윗동네 리얼 스토리 | “대길이 죽어요? 살아요?” 2012년 3월호
윗동네 리얼 스토리 13
“대길이 죽어요? 살아요?”
북한은 지금 변화의 태동기를 맞고 있다. 개혁·개방이란 태아가 출생의 그날을 기다리듯 북풍 한류의 양수 속에 맹아적인 태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접 느낄 기회가 있었다. 작년 추석 때쯤이었다. 초친 나물이 되어 지하철을 타고 퇴근하던 내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중국에서 걸려온 수신자부담 전화였다. 진짜 부담스러웠다. ‘받을까, 말까’ 망설이다가 혹시 고향에서 걸려온 전화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나는 통화버튼을 눌렀다. 순간 북한에 있는 조카 녀석의 목소리가 반갑게 울렸다.
“삼촌, 접니다.” 반가움도 잠시, 두 가지 걱정에 심장이 후드득 뛰었다. 첫째는 먹고살기 힘들다며 툭하면 북·중 국경연선에 나와 돈 부쳐달라는 조카 녀석의 부탁이었고, 둘째는 불법통화로 인해 혹시라도 조카 녀석에게 들이닥칠 신변위험 때문이었다.
“딱 하나만 묻고 끊을게요.”
중국전화기를 이용한 북·중 국경연선에서의 불법통화는 북한 국가안전보위부 전파감독국에서 설치해 놓은 전파탐지기 때문에 통화시간을 2분 이상 초과하면 안 된다. 2분이 넘어서는 순간 위치가 추적되고 체포조가 뜨기 때문이다.
사활이 걸린 문제여서 오랜만에 만난 가족과의 통화일지라도 안부조차 넉넉히 물을 시간이 없었다. 송금에 관한 실무적인 얘기만 몇 마디 주고받고 나서 통화를 끊으려는 순간, 급기야 조카 녀석의 다급한 목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잠깐만, 삼촌! 딱 한 가지만 묻고 끊을게요.” 갑자기 전신에 긴장이 몰려왔다. 뭔 중요한 얘기라도 있는 줄 알고 귀를 도사린 채 조카 녀석의 다음 말만 기다리고 있는데 수화기에서 울리는 조카 녀석의 말이 완전 황당하다.
“삼촌, 대길이가 죽어요? 살아요?”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게 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야?’ 뚱딴지같은 조카 녀석의 말에 나는 순간적으로 탈북자 중에 대길이란 사람이 있는 줄로 잠시 착각까지 했었다.
알고 보니 황당했다. <KBS>에서 방영한 드라마 ‘추노’에 대한 얘기였다. 주인공으로 나오는 배우 장혁의 극중 이름이 ‘대길’이라는 것이 아닌가! “몇 부까지 봤냐.”고 어이없어 물었더니 4부까지만 봤다는 것이다. 차라리 보지 않는 것이 낫지, 5부를 보지 못해 아주 환장해 버리겠다는 것이었다.
황당하기 그지없었지만 곧이어 그 심정이 어떤 것인지 다소 이해할 만도 했다.
나도 북한에 있을 때 적지 않은 한국 드라마들을 보곤 했었는데 경험에 의하면 한국 드라마를 끝까지 보지 못할 바치곤 아예 첫 눈 맛을 보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 한국 드라마는 일단 한 개 부를 보고 나면 다음 부를 보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끔 마지막 엔딩장면을 아주 감질나게 만들어 놨다는 생각에 나는 씩 웃었다. 오죽했으면 조카 녀석이 위기상황 속에서도 ‘대길’이 안부를 물을까, 자기 죽을 생각은 하지 않고 말이다.
한국 드라마, 너무 쌈박해!
그렇다. 지금 북한사람들은 거의가 한류중독에 걸려 패닉 상태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전적인 북한 영상매체에 대한 식상함이 한국 드라마의 쌈박함으로 인해 북한주민들 속에 북풍 한류열광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 어쩌면 지금의 북한 현실이다. 북한 영화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영상미와 드라마틱한 재미로 인해 한국 드라마는 요즘 기근에 시달리고 있는 수많은 북한주민들에게 새로운 삶의 활력소가 되고 있다.
북·중 국경지역에 살고 있는 북한주민들은 한국 TV에서 방영하는 한국 드라마를 보름 안팎이면 다 볼 수 있다고 한다. 중국 연변에 설치된 한국 위성TV를 통해 새로 방영되는 한국 드라마들이 즉시 CD나 DVD에 옮겨져 북한으로 밀반입되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 보위부의 살인적인 단속에 가슴 졸이며 현실적인 스릴감 속에 한국 드라마의 재미에 흠뻑 빠져있는 북한 주민들의 모습이 그야말로 드라마다. 아마도 마음 놓고 볼 수만 있다면 시청률 100%는 전혀 문제되지 않을 것이다.
이지명/ 계간 <북녘마을>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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