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세히보기 2015년 5월 1일

명사의 고향을 가다 | “북한문제는 프로가 다뤄야합니다” 2015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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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의 고향을 가다 | 강인덕 전 통일부 장관

북한문제는 프로가 다뤄야합니다

1950년 6·25전쟁이 터졌을 때 강인덕 소년은 평양제일고교에 다니고 있었다. 일제 강점기, 서울 이북의 최고 명문 평양고보로 불렸던 그 학교의 졸업시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막상 전쟁이 터지고 전시체제가 되자 성급한 동급생들은 손을 들고 자원해서 인민군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방학이 시작되던 8월이 되자 일제 강점 말기에 언뜻 보였던 미 공군의 B29가 평양 상공에 나타나 맹렬한 폭격을 하기 시작하였다. 아버지 강기선 옹은 식구들을 뒷산에 숨겼다. 6남매의 막내였던 18세의 인덕이가 혹시나 군에 징집될까 싶어 더 깊은 골짜기에 숨으라고 했다. 9월 중순이 되자 미 공군의 폭격은 더욱 심해졌고, 붉은 군대들은 허둥대기 시작하였다. 겨울이 일찍 찾아오는 평양에 가을바람이 불기 시작하던 10월 중순이 되자 평양시내의 주요 건물이 비기 시작하고 무엇인가를 잔뜩 실은 차량들이 야간에 북쪽으로 도주하기 시작하였다. 강인덕 소년의 온 식구는 산허리쯤에 숨어서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다. 10월 하순이 되자 평양시내에 태극 깃발이 휘날리며 산 속에 숨어 있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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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인재, 남북문제 전문가로 성장하다

평양 고교생들이 어깨에 태극기를 두르고 치안대를 결성하여 평양시내의 질서회복에 앞장섰다. 덩치가 크고 우등생이었던 강인덕은 당연히 치안대가 되었고 미군과 국군의 차량들이 북진을 계속할 때 네거리에 서서 교통신호를 하고 폭격으로 어지럽던 평양 뒷골목을 청소하는 일을 지휘하였다. 그 때 아버지가 달려와 말했다.

“인덕아, 어물거릴 때가 아니다. 너는 키가 크고 누구에게든 눈에 띄기 때문에 여기 있으면 군대감이다. 어서 짐을 꾸려 남으로 내려가거라. 네 큰형은 제주도에 가 있다고 하고 셋째 형이 서울에 있다고 하니 우선 서울로 내려가거라. 서울에 가면 서울 복판에 있는 영락교회를 찾아가거라. 영락교회에 가면 신의주 출신 한경직 목사님이 계시고 그 교회에 가서 네 형 이름을 대면 누구든 널 네 형 집으로 안내해 줄 것이다. 요즘에는 군수물자를 실어 나르는 기차가 다니고 있다. 빨리 역포로 가서 기차를 타거라. 기차는 서울 외곽에 있는 수색역까지 간다고 하니까 네 그 튼튼한 다리로 씽씽 걸어서 영락교회만 찾아가거라.”

강인덕 소년은 아버지 말씀대로 남행을 준비하였다. 어머니 김병기 권사는 막내아들 허리춤에 미숫가루 전대를 채워주고 룩색에는 겨울에 입을 내복과 비상약 몇 가지를 챙겨주며 눈물로 기도해주었다. “주님, 우리 막내를 지켜주소서. 우리 내외가 6남매 막내로 제일 아끼던 아들입니다.”

그러나 강인덕이 서울에 가서 아버지와의 약속대로 영락교회를 찾아가고 셋째 형을 만나 장충단 공원 옆에 방 두 칸짜리 보금자리를 마련해놨을 때 쯤 전세가 역전되고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쓰나미처럼 몰려오는 바람에 평양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누이들은 눈보라를 뚫고 서울로 황황히 내려왔다. 다행히 인덕이네 집은 평안남도 대동군 용연면 소리라는 대동강 이남의 지역에 위치해 있었고, 그 부서진 대동강다리를 넘지 않아도 남행을 할 수가 있어 무사히 식구들은 합쳐질 수가 있었다. 온 식구가 서울에서 재회를 한 것도 순간이었고 해일처럼 밀려오는 중공군을 피해 다시 한강을 넘어 대구까지 정신없이 달려갔다. 1950년 크리스마스를 대구제일교회에서 보내고 그 다음 날 강인덕은 군에 입대하였다. 군 책임자는 입대원서와 강인덕의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학도병으로 참전하겠다 이거지? 그 뜻이 좋다. 하지만 너는 평양고보를 다니던 인재다. 이 전란통에 다치면 안 되니까 정훈병과로 들어가 전후 복구사업에 힘을 쏟거라.”

이렇게 해서 학도병 정훈부대에 배치가 되었고 의정부, 동두천, 연천 일대의 전방지역 학교를 세우는 일과 부서진 교회를 복구하는 일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1953년 전쟁이 끝나고 나자 병무청에서는 학도병으로 근무한 경력을 인정할 수 없다고 하면서 청년이 된 강인덕에게 정식 징집영장을 보내왔다. 이번에는 강인덕도 오기가 생겨 가장 훈련이 세다고 하는 해병대에 지원했고 그것도 장교 코스를 지망하여 거뜬히 합격하였다. 해병대근무를 성실히 마친 뒤에 외국어대학교 러시아과에 들어갔다. 왜냐하면 해방 후 평양에서 가장 친근하게 들었던 외국어가 러시아어였고, 평양학교에서도 러시아어를 익혔기 때문에 러시아어를 선택하였던 것이다. 그런 그의 결정은 훗날 러시아어 전공자가 부족했던 남한에서 북한문제 전문가로 일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게 된다.

4·19혁명이 일어나고 학생세상이 되면서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득의만면했던 학생들은 철없이 판문점으로 달려가 ‘평양의 학생들이여, 남으로 내려오라. 우리와 판문점에서 회담을 하자.’라고 외칠 때 강인덕 학생은 깊은 한숨을 내리쉬게 된다. ‘남쪽에서 북에 대한 공부를 전혀 하지 않고 공산주의에 대해 백지와 같은 대학생들이 저렇게 순진한 구호를 외치는 것을 바라보면 북쪽의 공산당들이 얼마나 기뻐할까….’ 강인덕의 걱정은 현실이 되어 나타났다. 5·16군사정변이 났던 것이다. 5·16이 터지고 군정이 시작될 때 문교부 장관을 맡았던 문희석 대령이 강인덕을 찾았다. 군의 정보망이 사람을 제대로 찾아냈던 것이다. 초면인 문희석 대령은 청년 강인덕의 파일을 뒤지며 이렇게 말했다.

“지금 우리에게는 공산주의를 제대로 아는 전문가가 필요해. 자네는 평양고보를 다니면서 러시아어를 배웠지? 그럼 맑스 레닌의 텍스트를 이미 봤겠군. 러시아어로 봤나, 뭘로 봤나?” 강인덕이 대답하였다. “물론 평양고보에 다닐 때 러시아어로 쓰여진 원전을 본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양이 방대하여 전문을 탐독할 수는 없었습니다. 빨리 보려면 일본어 번역판을 봐야 합니다.” 그러자 문희석 장관이 되물었다. “일본어 번역판만 구해주면 공산주의 서적을 다 읽을 수 있단 말이지? 좋았어.”

그러고 나서 문희석 장관은 강인덕을 을지로 입구에 있는 치안본부에 근무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치안본부가 압수한 공산주의 서적을 마음껏 보도록 하였다. 치안본부 지하실에는 시중에서 압수하고 심지어는 지리산 빨치산들로부터 빼앗아 쌓아 두었던 붉은 책들이 산더미를 이루고 있었다. 강인덕은 그때부터 붉은 책들 속에서 공산주의 사상을 더듬어 나가며 우선 그들이 쓰는 용어를 익히고 사상의 줄기를 탐구해 나갔다. 한때 빨치산 운동의 선봉에 섰다가 전향한 김창순 씨가 청년 강인덕의 스승이 되어 주었고 일제 강점기부터 사회주의사상의 선봉에 섰었던 이동화 선생이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핵심을 알려주었다. 물론 공산주의의 이론과 그 사상이 가지고 있는 엄청난 오류와 허구성도 함께 깨우쳐주었다. 그 무렵 중앙정보부가 세워졌고 강인덕은 시험을 치러 사무관으로 합격하여 초대 북한과장이 된다.

22년 만의 평양 방문 … “강군, 날 모르겠나?”

1972년은 숨 가쁜 한해였다. 그 해 5월, 이후락 정보부장은 분단 이후 최초로 DMZ를 넘어 평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의 메시지를 직접 김일성 주석에게 전했다. 그리고 나서 7·4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금방이라도 한반도가 통일될 수 있을 것 같은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남북조절위원회라는 것이 만들어지고 남쪽의 대표는 이후락이 맡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 해 10월에는 유신이 터지고 겨울 공화국이 오는가 싶더니 남북조절위원회가 평양에서 열리게 되었다. 그 해 11월 2일, 이후락 남북조절위원회 남측 위원장, 장기영 부총리, 최규하 대통령 특보, 정홍진 적십자 대표, 그리고 중정의 강인덕 북한과장이 판문점 북쪽에서 헬기를 탔다. 북쪽 헬기는 잠시도 머뭇거리지 않고 곧장 평양으로 향하였다. 그때 그 헬기를 탔던 남측 대표들은 헬기가 도무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감도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평양출신 강인덕은 나무 하나 없이 벌거숭이가 된 북한의 산하를 바라보며 만감에 젖어 있었다.

헬기는 평양 남쪽의 역포역 공터에 내렸다. 강인덕은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하였다. 왜냐하면 헬기가 내린 바로 그곳이 강인덕 소년이 평양고보에 다닐 때 방학 때가 되면 형들과 함께 꿩사냥을 하던 마을 앞 둔덕이었다. 6·25 전까지만 해도 숲이 제법 우거져 있었고 꿩들이 곡식 낟알을 주워 먹기 위해 황금물결 치는 그 들판과 산마루에 자주 내려왔기 때문에 소년들은 말꼬리로 꿩을 낚아채는 옹이를 만들어 신나는 꿩사냥을 즐겼었다. 그런데 그날 헬기가 요란한 회오리를 일으키며 그 역포 들판에 내릴 때 주변 산하는 나무 하나 없이 모두 메말라 있었고 멀리 보이는 회색 농가의 지붕 위에는 초라한 고추덩이들과 강냉이 몇 알이 해바라기를 하고 있을 뿐이었다.

일행은 대기하고 있던 검은 세단에 분승하여 시내로 들어갔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차들은 옛날 강인덕 소년이 가방을 매고 다니던 평양고보 근처로 가고 있었다. 차가 멈추고 나서야 알게 됐지만 당시 총비서로 불리던 김일성 주석이 집무를 하던 수상청(首相廳)이 옛날 평양고보 자리 바로 옆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김일성 동상이 높이 서 있는 그 언덕은 바로 그 옛날 평양신학교가 자리 잡고 있었던 터였다. 일제 강점기에 평양신학교에 다녔던 주기철 목사 같은 분이 신사참배를 끝가지 거부하다가 평양감옥에서 순교하였는데 바로 우상숭배를 정면으로 반대했던 주기철 목사의 모교 평양신학교 그 자리에 어마어마한 김일성 동상이 서 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남북조절위원회 회의는 모란봉초대소에서 열렸다. 강인덕 북한국장의 바로 앞자리에는 북의 카운터파트 노동당대남공작책임자가 앉았다. 명패에는 이경석이라는 이름이 쓰여져 있었다. 회의를 하는 내내 강인덕 국장은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북의 카운터파트 얼굴이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라는 것 때문에 신경이 쓰였다. 회의가 끝나갈 무렵 김일성 총비서가 걸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남의 대표 중에는 우리 북조선 출신이 안 계시죠? 나는 그렇게 보고를 받았는데?”

강인덕 국장이 나서며 말했다. “저는 이곳 평양출신입니다. 바로 저쪽에 있었던 평양고보를 다녔습니다.” 김일성이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그러면 나를 보기도 했다는 말이오?” 강인덕 국장이 대답했다. “제가 평양제일고교로 불리던 저 학교에 다닐 때 총비서께서 바로 저희 학교에 방문하신 일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1948년 4월 이곳 평양에서 남북연석회의가 열렸을 때 총비서께서는 자랑스러운 우리 평양고교를 남측에서 올라온 대표들에게 보여주시기 위해 앞장 서 오셨습니다. 그때 강당에 모였던 저희들에게 남측 대표들을 이렇게 소개하셨었죠. ‘제일 앞에 서 계신 분이 애국지사 김구 선생, 그 다음에 서 계신 분은 항일시대 소설 임꺽정을 썼던 대작가 홍명희 선생, 그리고 그 뒤에 서 계신 분이 한글학자 이극로 선생이외다. 젊은 여러분들은 이런 애국지사들을 열렬히 환영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그때 뜨겁게 박수를 쳐 드렸죠.”

김일성은 놀랐고 일행은 식당으로 들어갔다. 식당에서 수저를 들기 전에 앞자리에 있던 북의 파트너가 은근한 목소리로 강인덕 국장에게 말했다. “강군, 날 모르겠나? 나 이경석이야. 평고 1학년 담임이었잖나.” 강인덕 국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큰소리로 말했다. “선생님, 먼저 못 알아 뵈어서 죄송합니다. 제 큰절을 받아주십시오. 제가 평양을 떠난 지 올해로 꼭 22년입니다. 22년 만에 뵙는 스승님께 큰절을 올려야지요.” 식당 안에 있던 김일성 이하 모든 이들이 놀랐고 강인덕 국장의 큰절 덕분에 아주 좋은 분위기로 회의는 무사히 끝날 수 있었다.

“북과 대화하려면 어떤 자세가 가장 중요합니까?”

이후 북한전문가 강인덕은 1970년대 말에 극동문제연구소를 열고 소장과 이사장으로 활동하면서 역대정권이 남북문제를 정권차원의 문제로 다루거나 정권의 치적으로 삼으려고 서두르거나 감상적인 자세로 처리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특히 문민정부 출범시기에 김영삼 대통령이 북의 김일성 주석과 회담을 하는 것이 기정사실화 됐었는데 김일성 주석의 사망으로 회의는 무산되었다. 그런 과정에서 우리측이 너무 치밀하지 못하게 준비하거나 즉흥적인 자세로 북을 만만히 보는 태도도 노출되었다. 이런 상황을 보면서 북한전문가 강인덕은 나름대로 혼자서 깊은 걱정을 하였다.

어느 날 김대중 총재가 아태재단에서 만나자고 하였다. 그는 아주 성실한 학생처럼 진지한 자세로 물었다. “북과 대화하려면 어떤 자세가 가장 중요합니까?” 강인덕은 간결하게 대답하였다. “준비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들은 프로입니다. 그들을 제대로 만나려면 우리도 프로를 보내야합니다. 북한문제는 전문가가 다루어야합니다.” 김대중 총재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고 DJ정권이 들어서면서 남북문제를 다루는 통일원이 통일부로 바뀌게 되었다. 장관이 직접 통일문제를 다루는 통일부를 세우고 그 첫 수장으로 평양출신 강인덕이 장관이 되었던 것이다.

1998년 3월, 6·25가 터지던 1950년 평양외곽에 있던 역포역에서 서울로 가는 기차를 탔던 평양소년 강인덕이 38년 만에 대한민국 초대 통일부 장관이 되었던 것이다.

작가 김광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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