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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교사의 생생이야기 | 전국을 들썩이게 한 ‘제1고등중학교’진학 열풍 2013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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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교사의 생생이야기 3 | 전국을 들썩이게 한 ‘제1고등중학교’진학 열풍

평양 보통강구역에 소재한 평양제1고등중학교의 등교 모습

평양 보통강구역에 소재한 평양제1고등중학교의 등교 모습

197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북한에서 ‘수재’를 운운하는 것은 금기시되었다. 김일성은 사람을 수재와 둔재로 구분하는 것 자체가 자본주의의 온상이라고 비판하여 아무도 이에 대해 얘기할 수가 없었다.

1980년대 초반 김일성은 동유럽을 순방하였는데 당시 후문에 따르면 폴란드를 방문하였을 때 받은 한 통의 보고는 충격 그 자체였다고 한다. 동유럽 사회주의권 나라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수학올림피아드 경시 대회에서 북한 학생이 꼴찌를 하였는데, 그 이유가 외래어를 몰라 벌어진 일이라는 것이었다.

거슬러 올라가 1966년 북한은 ‘낡고 봉건적인 것, 사대주의적인 것’에 대한 청산을 대대적으로 진행하였는바 그 일환으로 진행된 ‘말 다듬기 사업’은 교재의 외래어를 없애버리는 데까지 이르렀다.

예를 들어 ‘뉴턴의 법칙’은 ‘역학의 법칙’으로, ‘쿨롱의 법칙’은 ‘전기의 법칙’으로, ‘옴의 법칙’은 ‘저항의 법칙’으로 바뀌었으며 수학의 상황도 마찬가지여서 유명한 ‘피타고라스의 정리’가 ‘세평방정리’로 바뀌었다.

외래어를 우리말로 바꾸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한자어도 고유한 우리말로 바꾸었다. 그렇게 전 사회적으로 벌어진 ‘말 다듬기 사업’은 10여 년 동안 지속되었고 그 시기에 교육받은 학생들은 당연히 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당시 극단적인 용어 바꾸기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있었으나, 사대주의자로 몰릴 수 있었기에 모두가 쉬쉬할 뿐 감히 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김일성, “아이들 우물 안 개구리 … 수재교육 실시”

현지에서 보고를 받은 김일성은 “우리 아이들이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되었다.”며 “동유럽처럼 수재교육을 실시해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 후 북한 교재에 다시 국제공용어가 등장하기 시작하였고 <조선중앙텔레비전>에는 동유럽 사회주의권 국가의 영화를 매일 1편씩 방영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당시 중학교 저학년을 다니고 있던 필자는 매일같이 쏟아져 나오는 외국영화를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또한 획기적인 것은 1982년 생일에 아버지가 사다 주신 미국 소설 <빨간머리 앤>이었다. 미국 소설을 보면서 우리의 삶과 전혀 다른 앤의 삶에 매우 호기심을 느꼈고 흥미진진하게 단숨에 읽어버렸다. 그 후 미국 소설은 계속해 출간되었고 빠짐없이 읽던 책에 대한 추억은 지금도 또렷이 남아있다.

그렇게 세계를 향해 문을 열 것 같던 북한이 다시 폐쇄로 들어간 것은 1980년대 말 동구권의 몰락이었다. 개혁·개방이 사회주의의 몰락을 가져온다고 생각한 북한 당국은 모든 것을 폐쇄해 버렸다.

1983년에는 전국적인 수재교육 실시에 대한 교육위원회 지시가 떨어졌다. 도(道)별로 ‘제1고등중학교’를 1개씩 개설하고 여기에 최고의 교수진을 배치하는 것은 물론 뛰어난 학생들을 입학시켜 ‘수재교육’을 실시하는 것이었다.

평양 보통강구역에 소재한 평양제1고등중학교의 물리실험실

평양 보통강구역에 소재한 평양제1고등중학교의 물리실험실

수재교육 열풍으로 학습열의 고조

당시 수재학교의 위력은 대단했다. 자그마한 소도시의 여중을 다니고 있던 필자의 같은 반 한 학생은 머리가 다른 학생들보다 비상했었다. 그 아이 역시 ‘수재학교’로 가게 되었다. 이렇게 제1고등중학교는 ‘진짜 수재’만 가는 학교로 인식되면서 진학을 위한 시·군별 경쟁이 벌어지게 되었고 어느 시·군이 도 수재학교로 많은 학생을 보내는지와 어느 도가 평양의 수재학교로 많은 학생을 보내는지에 따라 그 시·군과 도의 실력이 좌우될 정도가 되었다.

학교는 학교대로 한명이라도 수재학교에 보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성적이 우수한 학생은 학교에서 지원하고, 학교에서 우수한 학생은 시·군이 지원하는 방식으로 학생들의 학습열의를 고조시키고 있었다.

북한에는 남한과 같은 사교육이나 방과 후 교육이 없고, 학교 내에 과목별 소조를 묶어 공부를 시키거나 시·군의 ‘교수강습대’라고 불리는 곳과 소년궁전 같은 곳에서 진행하는 과외교육만이 있었다. 과목별 소조는 체육, 음악, 미술 같은 예체능 교육뿐 아니라 수학, 영어, 국어, 물리와 같은 기초 과목 소조 역시 있는데 이곳에 들어가고자 하는 학생이 많아 그 경쟁이 치열하였으며 시·군별 ‘교수강습대’는 더욱 그러하였다. 그렇게 치열하게 공부시켜 수재학교 입학시험을 치르게 하는데 모든 학교가 숨죽이고 그 결과를 지켜보곤 하였다.

도별 제1고등중학교 10개를 수재학교로 지정하고 수재교육을 활발히 진행하던 북한에서 시·군별 수재학교를 200개로 확대한 것은 1999년의 일이었다. ‘고난의 행군’으로 모두가 힘들어하던 시기 국가의 재정적 지원을 전혀 받지 못하고 있던 일반 학교들은 물적 토대의 약화로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전국의 학교 중 200개를 ‘수재학교’로 정해 선택과 집중을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운영되던 200개의 수재학교는 2008년 10년 만에 주민들의 반발에 밀려 본래의 10개만을 남겨둔 채 일반학교로 전환되었다.

오늘도 북한에서는 10개의 수재학교로 가기 위한 일부학생들의 치열한 경쟁이 진행되고 있을 것이다.

채경희 / 삼흥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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