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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 교사의 생생이야기 | 월남자 가족 옥이네의 진로 이야기 2013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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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 교사의 생생이야기 1 | 월남자 가족 옥이네의 진로 이야기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의 한 학교에 배치되어 교편을 잡고 있을 때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 학생이 전학을 왔다. 옥이라는 이름의 그 여학생은 전형적인 월남자 가족으로 낙인된 집안의 아이였다.

월남자 가족이란 말 그대로 남으로 ‘도망간’ 사람들의 잔류가족을 말한다. 해방 직후에는 북한이 말하는 착취계급 즉 지주나 자본가들이 월남하였고 한국전쟁 시에는 1.4후퇴를 하던 때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흥남부두를 통해 월남하였다.

형님들 ‘조국 배신’해 탄광 노동자로 전전

담임교사는 학생이 전·출학을 하게 되면 학생의 ‘꼬리표’라 불리는 문건을 받거나 보내게 되는데 거기에는 학생의 출신성분과 가정환경이 자세히 적혀 있다. 이 ‘꼬리표’는 학생이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진출해 직장을 다니거나 이동하여도, 소년단에서 사로청, 직맹이나 노동당으로 조직을 이동하여도 계속해서 따라다닌다. 즉 요람에서 무덤까지 따라다니는 북한사회의 증표에 해당한다.

옥이의 문건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있었다. 아버지의 형제들이 해방 후 모두 월남하여 아버지만 북에 남게 되었고 홀로 남은 아버지는 형님들이 ‘조국을 배반했다’는 이유로 깊은 산골에 있는 탄광으로 배치되어 탄부로 수십년 세월을 고되고 힘든 노동으로 보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는 탄부에서 벗어나 시내에 위치한 한 공장의 노동자로 취직하게 되었고, 옥이는 제법 규모가 큰 학교로 전학을 오게 된 것이다. 더욱 신기한 것은 당 비서(학교의 부교장이 겸함)가 나를 부르더니 “학생을 잘 돌보라”고 특별히 지시하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 학생이 바로 내가 사는 아파트의 옆 동으로 이사를 왔다는 놀라운 소식도 듣게 되었다. 그 아파트는 몇 안 되는 고급아파트라 주로 당, 정의 간부나 보위부, 안전부 중상급 이상의 행정 관료들이 집중되어 있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들어보니 며칠 전 옆 동의 4층 3호에 몇몇 사람들이 도배와 장판을 하고 집안 인테리어를 다시 했고, 그 후 그 학생의 가족이 이사를 왔다고 한다.

그렇게 영문을 모르는 채, 며칠간 학생을 지켜 보게 되었다. 새로 이사 온 학생이라 서먹서먹해 할 것도 같고, 더욱이 시골에서 이사 온 학생들은 시내 학생들의 텃세에 기가 죽는 것이 보통이라 자세히 살펴보았다.

생각 밖에 옥이는 매우 자신감이 넘쳐 있었다. 또래 학생들의 평균키에 미치지 못할 정도로 키가 작고 비쩍 마른 체형인데다 얼굴이 햇볕에 그을려 가무잡잡하였으나 눈빛이 빛나고 의지가 있어보였다.

당시 수학교과목을 맡고 있던 나는 옥이의 실력을 알고 싶어 성적테스트를 해보았는데, 학급의 다른 학생들을 압도할 정도로 뛰어났다. 물론 학생의 성적표가 함께 따라왔기에 옥이가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라고는 생각했으나, 공부를 잘하는 정도가 아니라 머리가 비상한 수재형이었다.

어느 날 저녁 나는 퇴근길에 옥이와 함께 갈 기회를 만들고 30여분을 걸으면서 여러 가지 얘기를 나누는 중 옥이가 울분에 차 있음을 발견하였다. 옥이는 내게 ‘사회가 부조리하다’는 뜻으로 얘기를 하였다. 그리고 지나온 고생스러웠던 이야기를 마음 아프게 풀어내었다. 그러나 나는 옥이가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이해하고 넘어갔다.

그로부터 십여일이 지나서야 왜 옥이네가 갑자기 시내로 이사를 왔는지, 사람들이 왜 집을 꾸며주고, 옥이 아버지가 왜 노동자로 배치되었는지에 대한 영문이 풀렸다. 하루는 학교 운동장으로 검은 승용차가 들어왔다. 교장까지 나가서 마중하며 차에서 내린 사람은 머리가 희끗한 학자풍의 신사였는데 그가 바로 옥이의 큰 아버지였던 것이다.

지난해 북한의 한 중학교 입학식에서 신입 학생 및 학부모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지난해 북한의 한 중학교 입학식에서 신입 학생 및 학부모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해외동포 큰 아버지 덕 봤으나 여전히 ‘월남가족’

옥이의 큰 아버지는 월남 후 캐나다로 건너가 유명한 대학교수가 되었고, 북한에 많은 후원과 지원을 한 공헌으로 월남 후 처음으로 고향을 방문할 특권을 가지게 되어 꿈에도 그리던 동생가족에 대한 방문을 원했던 것이다. 큰 아버지는 옥이네 집과 옥이가 다니는 학교를 방문하였으며, 후원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루아침에 ‘벼락부자’가 된 옥이네는 으쓱해 있었다.

방문단은 떠나가고 우리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옥이는 여전히 학급에서 뿐만 아니라 학년에서 1등을 놓치지 않고 있다가 ‘김일성고등물리학교’라 불리는 북한의 중등수재교육기관에 편입하여 나와는 채 몇 달을 함께 보내지 못하고 떠났다.

그러나 방학만 되면 나를 찾아오곤 하였는데, 6학년 졸업을 할 무렵 매우 수심에 찬 얼굴로 이런 얘기를 하였다. “사범대학 수학과를 졸업하고 선생님처럼 교편을 잡고 싶습니다만 나는 월남자 가족이라 기계대학에 추천받았습니다. 역시 우리 사회는 부조리합니다.” 옥이의 얘기는 내내 머리를 짓눌렀다.

그 후, 옥이는 기계대학에 입학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기계공업성에 배치받기를 원하였으나 고향의 한 기계공장의 기사로 돌아왔다. 옥이네 가족은 내내 큰 아버지가 한 번 더 오기를 기다리는 눈치였으나 그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물밑으로는 서로 소식을 주고받는 것 같았다.

지금 그 옥이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교육 교양하던 스승이 오늘날 월남자가 된 것에 대해서 말이다.

채경희 / 삼흥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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