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세히보기 2015년 4월 1일

세계분쟁 25시 | 남북 수단, 아프리카 분쟁 평화적 해결 대표 사례 2015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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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분쟁 25시

남북 수단, 아프리카 분쟁 평화적 해결 대표 사례

 

아랍어로 ‘검다(수다)’에서 비롯된 수단은 아라비아 인이나 베르베르 인과 같은 ‘흰(베이다)’ 사람들이 사는 지중해 연안을 ‘베이단’이라 불렀기 때문에 사하라 사막과 그 남쪽의 흑인 거주 지역을 ‘흑인의 나라’라고 총칭하면서 ‘수단’이라는 명칭을 갖게 되었다. 예로부터 수단은 북쪽의 이슬람 문화권과 남쪽의 흑인문화권을 연결하는 가교역할을 해왔다.

현재 수단지역에는 과거 많은 나라들이 있었다. 기원전에는 고대 이집트 제국, 쿠시왕국, 악숨왕국, 로마제국 등이 이 지역을 통제했다. 약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초반 이집트 출신 상인들이 수단을 오가며 무역을 하던 중 기독교가 전파되었다. 19세기 초에 투르크-이집트 제국의 수단 침공은 수단 내부의 분열을 가져왔다. 자원 확보를 위한 남부수단 전체를 제국에 합병하는 정치·경제 지배체제가 만들어지면서 인종 계층화를 심화시켰으며, 남부수단 출신은 식민대상으로 전락해 사회적으로 낮은 지위를 갖는다는 인식이 사회 저변에 확산했다. 이집트의 수단 침공은 북부 이슬람과 남부 기독교의 대립을 가져왔고, 남부 수단사람들을 노예로 활용하면서 인종 갈등이 극심해졌다.

북 이슬람과 남 흑인문화권 가교 지대

한편 1899년에 수단은 영국·이집트의 공동 통치하에 들어간다. 그러다가 1924년 영국의 직접통치 시대에 접어드는데 그때 기독교 중심의 남부는 이슬람 중심의 북부로부터 분리되었다. 특히 1930년에 영국은 남부수단의 행정을 아랍식보다는 영국의 동아프리카정책에 맞도록 바꾸고, 영국의 아프리카 종단정책의 일환으로 영국령 동아프리카 국가들과 같은 방식으로 운영하게 했다. 이렇게 되자 남부의 소수 무슬림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봉기에 나섰다. 이로 인해 영국은 북부와 남부를 분리시켜 남부를 동아프리카 연방(우간다, 케냐 포함)으로 분리·독립시키는 남부정책을 본격화했다. 그리고 무슬림 상인과 성직자의 남부 접근을 금지했다. 또한 아랍어교육을 금지하고 영어교육을 장려했다. 이로 인해 남부와 북부의 차이가 더해갔다. 결국 1955년 남부에서 다시 무슬림들의 봉기가 일어남으로써 남부와 북부 간의 대립관계가 형성되었다. 마침내 수단은 1956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했으나 영국 식민 정책결과 남부와 북부 간 지역대립이 심화되었고, 다수의 정당난립과 국내 비무슬림의 분리선언, 4차례에 걸친 군사 쿠데타(1958, 1969, 1985, 1989년)를 겪는 등 혼란스러운 시기를 보냈다.

약 40여 년 동안 2차례의 내전을 겪었다. 제1차 내전은 북부 무슬림의 지배체제 강화에 대한 남부의 불만이 원인이었다. 17년간 계속되던 제1차 내전은 1972년 남부 수단에 자치권을 부여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아디스아바바 평화협정이 체결되면서 종료되었다. 그러나 아디스아바바 협정체결 당사자들이 협정을 파기하고 남부를 더욱 강력하게 탄압하면서 두번째 내전이 발발했다. 1983년 4월 니마이리 정권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수단의 이슬람화를 추진하면서 강제로 샤리아법을 도입하고 남부 수단을 3개 지역으로 분할했다. 이렇게 되자 남부 주민들은 존 가랑(John Garang)을 중심으로 수단인민해방군(SPLA)을 조직하고 중앙정부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내전의 또 다른 원인은 북부를 중심으로 한 중앙정부에서 남부 천연자원의 개발 이익을 차지하려는 것에 대한 우려였다. 즉 1978년에 발견된 남부 벤티우(Bentiu) 근처의 유전 개발 및 운하 건설과 관련된 개발이익을 북부가 독점하려는 움직임에 남부 주민들이 대항한 것이었다. 22년에 걸친 내전으로 200만여 명이 사망하고, 400만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이 내전은 2005년 포괄적 평화협정을 통해 완화되었다.

남수단 수도 주바의 존 가랑기념관에서 군사 퍼레이드를 포함해 남수단 독립 3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지난해 7월 9일(현지시간) 열렸다.

남수단 수도 주바의 존 가랑기념관에서 군사 퍼레이드를 포함해 남수단 독립 3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지난해 7월 9일(현지시간) 열렸다.

남수단 분리 독립 … 유전 둘러싼 충돌 계속

남북수단 분쟁은 식민지배 기간 중 남부와 북부의 분리통치 정책으로 인해 이질화가 심화되었고, 인종·종교 등 고질적 요소와 석유 이권을 둘러싼 갈등 등이 원인이었다. 2005년 합의된 포괄적 평화협정이 이행되어 남수단이 국민투표를 통해 분리·독립했다. 수단의 내전은 합의와 협정을 통해 해결된 아프리카 분쟁의 대표적 사례로 기록되고 있다. 이는 당시 전문가들이 수단 중앙정부가 2011년 분리·독립을 승인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던 것을 볼 때도 매우 이례적인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수단은 남수단이 분리·독립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국경지역 일부와 유전이 개발되고 있는 몇몇 곳에서는 갈등과 충돌이 계속되고 있다. 특히 아비에이 지역을 둘러싸고 수단과 남수단은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UN에 따르면 2011년 한 해 동안 이 지역에서 11만 3천여 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그리고 남수단의 석유 수출에 대한 통행료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다. 남수단의 석유생산은 수단의 총 석유 생산의 약 75%에 달했으나 수

출을 위해서는 북부수단의 기반시설을 이용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2011년 11월 28일 북부수단은 7억2,700만 달러의 높은 통행료를 요구하며 남수단의 석유수출을 차단한 바 있다. 특히 2012년 3월 26일 수단과 남수단군이 헤글리그 유전지역에서 충돌해 약 1,200여 명이 사망하는 일이 있었다.

아프리카 연합의 중재로 잠정 해결되었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논란이 되고 있어 추가적인 합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평화를 위해 분리를 선택한 양측과 국제사회의 합리적인 해법이 요구되고 있다.

조상현 / 군사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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