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세히보기 2015년 5월 1일

기획 | ‘게임의 규칙’ 달라져 … 후발 경제권 주목해야 2015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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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 AIIB, 판의 이동?

‘게임의 규칙’ 달라져 … 후발 경제권 주목해야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의 창립회원국이 총 57개국으로 최종 확정됐다. AIIB는 중국이 처음 설립 구상을 밝힌 2013년 10월 이후, 중국 주도의 새로운 국제금융기구라는 점에서 적지 않은 관심을 모아왔다. 하지만 2014년 10월 설립 기념식 당시까지 동참 의사를 명확히 밝힌 나라는 중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중소규모 국가 21개에 불과했다. 자연히 성공적인 출범 가능성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전망이 많았다.

선진 7개국 중 미국, 일본, 캐나다만 불참

그런데 불과 6개월 만에 그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아시아 37개국뿐만 아니라 역외에서 참여한 회원국이 20개에 이른다. 애초에 신중한 입장을 견지했던 한국, 호주, 인도 등이 모두 동참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으며, G7에서도 미국, 일본, 캐나다를 제외한 4개국이 모두 이름을 올렸다. 투명성, 지속 가능성 등에 대한 우려를 앞세워 노골적으로 보이콧을 압박하던 미국의 반대가 무색할 정도다.

이처럼 AIIB 출범에 관심이 쏠리는 이유는 크게 중국 정부의 적극적인 추진 의지, 그리고 선진국이 주도하는 기존 국제금융기구와 다자개발은행 체제에 대한 불만과 불신 등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첫째, 중국 정부가 이처럼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 배경에는 정치적, 경제적 요인이 함께 존재한다. 자주 언급된 것처럼 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 확대 전략(Pivot to Asia)을 견제하려는 정치·외교적 수단일 뿐 아니라, 그동안 중국 경제의 고성장을 견인해 온 수출 주도, 투자 주도, 정부 주도 성장 방식이 한계를 드러냄에 따라 새로운 시장과 내부 개혁의 필요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그동안 중국 정부가 발표해 온 ‘서쪽 행진정책’, ‘신 실크로드 전략’, ‘일대일로(一帶一路)’ 등 일련의 새로운 경제발전 정책들 역시 이런 고민들을 잘 보여준다. 즉 선진국 경기 침체에 따른 수출 수요 감소, 국내 투자 설비의 공급 과잉 심화 등으로 아시아 역내 신흥국의 새로운 수요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고, 공공부문의 비효율성과 부패 문제가 임계치에 달하면서 국내 경제발전 방식에 글로벌 스탠더드를 받아들이는 한 가지 방편으로 중국 주도 국제금융기구를 만들어 낸 것이다. 다시 말해 그동안 중국 경제 성장의 한 축을 중국개발은행이 담당해 왔다면, 앞으로는 그 역할의 상당 부분을 AIIB가 맡게 된 셈이다.

둘째, 기존 국제금융질서에 대한 신흥 경제권 국가들의 불만이 그만큼 커졌다는 의미이다. 먼저 금융을 제공하는 다자개발은행과 지원을 받는 국가 간의 눈높이 차이를 해결하지 못했다. 지원을 받는 국가 입장에서는 자국 경제가 지속 가능한 발전의 토대를 확보할 수 있도록 산업 경쟁력 확보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의사 결정이 이뤄지길 희망한다. 하지만 다자개발은행은 경제발전을 먼저 경험한 나라들이 후발 국가들의 빈곤문제 해결에 도움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된 기관이다. 따라서 개별 국가의 수요보다는 UN, G8 등의 다자간 협의를 통해 새천년개발목표(MDGs)와 같은 원조 의제를 먼저 설정하고, 이 의제를 잘 충족시킬 수 있는 사업에 우선순위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의사 결정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수원국가의 요청보다는 학교, 병원, 교육, 보건 등 기본적인 인프라와 인간개발 수요 충족을 위한 프로젝트들이 선정되는 경우가 많다.

아울러 선진국들이 다자개발은행의 운영과 의사 결정을 독점적으로 주도한다는 점도 자주 지적되어 왔다. 1990년대부터 본격화된 신흥국 경제의 빠른 성장과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선진국 경제의 침체로 세계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게 달라졌음에도 세계은행이나 IMF 등 국제금융기구의 지분 구성은 그 변화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예컨대, 전 세계 GDP에서 BRICS 5개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20%를 훨씬 넘어섰지만 세계은행에서의 지분, 즉 의결권은 아직도 13% 수준에 불과하다. 이런 상황에서는 신흥 경제권의 요구가 다자개발은행의 정책 방향 결정에 제대로 반영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문제점들이 사업 방식과 인적 구성에 대한 불만, 신흥국의 경제적 위상이 아무리 높아져도 근본적인 해결은 불가능하다는 현실적 판단 등과 맞물리면서 비슷한 입장에 처한 국가들끼리 아예 새로운 틀을 짜보자는 남남 협력의 움직임을 끌어낸 것이다.

지난 3월 26~29일 개최된 아시아판 다보스포럼인 보아오포럼에서는 '일대일로'와 AIIB가 주요 주제로 떠올랐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개막식 기조연설을 통해 중국이 아시아의 운명 공동체의 구축을 위해 중국이 주도적인 역할을 할 것임을 천명했다. ⓒ연합뉴스

지난 3월 26~29일 개최된 아시아판 다보스포럼인 보아오포럼에서는 ‘일대일로’와 AIIB가 주요 주제로 떠올랐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개막식 기조연설을 통해 중국이 아시아의 운명 공동체의 구축을 위해 중국이 주도적인 역할을 할 것임을 천명했다. ⓒ연합뉴스

후발 경제권, 아예 남남협력 새 틀 짜보자!

문제는 이처럼 AIIB가 예상을 크게 웃도는 관심을 이끌어내면서 우리나라의 입지가 위태로워지고 있다는 점이다. 올해 초까지만 해도 역외국은 물론이고 일본, 인도, 호주 등 아시아 주요 경쟁국들이 모두 가입에 난색을 표하는 상황이어서 우리가 가입만 결심하면 AIIB 내 두 번째 지위는 무난히 확보할 것이라는 기대가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인도를 비롯해 호주, 독일, 영국 등 역외 주요국들마저 속속 창립 멤버로 참여함에 따라 두 번째 자리는커녕 5%대 지분 확보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우리에게 열심히 구애의 손길을 내밀던 중국의 관심도 점점 일본 쪽으로 옮겨가는 모양새다. 중국이 일본에 수석부총재 자리를 제안했다거나, 독일 총리가 전화 회담을 통해 일본의 참여를 권유했다는 등의 보도마저 나왔다.

AIIB는 다가오는 6월까지 회원국들과의 논의를 거쳐 구체적인 운영 방안을 마련하고 이를 토대로 설립 협정문을 확정할 계획이다. 이 과정에서 한국이 의미 있는 위상과 역할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AIIB 설립을 추진하는 중국의 의도가 무엇인지, 그리고 세계 각국의 입장이 왜 달라졌는지를 다시 한 번 짚어볼 필요가 있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중국이 AIIB 설립을 추진하는 목적은 비교적 분명하다. 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 확대를 견제하려는 정치·외교적 수단일 뿐 아니라, 점차 한계를 드러내는 중국식 경제발전 모형의 약점 보완, 새로운 성장 엔진 추가, 신규 시장 확대 등을 도모할 수 있는 다목적 카드인 셈이다. 이와 더불어 주변국들이 보여준 급작스런 입장 변화는 외교, 즉 국제무대에서 벌어지는 게임의 룰이 바뀌고 있음을 보여준다. 게임이론에서 자주 소개되는 사례 중에 ‘죄수의 딜레마’라는 게임이 있다. 게임 참여자들이 서로 협력할 때 가장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음에도, 상대방의 동참 여부를 확신하지 못해 모든 참가자가 늘 배신을 선택한다는 것이 이 게임의 간단한 결론이다. 하지만 게임의 규칙이 달라진다면, 다시 말해 이 게임 참가자들이 모든 참가자들의 과거 선택과 그 결과를 알고 있고, 심지어 서로 협력에 대한 논의가 가능해 아예 새로 게임의 판을 벌일 수 있다면 어떨까?

후발 경제권 국가들과 바람직한 관계 설정 필요

AIIB 설립 기념식이 열렸던 2014년 10월 당시만 해도 AIIB 참여가 위험한 도박이라고 결론지은 국가들이 많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물밑에서는 이번 기회에 선진국 주도로 만들어진 게임, 즉 기존 국제금융기구의 규칙과 판을 바꿔보자는 공감대가 후발 경제권 국가들을 중심으로 폭넓게 형성됐고, 이와 더불어 AIIB에 대해서는 중국이 과거와 다른 모습을 보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 선진국들이 대거 AIIB 참여를 결정하면서 창립회원국 57개국 확보라는, 6개월 전과 완전히 다른 결과가 만들어진 것이다.

향후 우리의 고민과 대응 전략 역시 같은 맥락에서 풀어나가야 한다. 먼저 중국의 새로운 성장 엔진 확충과 내부 개혁 과정에서 어떤 부분을 우리와 협력할 수 있을지 찬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과거 한국경제의 발전 과정에서 겪었던 성공과 실패 경험 중 상당수가 중국에서는 아직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게임 규칙 변화에 적응해야 한다. 후발 경제권 국가들 간의 연대와 협력, 이에 대한 선진국들의 긴장, 더 나은 결과를 위해서는 얼마든지 게임의 판을 바꿀 수 있다는 과감함 등 기존의 게임에서는 찾아보기 힘들었던 규칙들이 자꾸 나타나고 있다. 특히 이 변화의 시발점 역할을 한 후발 경제권 국가들과의 바람직한 관계 설정이 필요하다. 즉 우리에게 익숙한 기존의 외교 원칙은 미국이나 중국 등에게 우선순위를 두는 것이지만, AIIB 내에서는 달라질 필요가 있다.

영화 <쇼생크 탈출>을 보면 감옥에 갇힌 주인공이 소장과 간수들의 세무나 회계 등의 각종 업무를 도와주고 여러 가지 특혜를 누리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다른 영화에서 묘사되는 일반적인 대리인들의 모습과 달리, 즉 권력층과 가까워지면서 기존 동료들과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 주인공은 다른 죄수들과도 계속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 그 이유는 그가 얻은 특혜를 독점하려 고집하지 않고 다른 동료들과 기꺼이 공유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동료 죄수들에게 더 나은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교도소장에게 과감히 맞서는 행위도 서슴지 않는다. 거의 60개에 육박하는 AIIB 회원국들 사이에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행동의 원칙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김형주 /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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