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일천만, 이제는 만나야 한다 | 이광재 할아버지 “남북, 가까운 개성에서 상봉했으면” 2013년 5월호
2013 IPA&일천만이산가족위원회 공동캠페인 | 힐링일천만, 이제는 만나야 한다 4
이광재 할아버지 “남북, 가까운 개성에서 상봉했으면”
전쟁은 많은 것을 앗아갔다. 1950년 6월 25일, 그 날을 기해 부모님이 계신 고향땅은 다신 찾을 수 없었고, 해병대에 입대했던 큰 형은 전쟁이 멈추기 바로 전 세상을 떠났다. 이후 막내 동생까지 월남전에서 잃고 말았다. 그는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에 감사하기도 했지만 죄책감을 갖기도 했다. 이제 그의 곁에는 여동생만 남았다.
유난히도 공부를 잘했던 소년은 형을 따라 고향 개풍군을 떠나 서울의 중학교로 진학하였다. 당시로써는 유학인 셈이었다. 부모님과 동생들은 고향에 남았다. 그러던 중 전쟁이 발발하였고 동생들은 서울로 피난을 왔다. 부모님은 고향에 남기로 결정했다. 작별인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서울 가서 열심히 공부해라.”라던 그것이 마지막 인사가 되었다. 학교에 다니던 중 형은 해병대에 자원입대 하였고, 17살이었던 이광재 할아버지(81)도 학도병이 되어 참전하였다. 당시 국가관이나 이념따위를 알기에는 너무 어렸고, 부대에서 키도 체격도 가장 작았다. 얼떨결에 참가한 전쟁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며 소년은 점차 군인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서로 다른 부대에 있던 형과는 죽기 전까지 편지로 안부를 전하며 집에 계실 부모님과 고향을 그리워했다.
“서울 가서 열심히 공부해라”
개풍군은 평화롭기 그지없는 곳이었다. 하굣길이면 늘 개울가에 들러 멱을 감고 새우를 잡았고, 겨울이면 논두렁에 모여 썰매를 탔다. 간혹 다른 동네 친구들과 쥐불놀이하며 싸우던 개구쟁이들이 점령한 그러한 곳이었다. 방과 후면 바쁘신 부모님을 돕기 위해 목동이 되어 동산에 올라 소에게 풀을 먹이고, 망태에 풀을 가득 이었다. 한 동네에 일가친척들이 모여 살아 이집 저집 사정을 속속들이 아는 그러한 곳이었다. 그 유명한 개성의 인삼은 본디 개풍군의 특산물로 마을에서도 많이 재배되었다.
이러한 고향땅은 날이 맑은 날 파주 오두산전망대에 올라서면 눈에 훤히 들어온다. 예전에 있던 집은 남아있지 않지만 그 터와 뛰놀던 골목골목은 볼 수 있었다. 가볼 수는 없지만 이렇게나마 바라보며 고향과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을 달랬다. 오두산전망대가 처음 개방됐을 때, 일주일에 한번은 파주에 들러 바라보곤 했다.
“이 속도로 언제나 상봉이 되겠소?”
부모님이 살아계신다면 이제 100세가 넘었을 것이다. 건강히 지내셨다면 혹여나 살아계실 수도 있겠지만 열악한 북한의 현실을 감안할 때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생사조차 알 수 없는 현실이 답답할 뿐이다. 더구나 유복한 생활을 하던 집이 북한 정권하에서 평탄하게 살 수 없었을 것이라 생각되어 하루라도 부모님 걱정을 하지 않은 적이 없다. 이광재 할아버지의 부모님이 고향집을 지켰듯 당시 마을 사람들이 피난길을 떠남에도 각 집마다 한 두명씩은 남았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이러한 면에서 이산가족이 더 늘어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전했다.
할아버지는 누구보다 개성관광이 재개되길 바라고 있었다. 10여 년 전, 개성관광이 시작되자마자 신청하여 꿈에도 그리던 북녘 땅을 밟았다. 개성 봉덕면을 방문한 그는 개풍에 살 때도 방문해보지 못했던 개성을 백발의 노인 이 되어 가보았다. 통일회관에서 식사를 하고 만월대, 성균관, 박연폭포 등의 일대를 방문하며, 희미하지만 고향의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당시 북한 주민들을 군데군데에서 볼 수 있었는데 대부분이 마르고 까칠까칠한 모습에 새까맣게 타있어 충격을 받았다. “같은 고향 사람들인데 그들과 우리의 모습이 많이 달랐다.”며 괜시리 숙연해졌다.
이광재 할아버지 역시 제일 먼저 이산가족 상봉 신청을 하였다. 북에 계신 부모님을 비롯해 한 마을에 살던 작은 아버지, 고모의 이름을 적었지만 소식 한 장 들을 수 없었다. 같이 동네를 뛰놀던 친척 형제들은 지금도 그 골목에 살고 있을까? 38선 인근에 살던 사람들은 상봉이 성사됐다는 이야기를 거의 듣지 못했다. 대부분 다른 지역으로 이주되어 찾기도 어려울뿐더러 여러 가지 정치적인 이유가 작용했으리라 추측할 뿐이다. 80이 넘은 동년배의 친구들은 이제 몇 남지 않아 더 애가 탄다. “이 속도로 언제나 상봉이 되겠소?” 이런 저런 이유로 이제 할아버지는 거의 포기 상태이다. “그래도 만약 상봉이 된다면 금강산이 아닌, 남북이 가까운 개성에서 상봉을 했으면 좋겠지. 그럼 고향도 한 번 가볼 수 있을테니.”라는 마음을 전하셨다.
그가 바라는 것은 통일이다. 기약없는 통일을 바라며 하루하루 사는 것은 견딜 수 없어 독일이 그러했듯 하루아침에 통일이 이루어지길 바라고 있다. “개풍은 지금 황해남도 개풍이지만 경기도 개풍군이 되는 날이 올 거야.” 할아버지는 통일이 되면 고향으로 돌아가 남은 생을 마감하고 싶다고 하셨다. 17년 살던 그곳이 평생을 산 서울보다 그리운 이유를 여쭸다. “허허. 글쎄, 아마 가족들이 함께 살았던 곳이고 가보지 못해서일까?” 이러한 희망이 지금의 그를 견딜 수 있게 한다. 현재 이북5도청에서 개풍군민회장 직을 맡고 있는 이광재 할아버지는 2세, 3세들에게 애향 교육을 잊지 않고 시킨다. 그렇지 않으면 얼마 후, 북녘 땅을 그리워하는 이도 기억하는 이도 없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어른들의 책임이라 할 수 있지만 이러한 교육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지. 젊은 사람들이 잊으면 이러한 문제는 다 잊혀지게 돼있거든.” 젊은 사람들의 인식이 필요하다.
60년. 강산이 여섯 번이나 변하는 시간이 지난 옛날의 이야기지만, 전쟁이 그에게 남긴 상흔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선수현 / 본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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