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세히보기 2015년 5월 1일 0

윗동네 리얼스토리 | 이렇게 좋은데 왜 ‘적(敵)’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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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동네 리얼스토리 51

이렇게 좋은데 왜 ‘적(敵)’인가?

어떻게 여자가 남자의 귀뺨을 후려칠 수 있을까? 한 대 맞고도 남자는 아무런 소리도 못하고 덤덤히 여자만 바라본다. 우리는 드라마를 통해 그런 장면들을 보며 나름 안쓰럽기도 하고 즐거워도 한다. 남한 드라마에서 나오는 그와 같은 장면들을 보며 북한 아줌마들은 순간이나마 불법영상물을 본다는 생각조차 잊고 대환성을 지른다. 남존여비의 개념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북한 정서에 또 다른 경종을 울리는 장면임은 틀림없다. 대체로 보면 남한처럼 북한도 드라마 시청은 안방에서 이뤄진다. 불법이지만 남쪽 드라마를 몰래 보며 매우 통쾌하게 대리만족을 느껴보는 가정주부들이 많다.

‘나도 한 번 업혀 봤으면…’

드라마에서 남자가 여자를 업고 가는 장면 또한 아줌마들의 심장을 울렁이게 하는 명장면이다. 들썩이는 가슴을 움켜잡고 부러운 눈길로 넋 나간 채 쳐다본다. 지금껏 살아 온 어느 페이지에서도 북한 여성들은 겪어 본 일 없는 참으로 희한한 장면이다. ‘나도 한 번 업혀 봤으면…’, ‘저것이 진정 사람 사는 훈훈한 모습이 아닐까?’ 한다. “왜색·왜풍, 양육강식의 양키문화가 판을 친다는 썩고 병든 남조선 사회”라는 당국의 선전과 전혀 다른 훈훈하고 인간적 모습이 새로운 감흥으로 안겨들어 저도 모르게 절레절레 머리를 흔든다.

이제 한류는 북한주민들의 가슴에 하나의 선진 문화로 든든히 자리 잡았다. 들키면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엄혹한 상황 속에서도 남한의 영상물을 보며 나름 희망을 찾는 북한주민들의 모습은 그 자체가 감동적이다. 이제 북한주민들에게 있어 ‘남조선’은 더는 적이 아닌 한민족이란 애(愛)의 싹이 왕성한 순으로 자라 무성한 잎을 펼친다.

갓 입국한 사람의 감격어린 말을 들으며 필자도 북한에서 받은 감동을 다시 한 번 되새겼다. 2002년 6월, 한·일 월드컵 때 일이다. 당시 북한 당국은 어떤 속셈인지 몰라도 전 경기를 전국에 실황 중계했다. 당시 필자는 평양에 출장 중이어서 김일성광장 앞에 나가 대형 텔레비전으로 내보내는 경기를 매일 시청했다. 당연히 관심은 한국의 경기였다. 1966년 월드컵 8강 전적이 있는 북한이어서 본선에 올라온 남한 선수들의 설전은 필자뿐이 아닌 시청하는 모든 사람들의 관심사일 수밖에 없었다.

이탈리아와의 16강전이 한국의 승리로 끝났을 때 광장의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이탈리아는 우리와 안 돼!” 하며 만족해했다. 1966년 영국 월드컵 당시 16강전에서도 북한이 이탈리아를 이겼기 때문에 하는 말이었다. 모두 흩어져 가며 다음에 있을 8강전에 대해 나름의 판단을 스스럼 없이 말했다.

스페인과의 8강전은 그야말로 광장에 모인 수만 군중의 가슴을 조이는 명품 경기였다. 겉으로는 유럽 강호인 스페인을 이기지 못한다는 말이 과반수였지만 누구나 속으로는 한국의 승리를 기원했다. 그 증거는 경기 마지막 장면에서 우레처럼 폭발했다. 무승부 뒤에 승부차기가 진행되고 네 번째로 나간 스페인 선수의 공을 이운재 골키퍼가 잡았을 때 장내에는 큰 환호가 터졌다. 그 다음 다섯 번째로 홍명보 선수가 나가자 수만 군중은 숨을 죽였다. 그가 골을 넣으면 4강 진출이기에 그 순간만은 말 그대로 폭풍 직전의 고도로 긴장된 침묵의 순간이었다.

김일성광장에서 울려 퍼진 대환호의 정체는?

숨 막히는 침묵도 잠시, 홍명보 선수의 발끝에서 날아간 공이 상대의 그물망을 흔드는 순간 광장에는 폭풍 같은 환호가 터졌다. ‘와-’ 천지를 진동하는 환호에 이어 사람들은 서로 부둥켜 잡고 발을 구르며 빙빙 돌고 돌았다. 광장은 감격의 불도가니 그 자체였다. 필자의 가슴도 터질 듯 했다. 필자뿐이 아니다. 두 팔을 들어 올리며 환성을 지르다가 가슴을 움켜쥐는 사람, 심하게 기침을 하는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이후에 들은 바에 의하면 노인 몇 명이 심장마비로 병원에 실려 갔다고도 한다.

왜 ‘적국’의 승리에 ‘적국’의 군중이 그토록 환희로 들끓었을까? 정말 우리는 싸워야만 될 적일까? 그것만이 아니다. 월드컵 전 기간 수만, 수십만 붉은 악마들이 펼친 대 응원전은 북한주민들의 눈을 놀라움과 경의로 타 번지게 했다. 당국의 선전으로 일심단결을 혼자만의 독점으로 알았던 북한주민들로서는 참으로 놀라운 장면이었다. 전 기간 한 순간도 쉬지 않고 경기장을 들끓게 하는 붉은 응원전을 보며 민족의 저력에 어느 누구하나 감동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다. 하늘과 땅을 뒤흔드는 열띤 환호가 통일의 환호로 바뀌는 장면을 상상해 봤다. 삼천리 강토를 붉게 물들일 통일의 혈맥과 활기. 한·일 월드컵 당시 남북한이 응원한 한 목소리에서 분명히 그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이지명 / 망명작가펜(PEN)문학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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