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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인 남한사회 정착기 | 세종대왕, 부패하고 무능한 착취자? 2015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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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인 남한사회 정착기 69

“세종대왕, 부패하고 무능한 착취자?

 한국 지폐를 처음 본 것은 탈북 과정에서 태국 난민수용소에 있을 때였다. 난민수용소에 불법체류로 붙잡힌 남한 사람들이 가끔 들어왔는데 그들이 소지한 한국 돈을 보게 됐다. 신기한 마음으로 본 1만원권에 세종대왕의 초상이 있었다. 지폐가 골동품처럼 느껴졌다. ‘지금이 어느 세월인데 케케묵은 옛날의 봉건군주를 지폐에 넣다니.’ 함께 있던 동료들이 허허 웃었다.

북한에 살 때 일제식민지 시대 총독부가 발행한 지폐와 그 이전 일본 지폐를 골동품으로 수집하는 중국 상인들이 왔다고 해서 그것을 얻으러 뛰어다닌 적이 있었다. 그 과정에 여러 장을 손에 넣을 수 있었는데 거기에 보니 노인의 초상이 그려져 있었다. 지폐 속 노인을 안중근에게 저격 당한 이토 히로부미 혹은 ‘메이지 왕’이라고 했었다. 그래서 ‘아, 골동품 지폐가 이런 것이었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현 시대에 유통되는 한국 돈이 골동품처럼 생긴 것이다.

북한, 계급투쟁 설명 위해 왕·지배계층 비하

김일성이나 마오쩌둥을 비롯해 20세기 모습이 그려져 있는 북한 돈, 중국 돈과 너무 달랐다. 일본 엔이나 미국 달러도 초상은 그려져 있었지만 지폐의 품격은 현대적인 느낌이 확연했다. 그런데 한국 돈에 반영된 내용은 온통 옛날 것이었다. ‘한국에선 왜 돈을 이렇게 만들었지?’ 이 궁리 저 궁리 해봤지만 도통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도대체 세종대왕이 어느 고망년 때 사람인데 현대 지폐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글쎄 미국 달러에 있는 조지 워싱턴쯤이라면 몰라도, 아니 차라리 단군 할아버지를 넣는 게 낫지 왜 하필 세종대왕인가.

북한에서 교육을 받았으니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다. 북한 사람들에게 세종대왕은 별치 않은 인물이다. 아니 그런 왕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 사람이 더 많다. 북한 역사교육은 계급투쟁의 관점에서 진행된다. 그러므로 교육내용에서 왕이나 지배계층을 위주로 하지 않고 농민, 농노, 농민폭동, 의병투쟁 등을 중심에 놓는다. 왕이나 양반 관리들은 계급투쟁 차원에서 필요한 정도만 언급된다.

왜 그럴까. 공산주의자들의 역사에 대한 정의에서 비롯된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인류역사를 계급투쟁의 역사라고 규정했고, 김일성은 “역사란 인민대중의 자주성을 위한 투쟁의 역사”라고 정의했다. 그러므로 왕이나 지배계층이 역사교육의 기본을 이룰 수 없다. 계급투쟁을 설명하기 위해 왕이나 지배계층의 횡포와 착취, 부패, 무능, 비겁함 같은 것을 지적한다.

따라서 세종대왕도 그런 대상 중 한 명일 뿐이다. 다만 한글, 즉 훈민정음이 창제된 시대의 왕이었다는 정도, 교과서가 아닌 참고서에는 훈민정음 창제에 관심이 좀 특별했던 왕 정도로 언급됐다. 역사 전문가들이 보는 서적이나 「조선전사」, 「리조실록」 같은 곳엔 비교적 자세히 언급된다. 그렇지만 그런 책들을 일반 주민과 전공이 다른 학생들이 잘 보지 않는다. 없는 시간을 낭비하며 읽어봐야 그저 그렇고 그런 내용이겠지 한다. 이미 교과서를 통해 봉건 왕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머리에 차있기 때문이다.

어느 참고서를 본 기억이 있는데 거기에 세종대왕이 훈민정음 창제에 관심을 돌린 사실이 언급되어 있었다. 문제는 세종대왕이 훈민정음 창제에 관심을 둔 배경을 지적한 대목이다. 세종대왕이 백성을 어여삐 여겨 훈민정음에 관심을 돌린 것이 아니라 백성들에게 깨우치기 쉬운 한글을 만들어주면 봉건통치에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지배계층끼리는 백성이 알아먹기 힘든 한문을 쓰고 백성에게는 쉬운 한글을 쓰게 하면 지배체계의 신속성,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고 타산한 교활한 술책이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훈민정음은 인민대중의 사랑을 받았고 인민의 노력과 양심적인 학자들에 의해 완성될 수 있었다고 설명되어 있었다.

남한에서 훈민정음 창제에 기울인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에 대해 상세히 서술하고 그 업적을 기리며 나라의 얼굴과 같은 광화문 한복판에 세종대왕 동상까지 세운 것을 북한 사람들이 알면 의아해 할 것이다.

북한 교육에서 왕과 양반 관료에 대한 평가가 아주 부정적으로 일관된 것에 비해 장군들에 대해서는 양호한 편이다. 이순신 장군에 대한 평가를 예를 들면 임진왜란에서 연전연승한 무적의 애국명장이라고 가르친다. 거북선을 만든 데 대해서도 세계 최초의 철갑선을 만들어 민족의 슬기와 기개를 만방에 떨쳤다고 칭찬한다.

이순신보다 뛰어난 영웅이 6·25 때 활약했다?

하지만 여기에도 꼭 토를 단다. 이순신이 그처럼 혁혁한 전공을 세울 수 있은 것은 애국심으로 뭉쳐진 인민대중이 있었기 때문이며, 이순신의 애국심은 백성의 나라를 위한 애국심이 아니라 인민의 억압자인 왕에 대한 충성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비록 임진왜란에서 공은 있으나 그 역시 반인민적 지배계층이라는 것이다. 또 6·25전쟁에서 적의 화구를 가슴으로 막은 공화국영웅 이수복은 18살에 불과한 인민군 병사였지만 이순신 장군 정도에 비교할 수 없는, 인민의 나라를 지킨 참된 영웅이라고 극찬한다. 을지문덕, 강감찬 등 우리 역사의 모든 장군들이 다 이렇게 평가된다.

10월 9일 한글날을 공휴일로 지정하고 세종대왕을 기리며 이순신 장군의 대형 동상을 세운 남한 현실과 역사 속 인물까지 이념에 의해 요리되는 북한의 편향된 역사 평가, 북한은 역사를 객관적으로 평가해야 하고 남한은 옛날보다 이제는 현대사 인물에 무게를 더했으면 좋겠다. 이런 면에서 역사에 대한 남북의 서로 다른 평가와 교육이 통일시대에 어떤 합리적인 꼭짓점을 찾아야 할지 미리 연구해 두는 것도 통일준비 가운데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도명학 / 자유통일문화연대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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