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일천만, 이제는 만나야 한다 8 | 박동열 할머니 “그저 미안하단 말 밖에는” 2013년 9월호
2013 IPA&일천만이산가족위원회 공동캠페인 | 힐링일천만, 이제는 만나야 한다 8
박동열 할머니 “그저 미안하단 말 밖에는”
누나, 같이 가.” “언니, 나도 따라 갈래!” 오늘도 가슴을 쓸어내리며 잠에서 깬다. 요즘 부쩍 동생들과 헤어지던 장면이 꿈에 나와 할머니를 괴롭힌다. 전쟁의 난리통에 나선 서울 유학행이어서 동생들을 떼어놓고 갈 수밖에 없었다. 울부짖는 동생들을 다 데려오면 서울의 형부와 언니식구들에게 부담이 될 것 같아 모질게 혼자 발걸음을 뗐다. 대신 가지고 있던 돈과 사진을 전부 동생에게 전해줬다. “이 돈은 필요할 때 쓰고, 누나 보고싶으면 사진 봐.” 그렇게 돌아서던 것이 마지막이었다. 눈이 수북히 쌓인 그 날, 양말도 안신고 뛰쳐나왔던 동생들의 모습은 언덕 뒤로 사라져 가듯 가슴 속에 묻어 뒀다. 잘 살고 있다 생각했는데 이렇게 가끔 반갑지 않은 그날의 기억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박동열 할머니(82)의 고향은 함경북도 성진군. 줄줄이 딸만 셋이던 집에 할머니의 출생은 그다지 환영받지 못한 일이었다. 아버지는 아들을 얻기 위해 할머니에게 ‘박동열’이라는 남자 이름과 ‘노새’라는 아명을 붙였다. 딸을 이렇게 부르면 아들을 얻을 수 있다는 속설때문이었다. 결국 할머니는 남동생을 얻었고, 그 후로도 여동생이 더 생겨 1남 6녀인 7남매가 되었다.
곱분이가 살아있다!
문학을 사랑하는 소녀로 자란 박동열 할머니는 먼저 시집간 언니들을 대신해 부모님과 동생들을 부양해야 할 의무감이 있어 생계를 위해 꿈을 접고 청진의 의학전문학교에 진학했다. 그러던 어느 날, 고향집이 폭격을 맞았다는 소문을 들었다. 흉흉한 소문에 가만히 있을 수 없어 학교에 허락을 구하고 집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찾은 집은 커다란 우물처럼 움푹 패여 있었고 할머니가 아끼던 책과 옷가지는 형체도 알아보기 어렵게 집 언저리를 굴러다니고 있었다. 집 근처의 전쟁용 수송 열차를 향한 폭탄이 빗나가 집에 떨어진 것이었다. 너무 기가 차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당시 가족들은 전쟁을 피해 산에 숨어 있다가 식량이 떨어지면 집에 와서 먹을 것을 가져가곤 했는데 마침 산에 있던 어머니와 큰 언니가 내려왔다 변을 당했다고 한다. 동네 아주머니는 이 사고로 나머지 가족들은 예전에 살던 이원군으로 이사했다는 이야기와 함께 어머니와 언니가 묻힌 곳을 알려줬다. “이렇게 돌아가실 줄이야, 난리치며 울었지. 빨리 졸업해서 편히 모시고 싶었는데.” 가족들이 떠나고 이제 머물 곳도 없었다. 그 때 국군이 올라오고 있었다. 할머니는 국군을 뒤따라 올라와 치안 업무를 맡고 있던 형부와 재회할 수 있었다. 형부는 서울에 데려가 공부시켜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 전에 아버님의 허락을 구해야 한다며 이원으로 찾아가 아버지와 동생들을 만났고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그것이 가족들과의 마지막일지 몰랐다.
그렇게 밟은 남한 땅에서 친척집을 전전하며 살고 있던 할머니는 가족을 그리며 눈물로 밤을 지낸 날이 많았다. 힘들고 억울한 일이 있으면 북에 있는 가족이 더욱 그리웠다. 어느날, 휴전이 됐다는 소식이 들렸다. 전쟁이 끝났단 소식은 가족들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휴전이 된지 얼마 되지 않아 이북에 언니를 두고 혼자 나와있던 작은 형부가 찾아왔다. 오랜만에 보는 형부는 난생처음 신어보는 구두와 옷도 사주고, 용돈도 주며 그리움을 달래주었다. 함께 떡국을 먹으며 형부가 이야기를 꺼냈다. “처제, 이제 38선이 막혀 들어갈 수 없네. 나도 언니를 포기하려네. 마지막으로 처제에게 허락을 구하고 싶어.” 형부는 조금이라도 죄책감을 덜고자 마지막으로 할머니를 찾은 듯 했다. “형부, 잘 생각했소. 잘 사시오. 그래도 간간히 소식은 전해주오.” 하지만 그날 이후 형부의 소식조차 들을 수 없었다. 그렇게 또 다른 이산이 시작되고 있었다.
세월이 흘러 문학을 사랑하던 꿈 많은 소녀는 여든을 넘긴 나이가 됐다. 3년 전, 우연히 한 캐나다 동포를 알게 되었다. 그는 영주권자로 여러번 이북을 왕래했다고 했다. 그에게 가족들의 소식을 알아봐달라고 부탁했다. 하루는 낯선 여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캐나다 동포가 전해줬는데 여기 식구가 있다면서요? 좀 알아봤는데 다른 가족들은 다 돌아가셨고, 여동생이 한 명 살아있네요.” 곱분이가 살아있다! 생긴 것이 하도 고와 곱분이라 불리던 동생. 가족들의 소식에 가슴이 아팠지만 곱분이라도 살아있는 것에 안도했다. 이제 세상에 남은 유일한 동기의 끈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의 전화는 걸려오지 않았다.
“그땐 나도 어려서 … 같이 가자는 손도 뿌리쳤고”
그동안 할머니는 이산가족 프로그램 참여, 이산가족 신청, 영상 제작 등 가족을 만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은 백방으로 다했다. 하지만 60년간 해낸 일이라곤 곱분이의 생사 확인뿐이다. 그래도 이게 어딘가 싶어 동생을 다시 만날 날을 희망한다. 동생과 재회하는 날, 동생의 기억 속에 있는 그 예전 언니의 모습이고 싶다. 그래서 요즘은 시민대학에 다니며 수필과 시를 공부하고, 함경북도 합창단에도 참여하고 있다. 비록 겉모습은 많이 변했지만 마음만은 꿈많던 지난 날로 지내고 있는 것이다. 요즘은 10월에 있을 전국민속축제에 참여하기 위해 단원들과 선녀춤을 연습 중이다.
박동열 할머니는 동생 곱분이를 만나면 미안하다라는 말을 전하고 싶다. “그땐 나도 어려서 더 잘해주지 못했어. 같이 가자는 손도 뿌리쳤고.” 할머니는 그저 모든게 미안할 뿐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 떨어질 줄 알았으면 그 때 동생들의 손을 뿌리치지 말았어야 한다는 후회가 든다. 할머니는 사진을 하나 보여주셨다. 빛 바랜 사진 속에는 개구진 남자 아이가 있었다. 이북을 떠날 때 챙겨뒀던 하나뿐인 남동생의 사진으로 할머니가 가진 유일한 가족사진이다. 곱분이와 만나면 이 사진으로 서로를 확인할 수 있을 것 같다.
60년이라는 시간은 흘렀지만, 박동열 할머니는 동생과 만날 날을 기약하며 가슴 속 묻어두었던 19살 소녀의 꿈을 조금씩 펼치고 있다.
선수현 / 본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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