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기고|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이 2012년에 주는 의미 2012년 3월호
독자기고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이 2012년에 주는 의미

1919년 3월 1일 만세를 외치며 행진하는 시위군중
지금까지 매년 3월 1일이면 독립기념관이나 세종문화회관에서 3·1절 기념식을 열었고, 지방은 광역시·도 혹은 시·군 및 면 중심으로 공공장소나 학교에서 3·1절 기념식을 갖고, 하루 쉬는 날이 되어왔었다.
본인도 초등학교 때부터 수십 년간 3·1절 기념식에 참가했으나, 1919년 3월 1일에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고, 유관순 열사가 순직했다는 것 외에는 별로 알지 못했다.
그러던 중 지난해 11월 석오 이동령 선생 생가 방문시 우리나라 임시정부(상해)가 3·1독립운동과 관계가 많다는 내용과 거기서 별도로 받은 책자를 접하고, 3·1독립운동이 큰 거사였음을 알았다. 이에, 관심이 커져 몇 개월에 걸쳐 국회도서관을 찾아 3·1독립만세운동에 관한 자료를 상세히 검토해 보았다.
3·1절은 하루 쉬는 날?
한마디로 3·1독립만세운동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엄청난 수가 참여한 우리 5천년 역사에 가장 큰 민중거사로서 일제의 갖은 탄압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참여한 우리 국민의 애국충정이 표출된 세계적 구국결사였다.
당시 세계적으로는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제기한 민족자결주의에 영향을 받아 상해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가들이 신한청년당을 결성하면서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였다. 일본의 유학생들도 1919년 1월부터 동경에서 구국을 위해 청년독립단을 조직하는 한편 독립선언을 준비해 오다가 마침내 2월 8일에 YMCA회관에서 유학생 400여 명이 참석해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다.
국내에서는 천도교 중진들이 1918년 12월경에 민족의 장래를 논의, 상해로부터 신한청년당의 밀사가 다녀가고 뒤이어 동경으로부터 2·8독립선언서를 갖고 찾아오자 큰 자극을 받아 최린 등이 본격적으로 3·1독립만세운동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어 기독교계와 불교계도 협의를 통해 동참키로 하였다.
천도교, 기독교, 불교계는 계속되는 회의와 진행 속에서 독립선언서의 기초는 최남선에게 맡기기로 하고, 2월 초부터 초안 작성에 착수, 11일에 완수해 천도교 측에 넘겼으며 기독교와 불교계에서 모두 동의한 독립선언서는 2월 20일부터 비밀리에 보성사에서 인쇄가 시작되었다.
민족대표 선정은 교단별 추천에 의해 이루어 졌으며 천도교에서 손병희 등 15명이 추천되고, 기독교에서 이승훈 등 16명이, 불교에서 한용운 등 2명이 결정되어 33인이 되었다. 3월 1일에 민족대표들이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 한용운의 선창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삼창하였으나 곧 일본 경찰에 체포 연행되었다. 이때 탑골공원에서는 민족대표들이 오지 않아 군중들 중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종로거리로 나서면서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
지방에서도 서울과 비슷한 형태의 독립선언과 만세시위가 벌어지면서 전국적으로 3·1독립운동이 퍼져 나갔다. 이로써 독립만세거사는 일본 식민통치에 최대 항거가 되었다. 계속되는 시위는 전국에 걸쳐 크고 작은 도시나 지역마다 상당수의 읍면단위까지 특히 장날을 기해 3월은 물론 4월에 반복되면서 진행 되었고 일부는 5월에도 시위가 있었다고 한다.
우리는 최선 다하고 있는가?
3·1독립운동은 우리나라 국내의 정세 및 외국에 많은 변화를 유발하였다. 1919년 4월 10일 상해에서 각 지역의 독립운동가 대표 29명이 회의를 열어 논의 끝에 나라이름은 대한민국, 운영체제는 민주공화정체제를 갖춘 임시정부를 결성했다. 그동안에 줄곧 논의되었던 내용들이었으며 회의는 다음날까지 계속되어 4월 11일 제헌헌법에 해당하는 대한민국 임시헌장이 제정되고 대한민국의 임시정부가 수립된 것이다.
또한 중국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우리나라 3·1독립운동은 중국 인민 특히 중국 청년들을 고무시켰으며 당시 중국 진보 언론의 열렬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두 달 후 파리회의결과 중국 산동성의 주권이 강탈되자 베이징에서 5·4국민운동이 일어났는데 우리나라 3·1독립운동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한편 일본에서도 3·1독립만세운동에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더욱 강한 통치론도 나왔지만 일본 언론계에서는 4월에 들어서며 조선총독부의 무단통치에 대한 비판이 나타나고 혹독한 헌병 경찰제의 문제점과 한국인에 언론의 자유를 부여해야 된다는 등 많은 개선책이 회자되었다.
마침내 일본은 8월에 조선총독 하세가와를 사이토로 교체하고 새로운 통치방침으로 문화정치를 내세우며 그동안의 심한 무단통치를 인정하고 유화책을 시도하였다.
그 후 1920년 1월 8일 <조선일보>, <동아일보>, <시사신문> 발행을 허가하는 등 일본의 한국 통치는 상당한 변화를 가져왔다. 또한 영국에서도 1919년 7월 하원이 한국 독립문제 대정부질의를 하였고, 1919년 9월엔 미국 스펜서, 노리스 의원 등이 상원에 한국 독립문제 토의안을 제출하기도 해 세계 여러 나라의 관심을 모으기도 하였다.
3·1독립만세운동은 세계적 거사로서 우리 국민들이 어렵게 살면서도 목숨을 아끼지 않고 투쟁한 희생정신의 구국결사였고 시민혁명이었다. 90년이 넘게 지난 요즈음 우리는 이분들의 뜻을 잘 받들고 있는지,
우리도 나라를 위해 최선을 다 하고 있는지, 이 나라가 바로 가도록 미래를 생각하며 고민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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