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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 ‘한반도 신뢰프로세스’ 첫 걸음 시작됐다 2013년 9월호

시론 | ‘한반도 신뢰프로세스’ 첫 걸음 시작됐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8월 15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제68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경축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8월 15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제68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경축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긴 무더위가 슬그머니 퇴각하고 초추(初秋)의 양광이 내리쬐는 것을 보니 금년도 하반기로 치닫고 있다. 지난 4월 8일 북한이 북측 근로자의 철수와 가동 중단을 일방적으로 선언하면서 벼랑 끝으로 몰렸던 개성공단 사태는 극적인 남북 합의로 정상화의 길로 선회하게 됐다. 개성공단 정상화를 위한 제7차 남북 실무회담이 지난 8월 14일 타결됐다. 북한이 개성공단 출입제한 조치를 일방적으로 내린 4월 3일 이후 133일 만이고, 7월 6일 판문점에서 1차 회담을 시작한 이후 39일 만이다.

합의보다 실천이 더욱 중요

박근혜 대통령이 스스로 ‘오랜 시간’이라고 표현한 것처럼 개성공단 정상화 협상과정은 길고 지루한 코스였다. 이 기간 동안 박 대통령은 융통성이 없어 보일 정도로 원칙을 고수했다. 그러나 그런 박 대통령의 접근법이 북한에 통했다. 박 대통령은 북한이 강하게 나온다고 기준을 바꾸지 않았고, 유화책을 편다고 바로 합의에 나서지 않았다. 공단가동 중단사태 같은 변덕의 ‘재발 방지’와 공단운영의 ‘선진화’를 집요하게 요구했고, 결국 관철해냈다.

최대 쟁점이었던 재발 방지 및 책임 규명에서 남북 모두 한 걸음씩 물러서면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 기업들이 입은 피해를 보상하기 위해 ‘개성공단 남북공동위원회’를 설치키로 하고 북한이 남북 교류협력 기업의 피해를 보상할 수 있다고 동의한 것 자체가 최초로 의미가 적지 않다. 남북공동위는 현재 운영되고 있는 ‘개성공업지구관리위원회(민간기구)’와는 별개의 조직으로 남북 당국 간 상설협의기구 형태가 될 예정이다.

그러나 남북은 2004년 ‘개성공업지구 출입 및 체류에 관한 합의서’를 체결했으나 합의서에 명기된 출입체류공동위원회를 아직까지 설치하지 못하고 있다. 또 2003년 ‘남북상사중재위원회’를 설치하기로 했으나 행동에 옮기지 못해 분쟁절차 보완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이는 ‘남북 간 위원회는 설치 합의보다 그 실천이 더 중요하다’는 점을 일깨워준다. 합의서가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미봉책이 담긴 서류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기 위해서는 향후 북측의 의지가 역시 관건이다.

개성공단 합의서 도출이 김정은 제1위원장이 늦게나마 군부의 돌격적인 조치가 적절치 않다고 판단하고 이를 원상회복시킨 것인지 본인의 무리한 과속을 교정한 결과인지는 분명치 않다. 또한 젊은 지도자가 중국의 남북대화 요구를 수용한 것인지 워싱턴과의 대화를 위해서는 남북대화가 필수라는 미국의 의사를 확인한 것인지는 추후 확인이 필요하다.

다만 주목해야 하는 관전 포인트는 공산주의의 전략에서 연초가 공격적인 대남 만조(滿潮)전략이었다면 하반기는 수세적인 간조(干潮)전략의 시기라는 것이다. 마오쩌둥의 퇴각 전략처럼 세(勢)가 불리하다면 입장을 바꾸는 것은 당연하다. 일시퇴각은 그것이 실리이건 후일을 도모하는 목적이든 필요하면 언제든지 가용하는 사회주의자들의 대응 전술이다. 오히려 북측은 허허실실 병법으로 금강산관광 재개 및 이산가족 상봉 등 현안 전반으로 대남 협상을 확대하는 역설적인 제의를 시도하고 있다.

젊은 지도자의 오판이 남긴 상처는 역설적으로 남북관계 전반을 근본적으로 점검하는 계기가 되었다. 경제협력의 현장인 개성공단은 정치 현안과 달리 어느 일방이 타방을 무시하고 봉쇄적인 자세를 견지한다면 지속될 수 없으며 전 재산을 투입한 기업의 생사가 불투명해진다. 5만여 명의 근로자가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는 것은 안착을 시도하고 있는 3대 세습 지도자에게도 막대한 부담이 아닐 수 없다. 향후 공단의 지속 위해서는 북측의 자의적인 돌발적인 조치를 막아야 한다. 공단의 안정적 운영을 위해서는 1994년 덩샤오핑이 싱가포르와 만든 ‘쑤저우(蘇州) 공단’ 사례도 벤치마킹해야 한다. 공단의 국제화는 불가피하다.

합리적 관행 축적이 성공의 요체

한편 박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는 8월 14일 개성공단 재개 합의라는 남북합의서가 도출되는 것을 지켜 본 후 남북관계 전반은 물론 통일문제까지 포괄적으로 언급하였다. 파행에서 정상으로 복귀하는 합의는 “경제협력 등 작은 통일에서 시작해 궁극적으로는 평화구축이라는 큰 통일을 지향하겠다.”는 박 대통령의 공약이 우여곡절 끝에 일보를 내딛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축사는 통일문제에 초점을 맞추었다. ‘남북한’ 또는 ‘북한’을 12번 언급하면서 ‘통일’이란 단어를 4번 사용했다. 내용에서도 “진정한 의미의 광복과 건국은 남북한이 하나 되는 통일을 이룰 때 완성된다.”면서 통일의 역사적 의미를 강조했다. 취임 1년차에 통일을 최우선 의제로 제시하였다.

결론적으로 통일을 ‘건국의 완성’이라고 의미를 부여하였다. 다만 통일문제에 관해 구체적인 계획을 제시하기보다는 우선 기반조성에 주력하겠다는 입장이다. 박 대통령은 개성공단 합의와 같이 여타 남북 현안에 ‘신뢰와 국제적 기준 적용’이라는 원칙을 적용하려 할 것으로 예상된다. 경축사에서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상식과 국제적 규범이 통하는 남북관계를 정립”하고 “진정한 평화와 신뢰를 구축해 가는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를 일관되게 추진하는 것”이 박 대통령의 복안이다.

이산가족 상봉과 금강산관광 재개에 이어 박 대통령의 핵심 관심사안인 DMZ 평화공원 성사까지 남북이 작은 약속을 실천하여 신뢰를 축적해가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12만8,800여 명에 달하는 이산가족 상봉은 고령화로 인해 시급한 사안이고 우리의 인도적 요청사항이다. 반면 금강산관광의 재개는 북측 당국이 실리차원에서 요구하고 있으나 당국자 사과와 5·24조치의 철폐 등과 맞물려 있는 이율배반적인 현안이다. 이런 현안관련 회담을 재개하는데 있어 남북 간의 주도권 싸움이 물밑에서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제안→뜸 들이기(혹은 거부)→역제안’의 과정은 남북관계의 새로운 회담문화로 자리 잡고 있다. 어느 한쪽의 제안을 일방적으로 수용하거나 거부하는 대신 일정기간 탐색전을 거친 후 당초의 제의를 뒤집어 역제의를 하거나 자신의 입맛에 맞게끔 수정하는 과정이 정례화 되고 있다. 남북대화 초기 국면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한 양측의 수 싸움이 치열하다는 것이다. 특히 지난달 20일 정부의 금강산관광 회담 수용은 핑퐁식 공방전의 결과다. 남북이 한 목소리로 금강산 관광 재개를 위한 회담을 갖자고 한 것은 의미가 있지만 실제 성사되기 까지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는 것을 시사한다.

박왕자 씨 사망에 대한 사과와 재발방지 약속 및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채택한 대북제재 ‘결의안 2087호’의 벌크 캐시(bulk cash, 대량현금) 거래금지 조항의 위반 여부 등도 주요 쟁점이다. 다만 남북회담의 역사는 어느 일방이 타협의 모든 성과를 독점하는 ‘제로섬 게임(zero sum)’일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히려 과실을 균점하는 ‘넌 제로섬(non zero sum) 게임’일 수밖에 없다. 공존과 공생원리를 통한 상생적 타협에 도달하는 합리적 관행을 축적하는 것은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의 성공 요체가 될 것이다.

남성욱 / 고려대 북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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