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세히보기 2011년 1월 1일

김호림의 고구려탐방 | 고려장, 옛 운하에 얽힌 이야기 2011년 1월호

김호림의 고구려탐방

 고려장, 옛 운하에 얽힌 이야기

TS_201101_66

고려장 입구

농막 장(庄)은 중국의 촌락 이름에 강가의 돌멩이처럼 흔하게 나타난다. 그렇다고 ‘약국의 감초’처럼 촌락마다 어울리는 건 아닌 것 같다. 고려인들이 살던 마을에 이 글자를 붙이면 자칫 고려 때 노쇠자를 내다 버리던 장례풍습이었다는 고려장(高麗葬)과 헷갈릴 정도이니 말이다.

그런데 정말로 고려장(高麗庄)이라는 마을 지명이 있었다고 한다. 바로 북경 자금성에서 동쪽으로 20㎞ 정도 상거한 통주(通州)의 농촌 마을이다. 지금은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이 이국색채의 마을은 어느덧 흘러간 천년의 세월과 더불어 오랜 옛말이 되고 있다.

통주로 가는 지하철은 출퇴근 시간이 아닌데도 오구작작 붐빈다. 통주는 자금성 변두리를 지나는 장안거리의 동쪽 연장선 끝머리에 있는데, 예나 제나 북경 교통요로의 본색을 드러내고 있다.

고려장은 통주 동남쪽에 위치, 현재로서는 대고력장(大高力庄)이라고 불리는 마을이다. 통주 현지(縣志)는 고려장에 대해 당나라 태종 이세민이 요동에서 데려온 고구려 포로들로 세워진 마을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고려장 최초의 문헌 기록은 약 700년 전의 <원사(元史)>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때 고려장이 사서에 기록될 수 있었던 건 마을 부근까지 이어진 운하의 유명세 때문이었다.

고려장, 고구려 포로들로 세워져

운하는 일찍이 춘추시기부터 굴착되었으며 오늘날의 형체를 갖춘 건 이로부터 약 1,000년이 지난 수나라 시기로 전한다. 이때 동도(東都) 낙양을 중심으로 나뭇가지가 줄레줄레 뻗어나가듯 여러 갈래의 운하계통을 이룬 것이다.

608년 수양제 때 100여 만의 인부를 동원하여 영제거(永濟渠)를 파는데, 이 물길은 낙양에서 북으로 내처 북경의 서남쪽인 탁군(郡)까지 배가 이르게 했다.

대도 물길, 고려장에서 백하(白河)로 흘러

이 운하의 굴착은 수나라가 고구려와의 전쟁을 준비한 군사공정의 일환이기도 했다. 훗날 당나라도 운하를 이용하여 중원에서 군량미를 내처 유주 부근까지 운반하여 집결시켰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고구려 유민으로 이뤄진 고려장은 마을이 설 때부터 원체 운하와 그 어떤 전세의 인연을 맺고 있었는지 모른다.

운하는 고려장 마을이 세상에 나타난 수 백년 후 비로소 북경까지 통하게 된다. 때는 고구려와 전쟁을 벌였던 수나라와 당나라 역시 고구려처럼 벌써 아득하게 흘러간 역사로 되었고, 초원에서 굴기한 몽골족의 말발굽이 온 대륙의 땅을 휩쓸고 있었다.

원나라는 지금의 북경을 대도(大都)로 정한 후 남방의 곡물운수를 위해 대도를 중심으로 남쪽으로 항주까지 직달하는 대운하를 구축했다. 원(元) 29년(1292년), 북경 서쪽의 여러 물길을 도성으로 끌어들인 후 동쪽으로 지금의 통주에서 백하(白河)에 흘러들게 한다. 백하는 북경 북쪽에서 발원한 강으로 통주 동남쪽에서 운하와 이어진다.

마침 이때까지 고려장 부근에는 다른 마을이라곤 없었으며 그래서 이 고장에서 고려장이 유일한 지표물이 되었던 것이다. 대도의 물길이 “고려장에서 백하(白河)에 흘러든다(高麗庄入白河).”고 한 <원사>의 기록은 이 정경을 여실히 보여주는 부분이다.

이 무렵인 원(元) 16년(1279년), 대도에 누리 떼가 끓어 식량난이 생겼다고 한다. 원나라의 해운 관리 장선 등이 동남지역에서 북방으로 곡물을 운송하던 배는 고려장 동쪽에 정박하며 이 때문에 배가 정박한 곳에 ‘장가만(張家灣)’이라는 이름이 생겨난다. 훗날 대운하가 개통된 후 이곳은 수상운수 종착지로 되어 물자 집산지로 거듭나게 된다.

그야말로 ‘굴러 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뽑는 격’, 장가만의 유명세는 금세 파도처럼 옛 마을인 고려장을 말끔히 묻어버리게 된다. 고려장 북쪽의 루자장 마을이 도시화의 물결에 휩쓸려 통째로 사라지는 현실은 바로 옛날의 그 슬픈 장면을 재현하지 않나 싶다. 고려장은 이로부터 약 반세기 후의 명나라 때에는 허울 좋게 중국어 발음만 바뀌지 않은 고력장(高力庄)으로 둔갑한다.

훗날 청나라 때 만주인들은 고력장 북쪽에 작은 마을을 하나 세우며, 고력장과 구분하여 소고력장이라고 부른다. 고려장 마을이 고력장이 아니라 또 난데없는 대고력장 마을로 변신하게 된 건 이때의 일이다.

그런데 대고력장이라는 이름을 만들게 된 소고력장이 또 한번 변신을 한다. 동장(東庄), 서장(西庄)이라는 엉뚱한 이름으로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옛 지명에 담겼던 천년 전의 기억은 그렇게 말끔하게 사라지고 있었다.

불과 10여 년 전 통주 서북쪽에 홀연히 나타난 북경 최대의 ‘코리아타운’이 사그라지던 옛 기억의 불씨를 되살리는 것 같다. 바로 한국인과 조선족이 무려 10만명이나 모여살고 있는 동네 망경(望京)이다. 정말이지 ‘고려장’ 마을이 천년의 시공간을 뛰어넘어 또 자금성 부근에 등장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김호림 / 북경통신원



댓글 0개

의견을 남겨주세요

댓글을 달기 위해서는 로그인 해야 합니다.

좋아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