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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계리의 스케치北 | 정창모, 북한 미술계 서정적 표현의 대가 2013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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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계리의 스케치北 17 | 정창모, 북한 미술계 서정적 표현의 대가

정창모, , 1991 Ⓒ연합뉴스

정창모, <꽃과 대>, 1991 Ⓒ연합뉴스

김대중 전 대통령 시절 남북 정상회담을 통해 남북 문화교류의 문이 열리면서 가장 활발하게 진행되었던 분야가 미술교류였던 것 같다. 당시는 우리 사회에서 미술붐이 일기 시작하던 시점이었다. 자신의 집에도 보기 좋은 미술 작품을 하나쯤 구입해서 걸어놓고 싶은데, 비싼 가격 때문에 차마 구매할 생각을 하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북한 대표 작가들의 작품이 매우 매력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남한에 소개된 작품들은 북한을 대표하는 작가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남한의 그것과 비교하면 매우 저렴했고, 일반인에게는 왠지 어렵게 다가오는 추상 미술품들이 아닌 리얼리즘에 토대를 둔 구상작품이었다는 점이 대중들의 관심들을 촉발시켰다. 당시 북한 미술품의 매매는 진위 여부를 포함한 여러 문제점을 산출하기도 했지만 스타 작가 또한 부상하게 했다는 점에서 주목되었다.

국내 시장이 가장 선호했던 작가 중 한 사람이 바로 이번 호에 소개할 정창모다. 그는 월북한 화가였다. 물론 일제강점기에 이미 화가로서 활동하다가 월북한 화가가 아닌, 북쪽에 올라가 비로소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는 점에서 ‘월북화가’라는 호칭이 어울리는 화가는 아니다. 월북화가인 이쾌대의 경우 일제강점기 당시 명성이 월북 이후의 활동에 관심을 갖게 만들었다면, 정창모의 경우에는 북한을 대표하는 화가로서 주목되기 시작했지만 훗날 알고 보니 남한 태생이었다는 것으로 알려졌다는 표현이 적합할 것이다.

실제 정창모는 북한 미술계를 대표한다. 주체문예 이론 속에서 풍경화에 대한 김정일의 유명한 테제 “자연은 어느 것이나 뜻이 깊고 정서가 차 넘치게 그려야 한다.”를 잘 구현한 대표적인 작가가 정창모이기 때문이다. 북한 미술계에서는 아무리 좋은 내용과 위대한 사상을 체현하고 있는 작품이라도 정서적으로 표현되지 못하면 진정한 예술작품이라 할 수 없다고 논하고 있다. ‘정서성’이 있어야 사람들의 감정에 작용하여 감상자의 정서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말이다.

이는 선전·선동을 통해 인민을 교양하려는 목적을 지닌 북한 미술의 존재의의와 직결되는 문제다. 서정성이 잘 표현된 작품으로 북한 미술계에서는 정창모의 <북만의 봄>(1966년)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이 작품은 제작 당시부터 북한 미술계의 높은 평가를 받았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제작 당시에는 주제를 뚜렷이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화면 중심에는 일제강점기 독립을 위해 싸운 유격대원이 물을 마시고 있는 말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고, 화면 왼쪽 위에는 숲속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항일유격대원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문제는 이 부분인데, 휴식을 취하고 있는 유격대원들의 모습이 혁명의 과정에서 적극적인 활동성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으면서 제작 초기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던 것이다.

정창모, , 1966 Ⓒ연합뉴스

정창모, <북만의 봄>, 1966 Ⓒ연합뉴스

<북만의 봄>, ‘낙관적 미래 표현’ 주목 받아

그러나 휴식을 취하고 있는 모습은 다른 한편으론 그 동안 험난했던 삶의 모습을 내포하고 있으며, 눈 쌓인 풍경은 그들의 험난했던 현실과 가슴 아픈 희생의 숭고함을 웅변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하는 시각이 이어지면서 작품에 대한 평가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더구나 괴롭거나 절망하지 않는 미소를 머금고, 밝은 표정으로 물을 마시고 있는 말을 바라보고 있는 소녀대원의 모습이 화면 안에 낙관적 미래를 암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나뭇가지에서 돋아나는 흰 눈과 새싹의 효과를 통해 희망을 서정성 있게 표현하였다는 점을 북한 미술계가 높이 평가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북만의 봄>은 화면을 보자마자 바로 메시지가 전달되는, 직접적 방식이 아닌 꼼꼼히 작품을 감상하다보면 자연스레 풍겨 나오는 정서적 여운으로 하여금 보는 이들의 감동을 이끌어내고 있다는 점이 주목되었던 것이다.

정창모, , 1980 Ⓒ연합뉴스

정창모, <밀림의 눈보라>, 1980 Ⓒ연합뉴스

정창모는 화조화 부분에서도 뛰어난 성과들을 만들어냈다.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시대의 요구를 반영한다는 과업에 따라 북한 미술계가 인물화 중심으로 평가되었을 때 상대적으로 고루한 장르로 평가받았던 부분이 전통 시대에 많이 그렸던 화조화나 기명절지도 등의 정물화였던 것이다. 그러나 북한에 기념비적 건축물이 많이 세워지면서 건축물 장식을 위한 미술품들이 요구되기 시작할 때 정창모는 이처럼 외면 받던 장르를 통해 성과를 내면서 미술계에 자신의 존재를 안착시켰다.

정창모가 이러한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전라도에서 일제강점기 표구를 했다는 아버지와 문인화가였다는 할아버지 밑에서 어린 시절부터 전통 미술을 보고 자라났던 환경이 내재되어 있었다는 점 또한 주요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뿌리의 힘이었을까. 정창모의 화조화, 기명절지도가 남쪽에 소개되자 몰골법을 다루는 그의 필력은 국내 시장의 뜨거운 반응을 이끌어냈다.

남과 북에서 사랑받던 정창모는 2010년 사망했다. 그래서인지 통일을 염원하며 많이 그렸던 분단의 현장 <분계선>에 쓰여 있는 그의 글이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분계선. 이 땅의 허리를 갈라 지나간 비운의 철조망 우에 눈보라 싸납다. 허나 우리의 소원은 통일. 이 노래 부르며 통일의 봄 맞으리.”

박계리 / 한국전통문화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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