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세히보기 2015년 2월 1일

명사의 고향을 가다 | “고향 선천 땅에 가면 그곳에 다시 교회를 세우거라” 2015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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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의 고향을 가다 | 차피득 바른마음갖기회 회장(한국필름 명예회장)

“고향 선천 땅에 가면 그곳에 다시 교회를 세우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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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1947년 초여름, 평안북도 선천군 수청면 가물남이라는 작은 농촌마을에서 시작된다.

“피득아, 지금부터 이 아버지가 하는 말을 잘 들어라.” 새벽기도를 다녀오신 아버지 차희선 장로가 엄숙하게 운을 떼었다. 피득 소년은 무릎을 꿇고 아버지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 어머니 정애선 권사는 말없이 손수건으로 눈물만 닦고 있었다. “서울 갈 준비를 하거라. 오늘 하루 종일 준비를 해서 내일 새벽, 출발 하거라. 서울역에 내리면 바로 역 앞에 선천사람이 운영하는 ‘청엽여관’이라는 데가 있을 것이다. 그 여관 주인에게 물어보면 네 삼촌이 살고 있는 곳을 가르쳐 줄 것이다. 우리 선천 사람들은 어딜 가나 뭉쳐있기 때문에 틀림없이 서울에서도 몰려 살고 있을 것이다.”

어머니는 울며 말했다. “여보, 그래도 저 어린 아이가 어찌 혼자서 그 먼 서울을 찾아갈 것이며 그 넓은 서울바닥에서 삼촌을 찾겠습니까? 더구나 우리 피득이는 우리 가문을 이어줄 외아들입니다. 저 어린 아이를 어찌 38선에 보낸단 말입니까? 제가 따라가면 안 되겠습니까?” 하지만 아버지는 매정하리만큼 엄숙하게 어머니의 말을 잘랐다. “어리긴 뭐가 어리단 말이오? 중학교 3학년이 된 열다섯 살이 어찌 어리단 말이오? 나는 피득이보다 한 살 더 많았던 열여섯 살에 왜놈들에게 잡혀 온갖 고문을 당하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3년간이나 옥살이를 하였소. 하나님께서 지켜주시면 문제없을 거요. 열다섯 살이면 이미 장가를 들어 아이 하나를 보고도 남을 나이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기다립시다.”

열다섯 살 소년, 고향 떠나 서울에서 기업인으로 성장

이렇게 해서 선천 상업학교 3학년에 다니던 열다섯 살 소년, 차피득은 그 다음 날 새벽 고향 선천땅을 떠나 기차를 타고 황해도 청단까지 갔다. 거기서부터는 안내인을 따라 38선을 넘고 서울역으로 가는 기차를 탄 후 무사히 서울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일제강점기부터 북한사람들은 선천을 한국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렀다. 선천읍내의 인구가 1만명 쯤 되었고, 선천군의 인구가 또 1만명 쯤 되어 선천군 전체의 인구를 통상 2만명으로 잡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 기독교인들이 1만 5천명을 넘었다고 한다. 선천읍내에만 동서남북 네 개의 교회가 교세를 자랑하였고, 읍내 한가운데에는 중앙교회가 있었다. 선천군의 중심도시 선천읍내와 8개면이 모두 교인으로 북적댔다.

교회를 이끄는 분들도 대단한 분들이었다. 나중에 한국교단의 원로가 되는 한경직 목사가 그 시절 선천북교회의 전도사로 활약하고 있었고, 선천읍내에는 유명한 맥큔 선교사가 신성중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다. 정주사람인 백낙준 같은 이는 선천읍내에 있는 신성중학교에 입학하여 열렬한 크리스천이 되었다. 그는 건국 이후 연희대학(지금의 연세대)초대 총장이 되었으며 후에 문교부 장관이 되기도 하였다. 광복 후 서울대학교 3대 총장이 되었던 장이욱 박사도 선천사람이었다. 소설 ‘순애보’를 써서 일제시대 춘원 이광수와 함께 조선의 문학계를 흔들었던 박계주 작가, 초대 재무부 장관이었던 차균찬, 건국 초기의 내무부 장관이었던 이익흥 역시 선천사람이다. 광복 후 한국의 기독교계를 이끌었던 김창인 목사도 선천출신이다.

북한 지도를 펴놓고 보면 평양을 지나 신의주로 향하는 평의선이 평안남도를 벗어나 평안북도로 들어서면 제일 먼저 정주와 곽산을 지나게 되고 그 정주, 곽산을 지나고 나면 바로 선천이 나온다. 별로 크지도 않은 선천이 왜 한국의 예루살렘이 되었을까? 아무래도 개화기 때 제일 먼저 평안북도 지역에 들어와 오지나 다를 바가 없는 선천 땅에 신성중학교라고 하는 미션스쿨을 세운 선교사 맥큔의 덕이 클 것이다. 맥큔 덕분에 머리 좋고 신앙심 깊은 젊은이들이 선천 땅에 몰려들었고 그 사람들이 신성중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미국유학을 다녀왔다.

앞에 말한 백낙준, 장이욱 같은 분들이 미국 유학파였고, 기독교계에서 활동한 한경직 목사도 미국 유학생이었다. 모두 미국 유학을 다녀오고 예수를 열심히 믿었기 때문에 평안북도 바닷가에 있던 선천 땅이 예수 믿는 사람들의 성지가 되었고 일제강점기에는 일제에 반항하여 민족주의를 부르짖는 사람들이 유난히 많았기 때문에 선천은 애국자의 고장이기도 하였다.

차피득 회장(오른쪽)은 2013년 4월 29일 한국신문방송기자연맹과 민주신문이 주관한 제12회 대한민국을 빛낸 한국인물대상 ‘사회봉사 공로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차피득 회장(오른쪽)은 2013년 4월 29일 한국신문방송기자연맹과 민주신문이 주관한 제12회 대한민국을 빛낸 한국인물대상 ‘사회봉사 공로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선친은 독립운동가 … ‘105인 사건’으로 옥고 치러

선천 소년 차피득의 아버지 차희선 장로도 그런 선각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차희선은 신성중학교 4학년 때 2대 총독인 데라우찌가 신의주를 방문할 당시 암살하려고 했다고 하는 이른바 ‘105인사건’에 연루되어 일제의 모진 고문을 받았다. 사실상 그는 중학생 신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근대사에 나오는 독립단체 ‘신민회’의 비밀당원이기도 하였다. 그는 의연하게 견뎠고 재판을 거쳐 3년형을 받은 후 악명 높은 서대문형무소에서 3년형을 꼬박 치렀다. 그리고 그는 감옥문을 나온 후 곧바로 미국 유학길에 올라 켄터키주의 에즈베리 신학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귀국 후에는 선천의 숭신학교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고향 가물남에 교회를 세워 장로로 열심히 섬겼다. 살림도 넉넉하여 가물남에서는 가장 농토를 많이 가지고 있는 부농으로 이웃사람들을 따뜻하게 챙겨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해방이 되고 북한 땅에 공산정권이 들어서자 더 이상은 고향땅을 지키고 살아가기가 어렵게 됐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붉은 완장을 차고 선천 땅을 휘젓고 다니는 공산당원들은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 이른바 ‘예수쟁이’들을 제일 미워하였다. 그리고 땅을 많이 가지고 있는 부농들을 지주라고 부르면서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지주에, 기독교신자에, 미국 유학생 출신이었던 차희선 장로는 결국 조상 대대로 살아왔던 선천 땅을 떠나기로 마음먹고 외아들인 차피득, 열다섯 살짜리 중학생을 선발대로 서울에 내려 보냈던 것이다.

“선천사람들이 어디 모여 사느냐고?” 목소리가 크고 살집이 좋은 선천댁 아주머니가 피득 소년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 저기 큰길이 보이지? 저 길이 충무로라는 길인데 저 길로 쭉 따라가거라. 그래서 그 길이 끝나는 언덕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곧장 올라가거라. 그러면 거기에 장춘단 공원이라는 곳이 나오는데 그곳에 가면 천막촌이 있단다. 선천사람들이 득시글득시글 하지. 피안도말을 주고받으며 신나게 떠들 것이다. 아마 그 속에 너희 삼촌도 계실 거야.”

피득 소년은 서울역 앞의 청엽여관에서 선천댁이 가르쳐주는 대로 장춘단 공원으로 갔다, 아닌 게 아니라 그곳에는 피안도말을 마음껏 쓰는 선천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어렵지 않게 작은아버지 차희봉을 만날 수 있었다.

“아니, 너 혼자 왔네? 아직 38선이 느슨한 모양이구나야? 어서 오라우. 하지만 너한테 줄 밥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야.” 삼촌은 열 명에 가까운 조카들과 친인척들을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에 북에서 내려 온 장조카를 달갑게 맞이하지 않았다. 우선 먹을 것이 문제기 때문에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차피득은 숙모가 내주는 보리밥 한 그릇을 먹고 정신없이 자고 난 후 본격적인 서울 정찰길에 올랐다. 혼자 걸어서 남대문 구경도 하였다. 남대문 옆에는 미군부대에서 나온 온갖 군수품을 파는 양키시장이 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그 양키시장에서도 억샌 피안도말투들이 단연 앞서 있었고 간간이 함경도 사투리도 들려왔다. 모두 활기차고 삶의 의욕이 넘쳐있었다. 그리고 그해 겨울을 보낸 후 혼자 38선을 넘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아버지, 어머니 앞에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아바지, 내려가십세다. 살 수 있습네다. 모두 다 열심히 살고 있습네다.” 어머니가 울면서 말했다. “하지만 여보, 저 아까운 농토를 어찌 버리고 갈 수 있어요?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농토가 아닙네까?” 아버지가 단호한 어투로 잘랐다. “지금 농토가 문제요? 38선이 잠기고 있소. 완전히 닫히기 전에 빨리 내려가야 하오.”

차희선 장로는 교회로 달려갔다. “목사님, 저희와 함께 내려가십시다. 지금 내려가시지 않으면 영영 못가십니다.” 키가 작고 몸은 왜소하지만 눈빛이 형형하고 다부진 몸매로 불꽃같은 설교를 하시는 이성주 담임목사는 결연히 말했다. “양떼들을 두고 어찌 저만 떠나겠습니까? 하지만 장로님은 가셔야 합니다. 놈들이 장로님의 행방을 찾고 있습니다. 어서 떠나세요. 죄가 있다면 믿는 죄밖에 없는 저를 저자들이 어찌하겠습니까? 어서 떠나시라우요.”

1948년 이른 봄, 환갑이 되었던 차희선 장로와 정애선 권사, 그리고 외아들 차피득은 남부여대(男負女戴)하여 38선을 넘었다. 차희선 장로의 예감대로 이미 38선이 닫히기 시작하여 철원 계곡을 천신만고 끝에 넘어 경기도 포천 피난민수용소에 닿았다.

선천 출신 차피득 소년과 그 아버지 차희선 장로의 드라마는 이쯤에서 정점을 찍고 자유 대한민국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38선을 넘어온 지 1년 반이 되던 1950년 6·25전쟁이 터졌다. 소년 차피득은 방위군으로 군복을 입고 제주도 훈련소로부터 최전방 부대까지 자유대한을 지키기 위해 젊음을 바쳤다. 아버지 차희선 장로는 선천군민들이 정착하였던 용산의 해방촌에 신흥교회를 세우고 원 없이 하나님을 섬기다가 지난 1972년 소천하였다. 눈을 감기 전 차희선 장로는 외아들 피득의 손을 잡고 말했다. “우리는 6·25가 나기 1년 반 전에 38선을 넘고 평생 주님을 섬긴 덕에 이렇게 큰 축복을 받았다. 네가 만약 통일을 보고 고향 선천 땅에 가게 되거든 꼭 우리 고향 마을을 찾아보고 그곳에 다시 교회를 세우거라.”

사비로 대한민국 홍보 책자 발간하기도

아버지와 함께 열여섯 살에 38선을 넘고 열아홉 살에 6·25를 맞으며 구두닦이, 미군부대 하우스보이, 노점상을 전전하였고 전쟁 중에는 국민방위군으로 나갔다가 육군 졸병생활을 하고 최전방까지 달려갔던 선천사람 차피득은 2015년 현재, 83세가 되었다. 서울 강남의 요지라고 할 수 있는 예술의전당 앞 번듯한 건물의 주인이자 대한민국 인쇄산업의 중추를 이루는 한국필름, 가남개발, 비엠솔루션 등의 5개 기업군을 거느린 회장이 되었다. 열다섯 살의 어린 나이로 38선을 넘은 이래 칠십년에 이르는 장구한 세월 동안 차피득은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를 입었다. 그리고 자유대한의 시장경제체제와 민주주의에 가장 큰 혜택을 누린 셈이다. 그래서 팔순을 앞두고 그는 국가의 고마움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개인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보장받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감사하게 되었다.

삼성의 텔레비전과 반도체가 어떻게 일본을 제치고 세계의 일등제품이 되었으며, 한국의 포스코가 신일본제철을 제치고 세계 제일의 철강회사가 되었을까…. 이런 것들을 하나하나 챙기다 보니 어느새 그의 손에는 <미꾸라지 진짜 용 된 나라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홍보책자 하나가 생기게 되었다. 차피득 회장은 무작정 이 책자를 나누어 주기 시작하였다. 한 번 읽어본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이고 ‘우리 모임에도 보내주세요.’ ‘아니 제가 이 책자를 보급하고 전파하겠어요.’하며 나서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지금 어림잡아 80만부가 퍼져나갔다. 선천사람 차피득은 어느새 자비를 들여 대한민국을 홍보하고 다니는 관직 없는 홍보대사가 되었다.

한국의 예루살렘 선천사람 차피득은 오늘도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미꾸라지가 진짜로 용이 된 나라입니다.”를 소리 높여 외치고 있다. 그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나라의 고마움을 외국사람들과 젊은이들에게 전하는 일에 진력하고 있다. 하지만 그에게도 아직 이루지 못한 일 한 가지가 남아있다. 그것은 고향인 평안북도 선천군 수청면 가물남을 찾아 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김광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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