윗동네 리얼 스토리 | “감히 밤새 그따위 즐거움에 빠져?” 2012년 2월호
윗동네 리얼 스토리 12
“감히 밤새 그따위 즐거움에 빠져?”
평양시 선교구역 강안1동에 위치한 종합방직공장 아파트에 ‘칠칠이’라는 중년남자가 살았다. 박지우라는 좋은 이름도 있지만 연년생으로 딸만 줄줄이 일곱이어서 그렇게 불렸다. 어떤 이들은 그게 본명인가 했다. 칠칠이는 늘 우울한 인상에 쩍 하면 화를 잘 내는 성격이었다.
그러는 그를 일부 사람들은 정신병 환자라고까지 비하했다. 북한에서는 60년대 초 내각결정 제49호에 의해 뚝섬(인가와 떨어진 고립된 지역)에 병동을 짓고 정신이상자들을 모두 이주시킨 것이 빌미가 되어 그런 병의 사람들을 지금까지 49호라고 부른다.
멀쩡함에도 불구하고 ‘칠칠은 사십구(7X7=49)’라는 답 때문에 ‘49호’ 즉 정신병자로 조롱받는 이 사람은, 그럴 만도 하게 괴벽한 사람이기도 했다.
“아들 생일을 고치게” … “왜?”
좀 밝게 살라고 동료들이 권고해도 좀처럼 개진되지 않았다. 집에만 들어오면 일곱 딸이 멀뚱멀뚱 쳐다보는 것이 그렇게 싫었다고 한다. 술만 마시면 왜 나는 아들이 없냐며 아내를 욕했고 팔자를 탓하며 공연한 트집을 잡고 기물들을 집어던졌다.
그러던 1995년 5월 중순,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고 이 사람의 얼굴이 소낙비 걷힌 뒤의 맑은 하늘처럼 활짝 개였다. 마침내 칠칠이 아내가 여덟 번째로 달덩이 같은 아들을 낳았던 것이다. 사람이 그렇게 변할 수가?
출근길에 버스도 안 타고 춤추듯 팔다리를 휘저으며 날듯이 걸어 다녔고 알든 모르든 만나는 사람마다 벙글거리며 ‘내 아들’, ‘내 아들 이거’ 하며 엄지손가락을 내둘렀다. 직장동료, 마을 사람 할 것 없이 즐거워하는 그를 정겹게 바라보며 진심으로 축복해 주었다. 어제 날의 칠칠이 모습은 더 이상 그에게서 찾아볼 수 없었다.
애도기간에 감히…, 평양에서 나가라!
그러나 그의 기쁨은 생각처럼 오래가지 못했다. 며칠 후 동료들의 성화로 술 몇 되 구해 놓고 축배잔을 드는 자리에서 태어난 아이의 출생일을 묻고 난 한 동료의 얼굴이 단박 소태를 씹은 우거지상이 되었다. 그 사람인즉 박지우의 고교 동창으로 모 권력기관에서 근무하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이 왜 그러는지 그냥 기분 나쁜 일이 있었나 보다 하고 생각했을 뿐 누구도 주의 깊게 살펴본 사람은 없었다. 떠나갈 때 맨 마지막으로 문을 나서면서 그가 박지우에게 말했다. “아들의 생일을 고치게.” “왜?” 어안이 벙벙했지만 그 사람은 절레절레 고개만 흔들었다.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어 그냥 늘어 잡고 이유를 묻는데 더 이상 묻지 말라고 홰홰 팔을 내젓는다. 그럼 어떻게 고쳐야 좋으냐고 묻자 생일이 5월 20일이니 20일 쯤 늦춰 6월 10일 이후로 적당히 출생등록을 하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건 친구로서 하는 진심어린 권고야, 자네가 수령님을 얼마나 진심으로 받들고 모셨는가 하는 문제니까,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봐, 뭐가 잘못됐는지.” 하며 황망히 떠나갔다.
그 친구가 죽은 사람도 입을 벌린다는 국가 권력기관의 직원이고 보면 이건 범상히 흘려 넘길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언뜻 그 이유가 떠오르지 않아 박지우는 밤새 아내와 함께 의논했지만 종시 그 답을 찾지 못했고 다음날 출생신고를 했다.
일은 그로부터 두 달 후에 터졌다. 칠칠이는 평양 추방령을 받았고 자강도 두메산골로 쫓겨 갔다. 떠나면서도 이유를 몰라 허둥댔다. 다시 몇 달 흘러 그 이유라는 것을 알고는 그만 까무러치고 말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1994년 7월 8일부터 그 해 8월 8일까지 선포된 한 달간의 김일성 사망 애도기간에 아이를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애도기간 음주 금지, 친척방문 금지, 모여 앉기 금지, 일체오락 금지 등 오로지 ‘신’의 서거와 관련한 엄숙한 애도를 요하는 기간에 밤새 그따위 즐거움에 빠졌다는 것은 진심으로 수령을 우러르는 사상적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표현이었다.
당시에는 공개되지 않았지만 김정일은 은밀히 권력기관에 애도기간 개인향락에 빠진 자들을 엄격히 조사하라는 지시를 내렸던 것이다. 그 지시 집행에서 평양은 더욱 엄격했다. 지방에서는 한자리 하는 간부들에 한해 조사에 걸리면 무조건 철직시켰다.
칠칠이는 그 후 산간오지에서 정말로 49호가 되고 말았다. 칠칠이는 바로 필자의 처남이다. 두 번째 ‘신’이 죽은 지금 북한 사람들은 이러한 17년 전의 일을 기억하고 김정일 애도기간만이라도 제발 남편, 아내와 멀리 했으면 좋겠다. 아비를 똑 떼 닮았다는 김정은을 도무지 믿을 수 없으니 말이다.
이지영/ 계간(북녘마을)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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