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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동네 리얼스토리 | “대한적십자사? 그게 뭔데?” 2014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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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동네 리얼스토리 43 | “대한적십자사? 그게 뭔데?”

함경북도 청진시 청암구역 연천리는 시내에서 100리(약 40km) 정도 떨어진 어촌 마을이다. 연천 앞바다엔 작은 촌이지만 수산사업소가 있고 사업소엔 천해양식반도 있다. 2008년에 한국에 입국한 연천주민 한 씨를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그녀는 이제 6년에 걸친 한국 생활에 만족을 표시하며 행복해 했다.

한 씨는 딸 둘을 데리고 한국에 정착하는 데 성공했다. 궁금했던 것은 그렇게 구석진 곳에 살며 어떻게 국경을 넘어 한국까지 오게 되었는지, 애초 무엇에 끌려 정든 고장을 떠날 결심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것들이다.

“적지물건을 버젓이 들고 다니면 어떡해!”

대체로 보면 못먹고 못살아 결국 목숨을 건지기 위해 탈북한다고는 하지만 한국에 대해 전혀 모르면 앉아 굶어죽었으면 죽었지 떠날 생각을 못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고향을 떠날 결심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물음에 한 씨는 뜻밖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결과적으로 정말 작은 일에서부터 시작된 용단이었다.

연천은 바다만 끼고 있을 뿐 토지 전반이 석회암 지대여서 낟알을 심을 수 없는 고장이라 한다. 그냥 야채 같은 것은 그런대로 심어 풋것이나마 건질 수 있는 아주 척박한 고장인 셈이다. 찢어지게 가난한 주민들의 삶은 늘 바다에서 얻는 수산물을 거래해 그런대로 죽이나마 끓이며 살았는데 고기잡이 도구와 연료가 부족해 배도 제대로 띄우지 못해 사는 게 말 그대로 고역이라 말했다.

한 씨의 건너 편 집에는 보위지도원 리 씨가 살았는데 가까운 이웃이라 색다른 음식이 생기면 서로 나누며 가깝게 살았다고 한다. 어느 날 한 씨는 바다에서 수작업으로 건진 홍합을 가지고 먼 청진 수남시장에 나왔다가 마대 하나를 샀다. 마대에는 ‘대한적십자사’란 한글이 적혀 있었고 큰 글씨로는 ‘요소비료’란 글자가 있었다. 얼핏 봐도 질기고 또 새것이어서 그걸 보물처럼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사실 촌엔 마대를 쓸 일이 많았다. 이른 새벽에 나가 미역을 건져 담아오려고 해도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집에 있던 마대들은 다 낡아 덕지덕지 기운 것들뿐이었다. 기운 마대에 젖은 미역 같은 것을 담으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이내 찢어져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그런 처지에서 새 마대가 생겼으니 어찌 기쁘지 않을까. 다음 날 아침 날이 밝기 무섭게 남편이 새 마대를 들고 미역을 건지러 나갔다.

아침밥이라야 옥수수 쌀 몇 숟가락에 미역을 넣고 죽을 쑤는데, 앞 마당가에서 울리는 남자의 목소리가 커서 한 씨는 얼른 일어나 밖을 내다보았다. 건너 집에 사는 보위원 리 씨가 한참 남편을 윽박지르고 있었다.

“아니,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적지물건을 그렇게 버젓이 들고 다니면 어떻게 하는가! 이건 참 이웃이라도 못 본 척 넘어 갈 수가 없네 그려.”, “아, 이게 적지물건이라뇨? 집의 안까이(아낙네를 통속적으로 이르는 함경도 방언)가 어제 청진에서 사 갖고 온 마댄데요.” 남편의 풀 죽은 목소리다. 한 씨도 한달음에 달려 나갔다. “아, 그건 수남 장마당 마대장사한테서 돈 주고 산 물건인데, 적지물건이 아니꾸마.”

그러자 보위원이 마대를 거꾸로 쳐들었다. 담겼던 미역이 쏟아지고 빈 것을 들고 쭉 펴 보인다. “자, 이래도 적지물건이 아니요?” 하며 마대에 쓴 글을 가리켰다. “요소비료라 쓰지 않았습니까?” 하자 “그 밑에 대한적십자사는 안 보이고?”라고 한다. “이게 뭔데요? 평양적십자병원이 아닙니까?” 남편이 말하자 보위원이 어처구니없어 허허 웃었다. “이것 봐, 병원에서 비료를 만들어? 그리고 여기 대한이라는 글은 안 보여?”

TB_201409_43 “그건 크다는 말 아닙니까? 아님 추운 대한 날씨에도 얼지 않는 비료라는 뜻인가?”, “이런 무식한…, 이거 회수요!” 보위원이 마대를 들고 휙 돌아선다. 한 씨는 영문을 알 수 없어 보위원을 막아섰다. “그거 우리 집에 하나밖에 없는 새것이고 재산인데 이리 줍서. 그걸 왜 회수함두?”, “진짜 문제 삼아 잡아가야 정신 차리겠소? 대한이라는 말은 남조선을 이르는 말이란 말이요.”, “예에?”

“이런 무식한…, ‘대한’은 남조선을 이르는 말 아니요!”

한 씨 부부는 남조선이란 말에 단박 속이 얼어들어 아무런 소리도 못했다. 그래도 너무 아쉬워 한 씨가 또 물었다. “그까짓 마대에 무슨 사상이 있슴두? 그냥 줍서. 예?”, “어허, 사상이 있지. 이 마대 질을 좀 보오. 물 한 방울에 우주가 비낀다고 요걸 봐도 남조선의 발전상을 알 수 있으니 이걸 사람들이 보면 머리통에 병이 들지 않겠소. 이웃이니까 봐 주는 줄 알라구!”, “남조선이 그렇게 발전했음두?”, “어허 그런 건 묻는 게 아니야.”

며칠 후에 한 씨가 염탐해 보니까 보위원집에서 슬그머니 그 마대를 쓰더란다. 하지만 그 아쉬움보다는 발전했다는 남조선에 대한 호기심이 더 불타올랐다. 지금껏 사람 못 살 곳이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선전을 들었던 것에 대한 역심리이기도 했다. 지금 한 씨는 그 심보 고약한 보위원에 대해 되레 고맙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보위원의 그 말이 훗날 닿은 탈북 브로커를 따라 서슴없이 나서게 된 씨앗이 되었기 때문이라 했다.

“아, 그건 수남 장마당 마대장사한테서 돈 주고 산 물건인데, 적지물건이 아니꾸마.”, “여기 대한이라는 글은 안 보여?”, “그건 크다는 말 아닙니까? 아님 추운 대한 날씨에도 얼지 않는 비료라는 뜻인가?”, “이런 무식한…, 이거 회수요!” 보위원이 마대를 들고 휙 돌아선다.

이지명 / 계간 〈북녘마을〉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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