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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시대, 북한은 어디로? | 중국 화궈펑과 소련 흐루시초프를 보자 2012년 1월호

김정은 시대, 북한은 어디로? | 중국 화궈펑과 소련 흐루시초프를 보자

현 상황에서 북한 김정은의 권력승계 성패를 예단할 수는 없다. 그러나 후계자가 공고한 지위를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절대권력자의 사망으로 권력을 승계받은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중국의 마오쩌둥-화궈펑과 구소련의 스탈린-흐루시초프 사례가 이미 있었다. 두 경우를 들여다보면 김정은 권력승계 양상의 의미 있는 관찰 포인트를 짚어낼 수 있다.

화궈펑, 군부와 공생관계 구축 실패

먼저 중국의 화궈펑 사례다. 절대권력자에 의해 후계자로 지명되어도 권력을 공고하게 다지는 것은 상당히 어렵고, 결과적으로 완전한 권력장악에 실패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마오쩌둥은 1976년 1월 사망한 저우언라이 총리의 후임으로 화궈펑을 내세운다. 제1부총리 덩샤오핑을 제치고 임시 총리 및 당 부주석으로 임명한 것이다. 이후 덩샤오핑이 저우언라이 추모 시위의 배후로 지목돼 고위직에서 해임되자 마오쩌둥은 직접 화궈펑이 당 제1부주석 겸 국무원 총리직을 승계하도록 한다. 그 해 9월 9일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후계를 둘러싼 ‘문화대혁명 4인방’과의 권력투쟁이 촉발되지만 화궈펑은 이를 제압하고 10월 당 중앙위 주석 및 중앙군사위 주석으로 임명돼 권력을 승계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화궈펑은 이후 ‘마오쩌둥의 결정과 지시가 모두 옳다’는 이른바 ‘양개범시(兩個凡是)’론을 내세워 문화대혁명을 옹호하며 덩샤오핑을 비판하기 시작한다. 덩샤오핑은 문화대혁명 이후 해방된 간부, 군 원로 및 지방의 군 실력자 등 복권을 지지하는 인사들을 중심으로 광범위한 기반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화궈펑과 덩사오핑의 직접적 대결은 필연적 결과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화궈펑은 무리한 신약진정책을 추진하게 되고 투자 대비 최악의 결과를 낳은 1978년의 경제 실적에 따라 전면적인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 반대로 덩샤오핑은 실사구시에 입각한 현대화 과제를 제기하며 지지세력을 확산해 나가기 시작했다.

1980년 덩샤오핑은 후야오방을 중앙서기처 총서기에 기용해 화궈펑을 완전히 무력화시킨다. 결국 화궈펑은 1980년 국무원 총리직, 1981년에는 당 중앙 주석직과 중앙군사위 주석직에서 사임한다. 총리직은 자오쯔양, 당 주석직은 후야오방, 중앙군사위 주석직은 덩샤오핑이 각각 승계하였다.

화궈펑이 덩샤오핑에게 밀린 중요한 이유는 군부와의 공생관계 구축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화궈펑은 군 경험이 없었다. 자연히 군내에 인맥을 구축하지 못했다. 덩샤오핑은 달랐다. 군 인맥을 십분 활용하며 지배권을 다져나갔다. 덩샤오핑은 1978~1980년 사이 11개 대군구 중 선양군구를 제외한 10명의 사령관과 11개 군구의 전 정치위원을 교체했다. 성급군구도 28개 가운데 22개 지도자들을 자신의 세력으로 충원했다. 덩샤오핑의 실용주의 노선이 현대화를 추구하는 군부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이유다.

다음으로 흐루시초프의 사례다. 권력승계자가 권력을 모두 장악하더라도 절대권력자 이후 이완된 환경에서 정책적인 문제가 발생하면 정치적 위기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흐루시초프는 전임자 스탈린이 사망한 후 곧바로 권력 공백을 메워나가기 힘든 환경을 맞고 있었다. 기존 권력구도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인물들과 경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장 위협이 되었던 인물은 말렌코프였다.

당시 말렌코프는 스탈린을 제외하고는 유일하게 3개 최고위 위원회인 당 정치국, 서기국, 각료회의에 소속되어 있었다. 사실상 스탈린의 후계자 위상을 확보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공산당 지도자였던 흐루시초프가 1949년 당 중앙위원회 서기로 발탁되며 후계구도를 둘러싼 둘 사이의 본격적인 권력경쟁이 시작된다.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이 사망하자 먼저 움직인 것은 말렌코프였다. 스탈린 사망 다음 날인 6일 말렌코프는 공안기구 수장인 베리아의 지원을 업고 각료회의 의장직에 취임했다. 내각과 당을 모두 장악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흐루시초프, 분권화 노선으로 반대층 키워

하지만 걸림돌은 당시 권력엘리트들이었다. 그들은 스탈린 이후 권력모델이 집단지도체제로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여기에는 후르시초프의 리더십이 더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자연히 말렌코프에 대한 권력집중은 경계의 대상이었다. 결국 말렌코프는 1953년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제1서기직을 포기하게 된다. 제1서기직은 다음 서열인 흐루시초프에게 넘어갔다. 내각은 말렌코프, 당은 흐루시초프가 장악하는 형국이 된 것이다.

둘의 권력투쟁은 정부와 당의 대결양상을 보이며 치열하게 전개되었고 그 뿌리에는 정책을 둘러싼 상당한 이견차가 있었다. 말렌코프는 중공업 성장을 지연시키고 국방비 감축을 시도했다. 대신 소비재 공급을 개선하고자 했다. 반면 흐루시초프는 농업생산 개선을 강조하며 국방비 지출을 늘리고자 했다. 말렌코프의 소비재 우선 정책은 중산층과 도시 관료들의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군부는 이를 국방예산 삭감으로 이해하고 반대했다. 말렌코프는 우익편향이라는 비판을 받기 시작하며 권력 중심에서 멀어져갔다. 결국 흐루시초프는 1958년 말렌코프가 사임한 각료회의 의장직에 취임, 당과 내각을 모두 장악하게 되었다.

반면 흐루시초프의 실각과정을 보자. 당 중앙위 제2서기 코즐로프가 스트로크로 쓰러지자 흐루시초프는 1963년 브레즈네프를 후계자로 생각하고 제2서기로 기용한다. 그러나 브레즈네프는 KGB 수장 세미차스트니의 지원 하에 1964년 흐루시초프를 당 서기장직과 각료회의 의장직에서 해임하는 것을 주도했고 동시에 제1서기직을 승계하였다.

흐루시초프에게 후계자로 인정받던 브레즈네프가 흐루시초프를 축출한 것은 정책적인 문제에서 비롯된 측면이 컸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흐루시초프의 분권화 노선이었다. 분권화된 지역단위 경제관리시스템 도입이나 지역 당위원회를 산업 및 농업위원회로 분리하려는 노력 등이 모두 경제를 중앙에서 통제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불만을 샀다.

당 서기들은 지방당 조직을 분리하기로 한 결정과 임기 제한에 대해 비판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지방에 지역경제회의가 만들어지면서 많은 경제기획가들은 중앙에서 멀어지며 소외되었다. 군부 역시 계속되는 군축시도를 좋아하지 않았다. 이 모든 세력들이 흐루시초프에 대한 폭넓은 반대층 형성의 원인이었으며 종국엔 브레즈네프에 의해 축출되는 결과를 낳게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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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루시초프(Nikita Sergeevich Khrushchyov)

 

이동훈/ 본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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