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세히보기 2013년 7월 1일 0

힐링일천만, 이제는 만나야 한다 | 조정동 할아버지 “만남까진 바라지도 않아. 생사확인이라도 했으면” 2013년 7월호

2013 IPA&일천만이산가족위원회 공동캠페인 | 힐링일천만, 이제는 만나야 한다 6

조정동 할아버지 “만남까진 바라지도 않아. 생사확인이라도 했으면”

TS_201307_62주섬주섬 옷을 걸쳐 입었다. 이대로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최근 남북 회담이 진행된다는 소식에 이산가족 상봉도 곧 재개될 것 같았다. 물론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괜시리 마음이 바빠졌다. “어디 가세요?”, “이북5도청에 다녀오겠소.” 하지만 이북5도청에 들러 이전 상봉신청 기록을 확인하던 찰나, 지난 수십 년간 그랬던 것처럼 기대감은 또 다시 실망으로 바뀌었다. 남북회담이 무산된 것이다. 형님을 만날 수 있으리란 실낱같던 희망이 또 끊어지고 말았다.

조정동 할아버지(75)는 이북에 형님이 계신다. 아버님, 어머님이 작고하시고 부모처럼 믿고 의지했던 작은 형님까지 작년 먼저 세상을 떠나고 나니 이북에 계신 큰 형님이 부쩍 그립다. 그의 고향은 황해도 평산군 남천. 그곳은 평범한 시골마을이었다. 쉬는 시간이면 학교 근처에 있는 맑은 개울에서 물장난을 치다가 다시 수업에 들어가고, 집 근처 기찻길에 기차 한 대만 지나가도 신기하게 여기며 모여들던 곳, 집에서 기르던 작은 말을 타고 언덕을 쏘다니던 그렇게 작고 평화로운 곳이었다. 저녁 식사 때가 되면 온 가족이 모여 된장국을 먹으며 된장 덩어리가 쇠고기인 줄 알고 형제들과 달려들어 먹던 가난하지만 화목한 곳이었다.

“금방 뒤따라온다고 했는데, 그게 마지막이 됐어”

할아버지 나이 13살 때 6·25전쟁이 발발했다. 7남매의 첫째였던 형님은 당시 19살로 국군들과 치안 업무를 맡고 있었다. 덕분에 이남으로 향하는 기차 소식을 알게 됐고, 형님을 제외한 모든 가족이 무사히 피난길에 오를 수 있었다. “일을 마무리하고 다음 기차로 금방 뒤따라온다고 했는데, 그게 마지막이 됐어.” 피난 기차는 좌석하나 없는 화물열차였지만,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빼곡했다. 먹을 것이라곤 찬밥 덩어리와 소금뿐이었지만 그조차 감사한 마음으로 먹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피난길이었지만 다시 행복해질 날을 기약하며 견뎠다. 그 때 형님이 아니었음 할아버지는 지금도 이북에 있었을지 모른다며 결국 형님 덕분에 편하게 살고 있다고 했다.

조정동 할아버지의 이산가족 상봉 신청서

조정동 할아버지의 이산가족 상봉 신청서

“몇 십만 명이 언제 다 만나겠어”

형님은 둥글둥글하니 도톰하고 복스럽게 생긴 편이었다. 할아버지 기억 속의 형님은 20살 언저리 그 때 모습으로 멈춰있다. 60년이 넘는 세월 앞에서 형님은 어떻게 변하셨을지 도통 그릴 수가 없다. 아버님을 많이 닮았었는데 이제는 만나도 알아보기 힘들 것 같아 속상하다. 장손을 혼자 고향에 두고 내려온 부모님의 속은 어땠을까. 형님은 부모님께 평생 한으로 남았다. “당시 결혼도 안했고 가족과 다 헤어지고 혼자였으니 엄청 고생했겠지. 더구나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북에서 잘 먹기나 했을까?” 형님이 얼마나 어렵게 살았을지는 안 봐도 훤하다. 우리는 가난해도 함께였지만, 형님은 이 모든 어려움을 혼자 이겨냈어야 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부모님은 항상 형님을 불쌍히 여기고 그리워 하셨다. 지금 부모님은 파주 통일동산에 계신다. 고향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마음이라도 편히 계시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저 세상에서 이북을 바라보며 두고 온 큰 아들을 보듬고 계실지도 모르겠다.

1983년 이산가족찾기 열풍이 전국을 강타했을 때 형님을 찾을 수 있겠다는 희망은 가족들을 한껏 들뜨게 만들었다. 아버지와 작은 형님이 프로그램에 나가 인터뷰까지 했지만,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옆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하나, 둘 가족을 만날 때마다 속은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행여 다른 친척들이라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더 큰 실망만 돌아왔다. 그 후 이산가족이 사회 이슈가 될 때마다 마음은 천당과 지옥을 오갔다. 언제쯤 할아버지 마음 속에도 안식이 찾아올 수 있을까. 분단의 현실은 평생 벗어날 수 없는 인생의 짐을 안겨주었다.

그래도 살다보니 미소짓게 되는 일도 있기 마련인가 보다. 고향에서 학교 다닐 적 담임선생님을 이곳에서 만났다. 수업시간에 엄하게 회초리로 손바닥을 때리고는 하셨던 선생님인데 어찌나 반갑던지 지금도 종종 찾아뵙고 인사를 드린다. 선생님은 이제 90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셨고, 할아버지 또한 80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스승과 제자는 어느덧 함께 나이를 더해갔다.

할아버지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많은 이산가족들이 살아 생전 모두 만났으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울 것 같다. 그저 생사확인 후 잘 살고 있는지 편지만 주고 받았으면 여한이 없을 것 같다. “만남까진 바라지도 않아. 생사확인이라도 했으면…” 형님이 살아 계신지조차 알지 못하는 현실이 답답할 뿐이다. 최근 당국에서 진행하고 있는 화상상봉도 꿈만 같은 이야기다. “생사도 모르는걸. 100명, 200명씩 상봉해서 몇 십만 명이 언제 다 만나겠어. 회담 후 상봉이 결정되면 양쪽이 몇 명씩 정해서 개인적으로 통보만 하니, 이런 방식에 얼마나 속이 타는지.”라며 “명단이 넘어가서 생사가 확인되면 서신교환이라도 할 수 있게 해야 하는데 그것조차 못하게 하니…” 결국 답답함에 말을 잇지 못한다.

이렇게 기약 없는 이별은 할아버지도, 형님도, 그 누구의 뜻도 아니었다. 만남 역시 우리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할아버지는 최근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가 긍정적으로 변하고 있다며 희망을 내비추셨다. 지난 60년간 기대와 실망을 수도 없이 반복했다. 하지만 조정동 할아버지는 또 다시 용기 내어 형님과 만날 날을 기다린다.

선수현 / 본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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