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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일천만, 이제는 만나야 한다 | 김경재 할아버지 “이산가족상봉, 그런 운이 나한테 올까?” 2013년 2월호

[힐링일천만, 이제는 만나야 한다 1]
김경재 할아버지 “이산가족상봉, 그런 운이 나한테 올까?”

김경재(82)씨가 이북의 누이 동생으로부터 받은 편지를 보여주고 있다.

김경재(82)씨가 이북의 누이 동생으로부터 받은 편지를 보여주고 있다.

열 아홉살 소년은 어느새 노인이 되어 있다. 63년의 시간은 소년의 솜털을 앗아가고 깊은 주름을 새겨 놓았다. 말로 다하지 않아도 김경재 할아버지(82)의 주름에는 누이 동생에 대한 그리움이 묻어 있어 그가 살아온 통한의 세월을 그대로 알 수 있었다.

그의 고향은 함경남도 북청군 신창읍. 해안에 인접한 곳으로 고향 마을에서는 언제나 명태와 미역을 말리고 있었다. 그는 가족들과 먹던 북엇국을 떠올리며 고향 자랑을 늘어 놓았다. 북청은 살기 좋은 곳이었다. 하지만 1950년 12월, 4형제는 중공군이 밀려온다는 이야기에 매서운 겨울바람을 헤치고 부산으로 피난길에 나섰다. 봄이 오면 다시 진격하여 고향 땅을 밟으리라 생각했기에 어린 누이 동생은 부모님 손을 꼭 잡고 고향 집에 남아 겨울을 나기로 했다. 하지만 그것이 이렇게 기나긴 이별의 마지막이 될 줄은 누구도 몰랐다. 마음 한 켠에 늘 부모님과 누이 동생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채 살다보니 소년은 어느새 환갑을 훌쩍 넘어버렸다.

“힘들 때 옆에 있어주지 못해 미안해”

그러던 어느 날, 누이 동생에게서 연락이 왔다. 믿을 수 없었지만 동생과의 편지를 통해 처음 생사를 확인하게 되었다. 당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중국 사람을 통해 이북에 있는 가족에 연락을 해보았는데, 답신이 온 것이다. 그는 구석에서 종이 상자를 꺼내 보여주었다. 할아버지의 보물이라던 상자에는 지난 17년 간 주고 받은 편지가 연도 별로 빼곡히 정리되어 있었다. 편지를 한 장, 한 장 보여주며 그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편지 받고 많이 울었지. 좋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제일 처음 편지 받을 때 그동안 몰랐던 부모님 기일을 알게 됐어. 그러고 보니 이제 부모님을 영영 못 뵙겠구나 싶어 또 울었지.” 헤어질 때 아홉 살이던 동생은 성인이 되기도 전에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의 장례를 치뤘다. 응석받이 막내가 감당했을 일에도 마음이 아팠지만, 무엇보다 힘들 때 옆에 있어주지 못해 미안함이 크다. “남자는 다 나왔어. 오빠들이 있었으면 다 알아서 해줬을 텐데, 그 애가 손수 처리하며 얼마나 울었겠어. 그런 것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지도록 아프지. 그래서 다짐했어. 지금껏 우릴 대신해 흘렸던 눈물, 내가 살아 있는 한 닦아 주겠다고. 지금은 그 마음뿐이야.” 그 이후 할아버지는 1년에 두 번씩, 누이 동생이 필요한 옷가지와 의약품을 전달하고 있다.

400살까지 살아야 상봉 가능

김경재 할아버지는 2000년 이래 18번이나 진행되어 온 이산가족상봉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는 상봉행사에 관심이 없다고 했지만, 이산가족 상봉 신청은 제일 먼저 해두었다. “그건 하늘의 별따기 아니오? 사막에서 바늘 줍는 것과 같지. 이산가족들 중 그거 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 아무도 없어. 진짜 로또야, 그런 운이 나한테 올까싶어.” 아예 마음을 비웠다고 했지만 어찌 바라지 않겠는가. 70대 노인이 된 누이 동생은 관절염이 심해 걸을 수 없어 민간차원의 만남도 불가능하다고 한다. 이제 오누이가 만날 수 있는 길은 오직 이산가족상봉 행사 당첨뿐이다.

“앞으로 5년만 지나면 이산가족 자체가 없어져. 이산가족 중에 고향을, 가족을 기억할 수 있는 게 75살이야. 그게 제일 아래야. 5년 후면 이 사람들이 80이 되는데, 열악한 이북 생활을 감안하면 그 기억을 하는 사람들은 없다고 봐야 돼. 그 외에 사촌, 외삼촌이야 연결할 수 있겠지만, 당사자들은 없지. 지난 10여 년 동안 1,800명 만났으니까 다 만나려면 우리가 400살까지 살아야 될 거야.” 할아버지 말씀처럼 앞으로 몇 년 후면 이산가족이라는 말이 없어지는 시기가 올지 모른다. 아니, 이미 어린 친구들은 이산가족의 존재를 모를지도 모른다. 이산가족, 이제는 정말 시간이 없다.

가족이란 필요할 때 서로 의지하며 힘이 되는 주는 것이 아닐까. 김경재 할아버지가 보내는 물품 덕에 누이 동생의 어려운 삶에는 큰 힘이 된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이렇게 동생에 대한 미안함을 조금이나마 덜고 있었다. 이산가족은 타의에 의해 평생을 가족들과 떨어져 지내왔다. 기쁜 일이 있을 때 함께 웃어주지 못했고, 슬픈 일이 있을 때 옆에서 힘이 되어주지 못했다.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는 한으로 남을 것이다. 운이 좋아 상봉을 한 가족들도 60년을 기다려 고작 4일을 만나곤 한다. 상봉을 했음에도 또 다른 아픔이 생기는 것이다. “이미 상봉한 사람들은 양측 정부에서 승인한 사람들 아니오? 이들이 지속되게 연락할 수 있도록 지원이 필요해. 마음은 있는데 방법을 몰라 못 하는 거지. 정부에서 이런 건 도와줘야 해.” 정치적 단절에 의해 몸은 떨어질 수 있겠지만 마음까지 떨어뜨릴 수는 없는 노릇인 것이다.

“통일, 그거 언제쯤 되겠소? 통일이 돼야 고향에 한 번 가볼 텐데, 부모님 산소에 가서 절도 하고. 근데 가볼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누구보다 통일을 간절히 원하는 할아버지가 말끝을 흐렸다. 60년의 기다림이 이제 그를 지치게 만든 듯 했다. “우리 대학생 손녀 딸은 감흥이 없더라고. 통일해서 뭐하냐고 하던데, 우린 거기에 뭐라고 대답해야해?” 가슴 한 켠이 아려오며 괜시리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할아버지께 이북의 가족들을 만나면 제일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 여쭤봤다. 그는 계속 대답을 피했다. 수 백 번도 더 생각했을 테지만 막상 물어보니 선뜻 대답을 할 수 없는 것이리라. 아마 도란도란 밥상에 모여 북엇국을 먹는 것이 아닐까.

이산가족, 그들에겐 과거의 문제가 아닌 끝나지 않은 현재이다. 정치적 현실로 인해 혈육의 정을 나누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우리 민족만이 가지고 있는 비극이다. 역사의 피해자인 그들에게 우리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을 무엇일까. 세월이 흘러도 아물지 않은 상처를 치유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자유로이 오갈 수 없다면 만남이라도, 서로에게 근황이라도 알려줄 수 있는 지원 방안이 절실하다. 언젠가 고향을 방문해 누이 동생의 손을 꼭 잡게 되는 그 날이 오면, 김경재 할아버지의 발걸음은 열아홉 살의 소년처럼 가벼울 듯하다.

선수현 / 본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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