러났다. 후임자로 민주사회당(PDS : 민사당)으로 개명한 사회주의 정당의 일원인 한스 모드로가 정해졌지만, 모드로는 자유총선이 실시될 때까지만 유지될 예정인 과도내각의 책임을 맡을 운명이었다.
사회주의통일당의 40년 통치기간 중 사회 전반에 걸쳐 문어발처럼 수만명의 공식·비공식 공작원을 동원하여 주민들을 감시해 왔던 국가보위부(슈타지)는 불법행위의 흔적들을 지우려는 시도를 자행하고 있었다. 형식적으로는 법치주의 국가의 틀을 과시하기 위해 마련해 놓았지만 실제로는 동독의 법에도 저촉되었던 불법행위들이었다. 슈타지 요원들은 상황이 급박해지자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다수의 비공식 요원들과 관련된 서류를 포함하여 문제가 될 소지가 있는 중요한 서류들을 파기하기 시작했다. 비공식 요원들 중 일부는 반체제 인사들의 수뇌부까지 침투해 있었으며, 수천명에 이르는 슈타지 요원들이 외국, 특히 서독에서 정체를 숨긴 채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비밀을 유지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12월이 되면서 라이프치히와 드레스덴과 같은 동독의 여러 도시에서 시민들이 슈타지의 해당 지역본부로 진입하는 일이 발생했다. 1990년 1월 15일이 되어서는 급기야 동 베를린 리히텐베르크 구역에 있는 슈타지 본부에도 시민들이 진입하였다. 수천명의 시위대는 ‘죄를 지은 자들에게 책임을!’, ‘비폭력!’ 등의 구호를 외치며, 수십년간 출입이 막혀 있던 금단의 구역으로 진입하였다. 동독 TV는 이를 보도하였고, 동독 장관회의는 슈타지 본부를 외부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시민운동 대표들을 파악하도록 인민경찰에 요구하였다.
1990년 1월 … 시위대, ‘비폭력’ 외치며 슈타지 본부 진입

(좌) 슈타지 문서 보관소 서고의 모습. 현재까지도 수많은 양의 슈타지 문서들이 정리되지 않은 채 서류꾸러미의 형태로 보관되고 있다. 출처 : BStU(독일연방 슈타지문서보관소)
(우) 동 베를린 슈타지 본부에 진입했던 시민들이 내걸었던 현수막. ‘(슈타지의 행적) 때리고, 밟고, 엿듣고…’ 출처 : BStU(독일연방 슈타지문서보관소
그러는 동안 슈타지가 남긴 유산에 관한 논란이 불거졌다. 다름 아닌 슈타지 문서를 공개함으로써 동독에서 자행되었던 많은 부당한 행위들을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할 것인가, 아니면 헬무트 콜 당시 서독 연방 총리가 제안한 바와 같이 그것을 공개하지 않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을 것인가에 대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시민사회는 문서의 공개를 강력하게 요구하였으며, 그 뜻을 관철시켰다. 이렇게 해서 독일통일의 날인 1990년 10월 3일에 문을 연 슈타지 문서보관소는 현재까지도 존재하고 있으며, 현재 독일연방 대통령인 요아힘 가욱 대통령이 그 초대소장을 역임하였다. 슈타지 문서 공개는 동독 정권이 기능했던 방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가치를 지닌 결정이었다. 또한 수십년에 걸쳐 감시와 억압의 대상이었던 사람들에게 자신들과 관련된 문서의 열람을 가능케 함으로써 부당한 정권의 가해자가 누구였는지 알 수 있게 하였다.
반면 문서의 공개는 헬무트 콜 총리를 비롯하여 공개를 반대했던 사람들이 우려했던 부작용도 함께 낳았다. 즉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진위를 밝히기 어려움으로 인해 특정 인사들에 대해 의심을 갖게 되는 문서가 일부 등장하고 있다. 문서가 온전히 보존되고 있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가장 민감한 내용인 서독에서의 슈타지 첩보활동과 연관된 문서의 상당 부분은 사라진 상태이며, 아직도 슈타지 문서보관소에는 손으로 찢긴 많은 양의 문서들이 여전히 어려운 복구의 순서를 기다리며 대기 중이다. 특정 문서들의 경우에는 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등 그 가치가 의문시되기도 한다.
한국이 통일되는 경우에도 비슷한 딜레마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민족화합의 차원에서 희생자들에 대한 지원방안이 필요하겠지만 한편으로는 오히려 북한의 총체적인 억압 및 감시체제를 덮어버리는 편이 나을 것인가, 아니면 모든 것을 공개하고 상처를 드러냄으로써 민족화합 측면에서는 부담이 될 수 있는 유산을 남길 것인가에 대한 딜레마 말이다. 완전한 치유란 어려울 것이며, 이는 대표적인 동독의 시민운동가인 배르벨 볼라이(Brbel Bohley)의 다음 발언 속에 함축적으로 잘 표현되어 있다. “우리가 원했던 것은 정의였지만, 얻은 것은 법치국가였다.”
부당함의 청산, 희생자들의 명예회복과 민족화합은 독일보다 분단의 기간과 경험이 훨씬 길고 지난하며 전체주의의 강도가 심한 한반도의 경우에도 중대한 과제가 될 것이다. 한국은 독일의 경험을 거울삼아 분단의 유산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가에 관한 논의를 서두를 필요가 있다.
베른하르트 젤리거 (Bernhard Seliger) / 독일 한스자이델재단 한국사무소 대표
번역 : 김영수 / 한스자이델재단 한국사무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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