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세히보기 2012년 7월 1일

청소년에게 들려주는 남북한 이슈 | 한국전쟁, 왜 국제전이 되었나2 2012년 7월호

청소년에게 들려주는 남북한 이슈

한국전쟁, 왜 국제전이 되었나


이승만 정부는 탄압받고 있는 북한주민들을 북진으로 해방시키겠다는 의사를 빈번히 밝혔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남한 내의 한국인들과 한국 주재 미국인들은 한국정부와 미국정부가 적절한 대응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북한이 전쟁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심각한 우려를 가지고 있었다.

미국 주도 UN 결의 통해 북한의 남침 제재 결정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주한 미국대사 무초(John Joseph Mucho)가 미국 국무부에 북한의 남침사실을 즉각적으로 보고하였다. 휴가를 보내던 트루먼 대통령과 애치슨(Dean G. Acheson) 국무장관은 급히 워싱턴으로 귀환했고, 이 사실을 UN 사무총장 트뤼그베 리(Trygve Halvdan Lie)에게 전하였다.

이승만도 미국에 있던 장면 대사에게 미국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보내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장면은 즉시 미국 국무부에 메시지를 전달하였다. 한국에 있던 UN위원회도 북한에게 남침을 즉각 중단하고 38도선 이북으로 철수할 것을 요구하였다. 당시 극동군사령관인 맥아더(Douglas MacArthur)도 한반도의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UN 긴급안전보장이사회가 소집되었다. 리 UN 사무총장은 서울 주재 UN사절단의 보고서를 공개했고, 이어 UN 주재 미국대사 그로스만(Ernest Grossman)이 무초 대사의 보고서를 보고하였다.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미국은 당사자인 남한의 입장을 들어야 한다며 장면 대사의 참석을 주장했고, 이에 대해 대만과 중국 문제로 불참한 소련을 대신해 유고슬라비아가 북한의 입장도 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사회는 북한이 UN에서 인정한 합법정부가 아니라는 이유로 유고슬라비아의 요구를 기각, 남한의 장면 대사만 연설을 하였다. 그 결과 UN의 북한 제재방침 결의안은 유고슬라비아를 제외한 찬성 9표로 통과되었다. 미국은 한반도에 조사반을 파견할 것과 한국에 있는 자국민을 비롯한 외국인의 보호를 위해 해군과 공군을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UN의 결의문 발표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무력을 앞세워 계속 남하하였다. 장면 대사는 트루먼에게 재차 도움을 요구했고, 트루먼은 서울이 함락 직전이라는 맥아더의 보고가 들어오자, 마침내 백악관 블레어 하우스에서 두 번째 회의를 소집, 맥아더에게 남한을 도우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UN에서도 북한이 UN의 권고를 무시하자 남한에 군사지원을 논의하였다. 그리고 유고슬라비아의 반대와 이집트, 인도의 기권을 제외한 7개국의 찬성으로 남한에 대한 군사지원을 결정하였다.

전쟁 전만 해도 한반도에 대한 전략적 가치를 낮게 보고 있던 미국정부는 전쟁이 발발하자 단 5일 만에 지상군 파견까지 결정하였다.

미국, 전쟁 발발 5일 만에 지상군 파견 신속 결정

미국의 참전목표는 극동에서 미국이 아시아로 진출하는 데 있어 근거지가 될 일본을 방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1차적으로 남한이 그 완충지대로서 충격을 흡수하는 역할을 해야 했다. 그러나 남한과 일본 모두 군사적으로 준비가 부족한 상태에서 남한이 점령되면 일본의 상황이 불안해질 수 있었기 때문에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긴급 파병이 요구되었다. 당시 미국은 냉전시대 개막과 함께 소련이 서방세계의 의지를 시험해보고자 북한에 지시하여 전쟁을 일으킨 것으로 보았다.

미국은 UN헌장을 준수한다는 명분과 함께 미국의 의지를 소련에게 보여줄 수 있는 기회로 보았다. 이와 함께 미국은 한국을 성공적으로 지켜낼 수 있다면 유럽의 동맹국들에게 어떠한 비용을 치르더라도 동맹국의 안전을 지킨다는 점을 확신시켜줄 것으로 보았다. 이와 같이 한국전쟁은 미국에게 있어서 자유세계의 집단안보체제를 시험하는 첫 번째 사례였다고 할 수 있다.

UE_201207_41
정리/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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