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세히보기 2013년 2월 1일 0

탈북인 남한사회 정착기 | “날마다 명절이요, 날마다 술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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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인 남한사회 정착기 44 | “날마다 명절이요, 날마다 술날”
 
 
지난 2007년 2월 18일 평양 시내에서 설명절을 즐기는 시민들

지난 2007년 2월 18일 평양 시내에서 설명절을 즐기는 시민들

 남쪽에서 설 명절을 쇠다 보면 명절답지 않다. 재미가 별로다. 왜 그럴까? 문화차이 때문에? 아니면 탈북자가 처한 환경 탓일까? 이 궁리 저 궁리 하다보면 자연히 북한에서 쇠던 설명절과 비교해 보게 된다.
 
 북한에선 설 명절이 가까우면 일찍부터 흥분과 걱정이 앞섰다. 설 명절이면 가족과 친척, 친구들과 즐겁게 보낼 수 있다는 생각과 한편으론 명절 준비가 걱정이었다. 북한 사람들은 1년 치고 즐거운 날이 별로 없다. 우선 먹을 것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거기다 각종 부역과 사상학습, 조직생활 등으로 지속되는 고통에서 한 순간이라도 벗어나고 싶다. 그나마 그 소원을 어느 정도라도 이룰 수 있는 날이 명절이다. 특히 설 명절은 휴일도 3일이나 되니 더 기다려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설 명절이라고 해서 무작정 편하고 즐거운 날만은 아니다. 김일성 동상에 가서 인사를 해야 한다. 만약 빠지면 명절이 지난 다음 이유를 따진다. 설 명절을 쇠고 난 다음 날 아침엔 충성을 맹세하는 선서 모임에 무조건 참가해야 한다.
 
“설날 간부집 돌며 “이것 좀 먹자, 저것 좀 내놔라”
 
 직장들에선 명절 전날 특별경비를 조직한다. 김일성 연구실도 살펴야 하고 직장 구석구석에 사고가 생기지 않도록 순찰해야 한다. 어쩌다 쉬는 명절에 경비를 서는 것이 싫어 사람들은 될수록 특별경비성원 명단에서 빠질 궁리를 한다. 자발적으로 나서라면 나설 사람이 없다. 그래서 환자가 아닌 이상 돌아가며 교대로 경비를 서도록 모든 사람에게 순번을 정해준다. 설 명절 3일을 8시간씩 쪼개서 할당한다. 사람들은 자기 순서가 어느 시간대로 정해지는지 신경을 쓴다. 만약 가족, 친척, 친구들이 모이기로 약속한 시간대에 순서가 되면 낭패다.
 
 설 명절 직전이면 집집마다 ‘떡방아를 찧는다, 장보러 간다.’며 분주해진다. 남자들은 술에 신경을 쓴다. 생활이 어려워 평상시에 마음대로 먹을 수 없던 술을 설날에만은 양껏 먹고 싶은 것이다. 집에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술이라도 대접해야 하는 것이다. 집에 고기를 비롯한 좋은 안주는 없더라도 술만 많으면 친구들한테 명절 준비를 잘 한 것으로 인정받는다. 북한 남자들은 “설날은 술날”이라고 말한다.
 
 설날 김일성 동상에 가서 인사를 하고 서로 어울려 기념사진을 찍은 다음은 직장 간부들 집을 ‘들이치는’ 순서다. 제일 높은 간부가 1순위고 제일 낮은 초급간부가 마지막 순위다. 이 날만은 직원들이 간부집에 몰려들어 “이것 좀 먹자, 저것 좀 내놔라.” 해도 괜찮다. 만약 깍쟁이 같은 행동을 하면 뒷소리를 듣게 된다. 간부집 부인들은 “그 집 여편네가 틀려먹었더라.”는 소리를 들을까봐 싫은 내색을 감추고 손님 시중을 정성껏 한다. 사람들은 그것이 재미있어 낄낄 댄다.
 
 간부집을 다 돌고 나면 동료들끼리 이집 저집 다니며 끝도 없이 술을 마신다. 취해서 노래 부르고 춤을 춘다. 노래방이 없어도 재미있다. 술을 양껏 마셨으니 별의별 희귀한 행동을 다한다. 간혹 주먹질을 해 코피를 쏟기도 하지만 설이 지나면 그것도 재미있는 화제가 된다.
 
 주부들은 설날에 고역이다. 손님 접대를 해야 한다. 이웃들에게 자기 집 음식도 돌린다. 그 가운데도 여인들끼리 윷놀이를 한다. 설날엔 모두 웃어른에게 세배를 한다. 꼭 자기 집 어르신이 아니라도 동네 어르신들에게 한다. 아이들이 세배를 하면 세뱃돈을 받는 것은 남북이 같다. 아이들은 하늘 높이 연을 날리거나 스케이트, 썰매를 타고 즐겁게 논다. 날씨가 괜찮으면 온 동네사람들이 밖에 모여 춤을 추며 즐기는 경우도 많다. 다른 날엔 어렵게 생활했더라도 명절만은 시름을 잊어보려 애쓰는 모양새다.
 
 남쪽과 많이 다른 것은 설 명절에 선물을 주고받는 일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술과 떡도 겨우 준비하는 형편에 선물까지 생각할 처지가 못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위층들은 다르다. ‘술이라도 실컷 먹었으면, 설날에만은 배불리 먹었으면…’ 하던 탈북자들이 남쪽에 와서 소원을 풀었다. 술을 먹자면 1년 365일을 먹을 수 있다. 떡과 고기도 더 이상 소원이 아니다.
 
남쪽 명절 재미 없어 … “너무 좋은 환경 탓?”
 
 탈북자들의 입장에선 남한 생활수준이 ‘날마다 명절이요 날마다 술날’인 셈이다. 그러니 명절을 기다릴 이유가 사라진 것이다. 재미를 느끼려면 노래방, 스케이트장, 극장 등 갈 곳이 많지만 그것 때문에 명절이 기다려지지는 않는다. 그런 곳엔 아무 날이든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처럼 명절에만 새 영화를 아꼈다가 개봉하거나 새 드라마를 내놓는 현상도 없다.
 
 북한은 평일과 명절 차이가 너무 뚜렷해 ‘스릴’이 있었다. 남쪽에선 명절이나 평일이나 그저 그렇고 그렇다. 큰 차이가 없다. 굴곡이 심해야 명절도 재미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혹은 너무 좋은 환경에 살아 재미를 느끼는 감각이 무뎌진 것은 아닌지 모른다. 마치 꽃밭에 오래 있다 보면 향기를 느끼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 하기야 찾아갈 고향도 없는 탈북자들에게 설 명절이 무슨 재미가 있을까. 오히려 고향이 그리워 더욱 외로운 날이 되지 않으면 다행이다.
 
 
도명학 / NK지식인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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