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문화유산 톡톡! | 우리 손으로 이어가는 고려의 혼백 2013년 3월호
북한 문화유산 톡톡! 2 | 공민왕릉
우리 손으로 이어가는 고려의 혼백
고려 31대 왕인 공민왕(1330~1374, 재위 1351~1374)은 고려 말을 대표하는 개혁군주로 원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한 개혁정치를 단행한 인물이다. 그는 원의 볼모로 연경에서 약 10년간 머무르며 위왕(魏王)의 딸인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를 아내로 맞이하였고, 조카인 충정왕이 폐위되자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즉위 후 원의 상징이었던 변발과 호복을 폐지하였으며 원의 통치기구인 정동행성과 쌍성총관부를 폐지하였다. 또한 기철(奇轍) 등의 부원배(附元輩) 일파를 숙청하였으며 신돈의 등용과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의 설치를 통한 개혁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1365년 노국대장공주가 난산으로 숨을 거두자 이후 정사를 돌보지 않다가 결국 최만생(崔萬生)에게 암살당하는 불운한 삶을 살았다.
공민왕이 부인과 함께 묻힌 곳은 개성직할시 개풍군 해선리 봉명산 남쪽의 무선봉 중턱에 위치한 현릉과 정릉이다. 이 중 현릉(玄陵)은 공민왕, 정릉(正陵)은 노국대장공주의 능으로 현재 북한의 국보유적 제123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고려사』에 의하면 공민왕은 왕비인 노국대장공주가 죽자 비통함을 참지 못하였고, 충렬왕의 비인 제국대장공주의 고릉(高陵)을 본받아 그보다 더 화려한 정릉을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1366년에 정릉과 나란히 위치한 수릉(壽陵, 생전에 만들어 놓은 무덤)인 현릉을 만들어 왕비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보이기도 했다.
공민왕릉, 고려 말의 왕릉 형식 대표
공민왕릉은 고려왕릉 중에서도 가장 보존상태가 양호하며 축조방법에서도 고려 말의 왕릉 형식을 대표하고 있어 고려왕릉 연구에 기여하는 바가 크다. 또한 조선왕조 왕릉 제도의 기본이 되는 능으로 이해되고 있어 현재 조선왕릉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으로 볼 때 공민왕릉이 가지는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공민왕릉의 능역은 장대석을 이용하여 동서 50m, 남북 45m의 규모로 축조된 능계 3단과 남쪽으로 이어지는 경사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경사면과 능계의 중앙으로는 계단을 두어 능으로 오를 수 있도록 하였으며 경사면 아래의 평지에는 정자각을 두었다. 능역 상단의 중앙으로는 쌍분인 정릉과 현릉이 위치한다. 봉분의 아래쪽으로는 12면의 병풍석이 자리하는데 병풍석의 위와 아래로는 다양한 종류의 석재를 배치하여 병풍석이 고정되도록 하였다.
병풍석의 바깥으로 위치한 난간석은 병풍석과 평행하게 돌아가는데 현릉과 정릉이 연접하여 있기 때문에 두 능이 겹치는 부분을 생략하고 각각 10각이 되도록 연결되어 있다. 돌로 만들어진 난간의 바깥으로는 석조 호랑이와 양을 각 4기씩 번갈아가며 배치하고 있는데 모두 바깥을 향하고 있다. 무덤의 주변으로 석수를 배치하는 풍습은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석수가 그러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현릉과 정릉의 봉분 앞쪽으로는 각각 상석을 하나씩 배치하였다. 1단의 동서 양쪽에는 망주석을 세웠는데 팔각의 이중기단 위에 세운 팔각 석주와 그 위의 주두부로 이루어져 있다. 2단에도 각 능의 정면에 장명등이 하나씩 배치되어 있다. 장명등의 좌우와 3단에는 문인, 무인석이 각각 2쌍씩 총 8기가 배치되어 있는데, 2단에 위치한 문인석은 능에 가까울수록 나이든 모습이며 멀수록 젊은 문인으로 표현되어 있다. 3단은 2단보다 약 140cm 가량 낮으며 중앙과 양쪽 가장자리로 계단을 두었다. 3단에는 각 능마다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은 무인석 2쌍이 위치한다. 공민왕릉은 현재 고려왕릉 중 유일하게 무인석이 확인되는 예로 이러한 전통은 이후의 조선시대까지 이어지게 된다.
석실의 내부는 동·서·북쪽의 벽면과 천정에 벽화를 그렸는데 세 벽면의 벽화는 모두 12지와 관련된 것으로 각 면에 4개씩 배치되어 있다. 공민왕릉 12지의 특징은 동물의 형상 대신 문인이 해당 동물을 상징하는 관을 쓰고 있다는 점인데 경주의 김유신묘 등에서 확인되는 12지와는 확연히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일제, 우천 틈타 헌병까지 동원하여 도굴 감행
북한의 자료에는 러·일전쟁 시기 일제의 공민왕릉 도굴기록이 나타난다. 일제는 도굴을 여러 차례 시도하였으나 화승총까지 들고 저항한 지역민들에 의해 실패를 거듭하였다고 한다. 결국 일제는 1905년 헌병대까지 동원, 화승총을 사용할 수 없는 우천을 틈타 도굴을 감행하였다. 도굴꾼들은 무덤의 입구를 찾을 수 없자 능의 뒷부분을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한 뒤 10여 대의 수레에 유물을 나눠 싣고 철수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봉분을 둘러싼 석물의 이음새 곳곳은 시멘트로 발라 연결해 놓았으며 일부는 그마저도 잘 맞지 않은 모습을 보인다. 그나마 도굴로 파괴된 봉분을 이 정도까지 복구해 놓았다는 것은 해방 이후의 상황을 감안해 볼 때 당시에는 북한 나름 공민왕릉에 대한 대규모 복구 공사를 추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공민왕릉은 북한정권의 수립 당시부터 중요한 문화재로 인식되어 김일성·김정일의 현지지도가 3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북한은 2007년과 2011년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실패한 개성역사지구를 작년에도 재신청하였다고 한다. 이번 신청 목록에 어떤 유적들이 포함되어 있는지 알 수 없으나 아마도 공민왕릉을 비롯한 다수의 고려왕릉들이 포함되었으리라는 추측이 쉽게 가능하다.
개성역사지구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일이다. 하지만 민족공동의 문화유산인 만큼 남과 북이 함께 하는 과정을 통해 세계인들 앞에 내놓았다면 더욱 의미있는 작업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박성진 / 국립문화재연구소 고고연구실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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