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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문화유산 톡톡! 4 | 고려도성 내성 남문, 조선 초 왕자의 난 격전지 2013년 5월호

북한 문화유산 톡톡! 4 | 개성 남대문

고려도성 내성 남문, 조선 초 왕자의 난 격전지

개성 남대문 Ⓒ연합뉴스

개성 남대문 Ⓒ연합뉴스

‘남대문’하면 우리는 서울을 상징하는 랜드마크이자 대한민국의 국보1호를 먼저 떠올린다. 하지만 서울과 가까운 고도(古都)인 개성에도 도심 속에 남대문이 자리하고 있다. 다만 서울의 남대문은 과거 한양도성의 정문으로 수도를 상징하였던 반면 개성의 남대문은 도성 내부의 방어를 위해 별도로 축조된 ‘내성(內城)’의 남문이라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개성의 고려도성은 궁성-황성-나성의 3중구조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는 ‘천자국’을 지향하였던 고려인들의 세계관이 반영된 것으로 단일성곽으로 이루어진 한양도성과는 다른 모습이다.

이러한 고려도성은 건국 이후 광종과 현종을 거치며 지금과 같은 모습의 도성으로 변모하였다. 하지만 고려도성은 강화천도와 원 간섭기를 지나면서 황폐화되었고 이후에도 제대로 된 정비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원 간섭기 이후 고려 말에 빈번해진 왜구의 침입으로 개경마저도 위협을 받는 상황이 발생하자 최영의 건의로 방어를 위한 군사적 성격의 성곽, 즉 내성의 축조가 시작되었다.

개성 고려도성, 천자국 지향 세계관 반영

연복사종 Ⓒ연합뉴스

연복사종 Ⓒ연합뉴스

내성의 축조는 공양왕 3년인 1391년부터 시작되어 조선 태조 2년인 1393년에 완성되었다. 성곽의 둘레는 20리 40보(약 11.2㎞)이며, 성문으로는 동대문·남대문·동소문·서소문·북소문 등이 위치하였다. 내성은 고려왕조의 멸망과 한양 천도에 따라 잊혀지는듯 하였으나 조선 초 한양을 대신하여 개성이 잠시나마 수도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이후 내성의 남대문은 2차 왕자의 난 당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격전지가 되었으며 이 전투에서 승리한 이방원은 형 정종을 대신해 조선의 왕이 되었다. 결국 개성의 남대문은 멸망한 고려왕조의 마지막 흔적으로 조선에 의해 완성되었으며 조선 초 왕권을 사이에 둔 형제 간의 혈투를 말없이 지켜본 역사의 증인이 되었다.

이후 조선시대까지 보존되던 내성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지속적으로 훼손되었다. 일제는 ‘도시건설계획’이란 이름으로 남대문 등을 파괴하려 하였으나 개성시민들의 저항으로 쉽게 이루어 지지 못하였다. 하지만 연복사종을 매달아 두었던 남대문의 종각, 동대문, 서소문 등은 헐려 버렸으며 그나마 본래의 모습을 유지하던 남대문마저도 한국전쟁 기간 중 불타버렸다.

개성 남대문의 복구는 한국전쟁이 끝난 뒤 곧바로 이루어 졌다. 북한 정권은 개성이 역사도시인 점을 감안하여 남대문을 비롯한 전쟁으로 파괴된 문화유적에 대해 대대적인 복구작업을 벌였다. 북한측 자료에 의하면 당시 민가 등의 건물을 복구하기에 앞서 개성 남대문에 대한 복구에 보다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남녀노소 모두가 참여했다고 하니 고도(古都)로서의 긍지를 지키기 위한 개성시민들의 노력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해 볼 수 있다.

현재 개성 남대문은 북한의 국보유적 제12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개성시 북안동에 자리하고 있다. 개성 남대문은 다포계 건축의 초기예로 일찍부터 학계의 주목을 받아왔다. 일반적인 성문의 형식을 가지고 있으며 중앙에 홍예문을 가진 석축과 상부의 문루로 구성되어 있다. 석축에 하나의 홍예문을 두고 상층의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집으로 마감하여 그 규모나 형식에 있어 서울의 남대문이나 광화문보다 한층 낮은 격식을 취하고 있다. 아마도 이것은 내성이 고려 말에 급하게 건설한 성곽인 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추측된다.

현재의 석축은 홍예 아래 부분으로 3단의 장대 석단을 두었으나 이는 복원 후 낮아진 것으로 <조선고적도보>의 사진으로 볼 때 최소 4단의 축단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지난 2008년 화재로 소실된 숭례문의 복원을 위해 이루어진 석축 주변에 대한 발굴조사 과정에서 현재의 지표 아래로 조선 초기의 석축이 존재하는 것이 확인되었다. 개성 남대문과 비슷한 시기 완공된 숭례문의 경우를 볼 때 개성 남대문 역시 그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상상도 해보게 된다.

규모·형식, 서울 남대문·광화문보다는 낮아

개성 남대문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최초의 자료는 강세황이 1757년 그린 <송도기행첩>이다. 이 그림에서는 남대문을 중심으로 북쪽에 위치한 송악산을 향해 뻗어있는 개성의 중심인 남대가(南大街)의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다. 물론 남대문 문루의 모습도 한국전쟁으로 파괴되기 전의 모습이다. 문루의 측면으로는 누각이 붙어 있고 안쪽으로 종이 걸려 있는데 이는 연복사종으로 원나라의 양식으로 제작된 것이다. 남대가의 동쪽으로는 자남산이 자리하는데 서울의 남산과 비교해 볼 수 있다. 현재 이 자남산에는 김일성 동상이 세워져 있어 예나 지금이나 남대문 일대가 개성의 중심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20세기 초 일제에 의해 작성된 지적자료에는 남대문을 비롯한 내성의 성벽이 명확하게 표기되어 있어 당시까지 내성이 잘 보존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의 개성 시내에서는 내성을 비롯한 성곽의 흔적은 확인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아마도 일제강점기의 도시개발과 한국전쟁의 파괴를 겪으면서 많은 부분이 유실되었을 것이며 이후 도시의 재건과 확장과정에서 서서히 자취를 감추게 되어 지금과 같이 남대문만 덩그렇게 남아있게 되었을 것이다. 남과 북, 서로 많은 부분이 다르지만 서울과 개성의 남대문은 수난의 역사를 겪고 있다는 점에서 참 닮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필자만이 아닐 듯하다.

박성진 / 국립문화재연구소 고고연구실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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