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일천만, 이제는 만나야 한다 | 김경창 할머니 “아, 우리 시동생과 이름이 똑같네” 2013년 3월호
2013 IPA&일천만이산가족위원회 공동캠페인 | 힐링일천만, 이제는 만나야 한다 2
김경창 할머니 “아, 우리 시동생과 이름이 똑같네”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가수 패티김의 구슬픈 노래는 대한민국 전역을 울렸다. 1983년 6월. 특별생방송 ‘이산가족찾기’는 연장에 연장을 거듭해 장장 138일 동안 진행되며 대한민국 방송가의 진기록을 세웠다. 33년 동안 생사를 모르고 지내던 가족들의 사연은 총 10만 952건이 접수되어 1만 180여 이산가족이 상봉의 기쁨을 누렸다. 대한민국 곳곳 가슴 한 켠에 묻어 두었던 아픔을 폭발시킨 날이었다.
그 날을 누구보다 잘 기억하고 있는 이가 있다. 바로 김경창 할머니. 할머니는 이산가족 2세대이다. 강원도 원산이 고향인 시어머니 고(故) 전옥실 여사는 매일같이 도시락을 싸가지고 하루는 아들, 하루는 며느리, 또 다른 날은 고등학생 손자와 함께 여의도로 발걸음을 향했다. 시어머니와 딸같이 지내며 누구보다 각별하게 지냈던 할머니는 어느새 시어머니를 먼저 보내고 80세가 되었다.
국수 먹을 때마다 고향 생각, 가족 생각 나
당시 여의도 KBS는 이산가족을 찾는 글귀로 도배가 되어 있었고, 일대는 가족을 찾는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가족을 찾으러 왔다가 수십 년 세월이 허망할 정도로 눈앞에서 금세 상봉하는 이도 있었고, 우연히 고향 친구들을 만나 서로를 격려하던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 행복은 김경창 할머니 가족의 몫은 아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여의도에도 발걸음이 뜸해지고 3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희망을 포기할 때쯤, 신랑을 찾는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혹시 조○○씨 되십니까?” 당시 반공 교육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시기여서 의문의 전화에 덜컥 겁부터 났다. “네. 그런데 누구시죠?” 시어머니의 시동생이었다. 죽은 줄만 알았던 가족들이 같은 서울 땅에 살고 있었다. 심지어 지나갈 때마다 명패의 이름이 똑같아서 “아, 우리 시동생과 이름이 똑같네.”하면 “세상 지척에 이름 똑같은 사람이 한둘이겠어요?”라고 이야기 하며 향수에 젖게 만들었던 그 집에 거짓말처럼 그들이 살고 있었다.
돌아가신 시어머니 대신해 시(時)로 마음 전해
통화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만남을 가졌다. 만나기로 한 장소에 도착했을 때, 가족들과 너무도 닮아있는 모습이어서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 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밤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동안 살아온 세월을 이야기 하며 눈물짓고 우는 장면을 수없이 반복했다. 상봉 이후 얼마지 않아 추석을 맞았을 때는 모든 식구가 모여 제사를 지내고 가족의 빈자리를 채워갔다.
시어머니의 사연은 귀가 닳도록 들어 마치 당신의 이야기 같다고 하였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남편이 며칠 동안 집에 돌아오지 않아 걱정으로 밤을 지새우던 중, 원산 앞바다에 인민군들의 총에 맞아 떠오른 남편의 시신을 발견했다. 끓어오르는 슬픔이 가득했지만, ‘곧 다시 돌아와 후하게 장사를 지내주겠다.’ 다짐하며 인근 산에 남편의 시신을 가매장하고 어린 두 아들의 손을 잡은 채 부산으로 기약 없는 피난길에 나섰다. 다시 돌아올 것이라 생각했기에 남아있는 시댁 식구들은 물론 친정 식구들과도 작별 인사를 나누지 못했다.
이후 30여 년의 세월이 흘러서야 겨우 시댁 식구들을 찾은 것이다. 하지만 결국 친정 식구들의 생사조차 모른 채 시어머니는 가족들을 가슴에 묻었다. 각별했던 시어머니 생각에 인터뷰 도중 그녀는 자주 눈물을 훔쳤다. “어머니는 국수를 좋아하셨어요. 늘 국수를 해드리면 고향 생각을 하셨죠. 북에 있는 가족들은 이런 것이나 제대로 먹고 있을지 걱정하면서 말이에요.” 좋은 것을 먹으면 가족들이 생각나는 것은 인륜지사 당연한 일이 아닌가.
사실 김경창 할머니는 이산가족 문제를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살았다. 시어머니가 고향과 가족 이야기를 할 때도 ‘그냥 없는 셈 치고 마음 편히 사시지.’하는 마음도 가졌다. 하지만 시어머니를 여의도에 모시고 나가며 눈 앞에서 한 맺힌 그들의 마음을 확인하니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게 되었다. 이후 그 마음을 대신 시로 표현한 것이 백여 편에 달할 정도로 노트에 빼곡히 담아 두었으며, 북에 있는 가족들에게 전해줄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인터뷰 중간 중간, 안보를 강조하셨다. 전쟁 당시 인민군에 의해 죽임을 당했던 시아버지의 이야기와 인민군을 피해 몇 달을 구들장에 숨어 계시던 군인 출신 친정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가운데는 전쟁을 겪으며 느껴야 했던 분노와 가족들이 감내해야 했던 이산가족의 서러움이 뒤섞여 감정적 딜레마에 빠지신 듯 했다. 이는 비단 김경창 할머니뿐만 아니라 불운의 역사 속에 우리 민족이 감당해야 했던 마음이 그대로 대변된 것이리라.
지금도 김경창 할머니는 서울 중랑구 실향민 모임에 열성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어느덧 강원도 원산은 제2의 고향이 되었다. 혹자는 “이산가족 당사자도 아니면서 뭘 그리 신경을 쓰냐.”고 하지만, 그 때마다 그녀는 되묻고는 한다. “만약 지금 살아있는 당사자들이 다 죽고 나면 이산가족 모임, 실향민 모임은 모두 없어지고 아무 일도 없던 게 되나요?” 남아 있는 사람들이 잊지 않고 오히려 내 일처럼 마음을 모으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다.
이산가족 2세대인 할머니는 벌써 80의 노모가 되었다. 1세대인 시어머니는 남-남에 흩어져 있는 시댁 식구들만 찾았을 뿐, 남-북으로 갈라진 친정 가족들은 생사조차 모른 채 십년 전 눈을 감으셨다. 1세대들이 하나, 둘 한 맺힌 세월을 뒤로 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었다. 1983년 있었던 KBS <이산가족찾기> 프로그램은 방송사에 길이 남을 기록을 세우며 전국을 희열과 눈물로 뒤덮었다. 하지만 민족적 카타르시스는 이제 또 30년이란 세월이 흘러 그저 책 속의 한 페이지로만 기억되고 있다.
선수현 / 본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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