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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통일 타임머신! | 통일의 가장 중요한 이정표 … 화폐, 경제, 그리고 사회통합 2014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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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의 가장 중요한 이정표 … 화폐, 경제, 그리고 사회통합

1990년 7월 1일 동독 사람들이 게라(Gera) 시에서 서독 마르크화를 받기 위해 은행 앞에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출처 : Wikimedia Commons)

1990년 7월 1일 동독 사람들이 게라(Gera) 시에서 서독 마르크화를 받기
위해 은행 앞에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출처 : Wikimedia Commons)

지난 1990년 5월 18일 테오 바이겔 서독 재무부 장관과 발터 롬베르크 동독 신임 재무부 장관이 동서독 간의 화폐, 경제 및 사회통합 조약에 서명함으로써 독일통일을 향한 가장 중요한 이정표가 놓이게 되었다. 1990년 7월 1일 발효한 이 통합작업은 단순히 서독 마르크화의 적용범위가 전 독일 지역으로 확대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 동독 지역에도 서독 지역과 동일한 경제 관련 법률 및 사유화 원칙을 적용하며, 서독 모델에 따른 사회보장제도를 도입하는 동시에 기본적인 경제체제로서 사회시장경제를 받아들인다는 것을 뜻하였다.

이로써 동독의 변화는 되돌릴 수 없게 되었으며, 10월 3일 이루어진 통일은 이러한 변화의 논리적인 귀결점이 되었다. 이는 동독 인민회의 자유총선을 실시한 지 불과 두 달, 그리고 동독이 새로운 내각을 구성한 지 한 달 밖에 되지 않은 시점이었기 때문에 더욱 눈길을 끌었다. 단지 3주만의 밤샘 작업 끝에 방대한 내용의 조약이 완성되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하여 경제 분야의 산적한 도전 과제들을 넘어서서 통일로 향하는 확실한 통로를 마련하였다.

1990년 7월 1일, 동서독 화폐·경제·사회통합 조약 발효

이러한 도전 과제들은 기술적이거나 경제적인 성격만 내포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1990년 2월 동독에서 최초의 인민회의 자유총선의 열기가 한창일 때 헬무트 콜 서독 총리는 수십만 명에 달하는 동독주민들이 모인 대규모 선거 집회에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로 향하는 방식에 대해 역설하였으며, 신속한 해결책의 모색을 원하는 동독주민들은 동서독 정치인들에 대한 압박의 수위를 점점 높여 갔다. 이러한 압박은 시위 또는 집회가 아닌 ‘이주’라는 방식에 의해 발생했는데, 장벽이 개방된 이후 불과 몇 달 사이에 수십만 명의 동독 사람들이 서독으로 이주하였다.

서독 마르크화는 언제나 독일의 경제부흥을 상징하는 화폐였던 반면에 동독 마르크화는 동독의 궁핍한 경제를 상징하였다.(출처 : Wikimedia  Commons)

서독 마르크화는 언제나 독일의 경제부흥을 상징하는 화폐였던 반면에 동독 마르크화는 동독의 궁핍한 경제를 상징하였다.(출처 : Wikimedia Commons)

당시 서독의 경제 사정은 나쁘지 않았지만, ‘오씨’(Ossi : 동독 출신을 비하하여 부르는 말)들이 ‘베씨’(Wessi : 서독 출신을 비하하여 부르는 말)들의 일자리를 빼앗아 가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이 늘어났다. 당시 서독 노르트라인 베스트팔렌 주의 노동부 장관이었던 헤르만 하이네만(사민당)이 최초로 일자리와 관련하여 서독인들을 우선적으로 배려해야 한다는 요구를 표명하였다. 나아가 당시 상당수의 서독 정치인들은 동독발 경쟁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통일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반대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당시 <슈피겔>은 “동독에는 두려움이, 서독에는 분노가”라는 표제의 기사를 연재한 바 있다. 당시에 동독 사람들은 개혁의 진행 정도가 충분치 않아서 서독 지역의 일자리와 높은 임금으로 인해 동독 지역의 젊고 유능한 인력들이 유출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하고 있었으며, 서독 지역에서는 수십만 명에 달하는 동독 지역의 새로운 동포들을 받아들일 준비는 되어 있었지만, 얼마 가지 않아 한계에 도달하고 말았다.

이는 결국 신속한 경제체제 및 화폐의 통합을 통해서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결론에 다다르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구체적인 실천방안이었다. 서독 마르크화는 서독과 동독에서 공히 확고한 신뢰의 대상이었다. 독일이 1923년과 1946년 두 차례에 걸쳐 극심한 초 인플레이션을 겪으면서 금융자산의 파탄과 극도의 곤궁을 경험한 이후 통화의 안정은 1948년에 실시한 화폐개혁 이후 독립성을 지닌 서독 연방은행이 추구하는 최고의 사명이었다. 1970년대에 발생했던 높은 인플레이션의 시기에도 서독의 마르크화는 다른 유럽의 통화들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안정성을 유지하였으며, 동독 또한 이러한 안정성으로 인한 수혜를 원하였다. 알루미늄 재질의 동전으로 만들어진 동독의 돈은 가치가 없었으며, 인기 있는 서독의 물건들을 구매할 수 없는 등 동독이 지닌 문제들을 상징적으로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경화인 서독 마르크화를 내고 소위 인터숍에서 서독의 물건을 사는 것이 가능했던 분단 시절의 동독에서는 이미 서독의 마르크화를 가지는 것은 하나의 희망사항이었으며, 대부분의 일반 동독주민들에게 이는 채워질 수 없는 꿈이었던 것이다.

화폐통합, 차등 환율 적용 … 동독산업 붕괴 초래

1990년 5월 18일 서독의 재무부 장관인 테오 바이겔(오른쪽)과 동독의 재무부 장관인 발터 롬베르크(왼쪽)가 화폐, 경제, 사회통합 조약에 서명하고 있다. 그 뒤에는 로타 드 매지에르 동독 총리와 헬무트 콜 서독 총리가 서있다.(출처 : 독일연방사진보관소

1990년 5월 18일 서독의 재무부 장관인 테오 바이겔(오른쪽)과 동독의 재무부 장관인 발터 롬베르크(왼쪽)가 화폐, 경제, 사회통합 조약에 서명하고 있다. 그 뒤에는
로타 드 매지에르 동독 총리와 헬무트 콜 서독 총리가 서있다.(출처 : 독일연방사진보관소

화폐통합을 위해서는 환율이 정해져야만 했다. 경제학자들은 낮은 환율을 주장하였는데, 이를 통해 경쟁력이 낮은 동독 기업들의 생존율을 높일 수 있다는 근거를 들었다. 그러나 안 그래도 매우 낮은 임금을 받고 있었던 동독주민들의 입장에서는 1:1보다 낮은 환율을 도입하면 향후에도 너무 낮은 임금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보면 생산성이 올라간 후에 임금이 상승하는 것이 맞지만, 정치적인 측면에서는 그러는 사이에 너무 많은 인구이동이 발생하게 되는 상황이었다.

동독 주민들은 강력하게 1:1 환율의 도입을 요구하였으며, 이는 100% 실행되지는 않았지만, 주요 부분에서는 상징적으로 도입이 되었다. 예를 들면 60세 이상인 경우에 6천마르크까지, 성인은 4천마르크까지 그리고 아동 및 14세까지의 청소년들은 2천마르크까지 1:1 환율을 적용하여 환전이 가능하였다. 그 이상의 금융자산에는 2:1 환율이 적용되었으며, 채무에도 마찬가지로 2:1 환율을 적용하였다. 임금, 장학금, 연금, 임대료 등에도 1:1 환율을 적용하였다. 소재지가 동독에 있지 않은 사람 및 회사에 속한 자산에 대해서는 3:1의 환율을 적용하였다.

‘독일통일기금’ 조성 … 1990~1994년 822억유로 투입

1923년 발생했던 극심한 초 인플레이션은 독일 사람들의 집단 기억 속에 깊이 각인되었다. 그 이후부터 안정적인 통화는 언제나 가장 중요한 정치적인 목표가 되었다. 사진 속의 지폐는 1923년 제국은행에서 발행했던 100조마르크권이다.

1923년 발생했던 극심한 초 인플레이션은 독일 사람들의 집단 기억 속에 깊이 각인되었다. 그 이후부터 안정적인 통화는 언제나 가장 중요한 정치적인 목표가 되었다. 사진 속의 지폐는 1923년 제국은행에서 발행했던 100조마르크권이다.

이렇듯 복잡한 규정들로 인해 1990년 7월 화폐통합 발효시점 직전의 짧은 기간 동안에 잠깐 혼란이 있기도 하였지만 통합된 마르크화는 유로화로 대체될 때까지 안정성을 유지해 갔다. 하지만 이러한 화폐통합은 1948년 서독이 화폐개혁을 단행한 이후에 경험했던 경제기적으로 연결되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그 반대였다. 가격, 임금, 채무 등의 정산 기준이 된 경화의 갑작스러운 유입으로 인해 이전에 상호 의지했던 동유럽 국가들과의 시장이 붕괴되면서 단지 몇 달 만에 신연방주에서는 대규모 산업해체 및 재편성 과정이 발생하게 되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현재까지도 진행되고 있다.

사회주의가 남긴 결과를 청산하는 데 필요한 재원을 조달하는 것이 정치적 주요 의제로 다루어지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통일 및 이전 단계에서의 재원 마련을 위해 1990년 5월 16일에 ‘독일통일기금’이 조성되었다. 독일통일기금은 동서독 간의 화폐, 경제 및 사회 통합을 이루기 위한 특별국가협약이었으며, 다섯 개의 신생연방주들의 정비를 지원하기 위한 예산 계획 중 하나로서, 1994년까지 신연방주들을 위해 서독에서 상대적으로 빈곤한 주들과 상대적으로 부유한 주들 간에 행해지고 있던 재정조정제도를 대신하는 제도였다.

독일통일기금은 특히 동독 지역의 재정 기반을 확립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기금의 규모는 당초에 1990년부터 1994년까지 4년간 총 1,150억마르크로 계획하였으며, 1991년부터 서서히 감소하는 것으로 예상하였으나, 실제 액수는 여러 차례에 걸쳐 상향 조정되었다. 1,150억마르크로 계획한 것이 1990년 5월이었는데, 석 달 후에 1,463억마르크로 증액되었으며, 1993년 3월에는 최종적으로 1,607억마르크로 증가하였다.

이에 따라 1990년부터 1994년 사이에 유로화로 환산, 총 822억유로가 독일의 통일재건을 위해 투입되었으며, 그 중 40%가 구 동독 지역의 지자체 재건에 활용되었다. 대부분의 통일기금은 금융시장을 통해 조달하였으며 연방 정부의 직접 지원금은 그리 많지 않았다. 독일통일기금의 금융비용은 연방 정부와 서독의 연방주 및 지자체가 분담하였는데, 연방 정부가 253억7천만유로를 지불하였으며, 구 서독 주들이 82억2천만유로를, 기금 대출을 통해서 485억7천만유로를 부담하였다.

통일재원 마련과 화폐, 경제 및 사회 통합은 독일 통일과 관련하여 가장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는 주제다. 단순히 경제적 측면에서 볼 때, 실제로 취해졌던 방안들은 효율적이지 못했으며 신연방주들의 경제발전을 저해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곤 한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만 본다면 이는 옳은 주장이다. 하지만 독일 통일이 가진 정치적인 측면 또한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낮은 경쟁력과 빠른 산업재편 과정에 놓여있던 동독 지역에서 서독으로의 대규모 이주사태가 발생하게 되는 딜레마를 마주한 시점에서 빠르고도 신속한 효과를 나타내는 처방이 필요하였다. 화폐통합이 바로 그런 처방이었으며, 그러한 효과적인 처방이 없었다면 정치적인 통일은 그렇게 신속하게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낮은 경쟁력과 빠른 산업재편 과정에 놓여있던 동독 지역에서 서독으로의 대규모 이주사태가 발생하게 되는 딜레마를 마주한 시점에서 빠르고도 신속한 효과를 나타내는 처방은 화폐통합이었다. 화폐통합이 없었다면 정치적인 통일은 그렇게 신속하게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베른하르트 젤리거 (Bernhard Seliger) / 독일 한스자이델재단 한국사무소 대표
번역 : 김영수 / 한스자이델재단 한국사무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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