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인 남한사회 정착기 | “김일성 회고록 학습하는 것과 뭐가 달라요?” 2014년 10월호
탈북인 남한사회 정착기 63 | “김일성 회고록 학습하는 것과 뭐가 달라요?”
술자리에서 “위하여!”를 외치는 것은 당연지사. 처음엔 낯설었지만 이젠 아무렇지 않게 필자도 “위하여!”를 외친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소란스럽게 “위하여!”를 외칠까. 그것이 궁금해 물었더니 군부정권 시절의 군대문화가 잔류한 것이라 했다. 민주화가 정착된 지 언젠데 아직도 군대문화가 사회에 남아있다니, 군부정권은 싫었지만 “위하여!”는 역동적이고 멋져서 마음에 들었을까? 사회각계에 군인출신이 많이 진출해 리더로 활약했던 사정도 있을 것이다. 또 대한민국 남자라면 당연히 군복무를 해야 하는 만큼 군대에서 몸에 밴 군대문화를 사회에 갖고 나오기 마련이다.
남한 군대식 회사문화, 억울하면 출세하라?
군대문화의 흔적은 비단 술자리에서 외치는 “위하여!”를 통해서만 아니라 다른 데서도 찾아 볼 수 있었다. 회사생활이 그렇다. 군대에서 고참, 신참을 따지는 것과 흡사하다. 신입사원을 대하는 태도나 신입병사를 대하는 태도가 유사하다. 신입사원은 최소한 새 후배가 생길 때까진 ‘천대’를 감수해야 한다. 버티지 못하면 회사를 그만두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속으론 죽을 정도면서 겉으론 유쾌한 척 하며 선배로 불릴 날까지 버텨본다. 그러다 정말 선배가 되고 상사가 되면 지난 시기에 그렇게 자기를 괴롭히던, 죽이고 싶도록 밉던 선배나 상사의 모습을 답습한다. 이것이 계속 악순환 된다.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식이다.
대기업에 근무하는 탈북자에게 대기업 상황을 들어보니 그곳은 완전히 독재사회 같았다. 직원 전체가 군대와 같은 서열과 무조건적인 상명하복에 스트레스가 쌓이는 곳이란다. 그가 처음 입사했던 날 부서에 출근하니 자기 책상조차 없더라고 했다. 온갖 잔심부름만 했는데 굴욕감에 당장 그만두고 싶은 생각이 하루에도 몇 번씩 났다고 한다. 몇 달이 지나서야 책상도 생기고 컴퓨터도 놓아주더라는 것이다. 그는 자기 직장이 다른 재벌기업에 인수되었던 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그래도 나는 우리가 다른 기업에 인수되면 상황이 좀 낳아지지 않을까 싶어 은근히 기대했죠. 그런데 오히려 더하던데요. 제일 먼저 내려온 지시가 기업총수의 청소년 시절이 담긴 회고록을 학습하라는 거였어요. 기분이 정말 더러웠어요. 이런 말도 안 되는 학습과제를 주는 것은 북한에나 있을 법한 일이라 못하겠다고 거절했죠. 주변에서 그러다 회사에서 잘린다고 걱정했어요. 20년 가까이 근무하며 괜찮은 직위까지 올라왔는데 정말로 잘린다면 낭패인건 맞죠. 하지만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어요. 결국 제가 반발한 사실이 윗선에 알려졌고요. 당장 시말서를 쓰라던데요. 그래서 항의했죠. ‘이건 북한에서 김일성 회고록 학습을 강요받던 식이다. 그게 싫어 자유를 찾아왔는데, 다른 직원들에게 통할지 몰라도 나는 못한다.’고 우겼죠. 이게 회장님 귀에 직접 들어갔다고 했어요. 회장님이 ‘도대체 어떤 녀석인가’ 하고 물었는데 탈북자여서 그렇다고 하니 ‘북에서 왔다면 그럴 수도 있지. 지금껏 일도 잘했다니 그냥 넘어가라’고 해서 무사했어요. 이럴 때 보면 남한은 회사 밖에서 보면 민주주의가 분명하고 자유는 넘쳐 보이는데 회사에만 들어가면 군대라 할지, 독재라 할지… 북한 직장보다 더한 독재에요. 남한 회사는 우리가 북한에서 말하곤 하던 ‘탄자의 기쁨, 깔린 자의 설움’이란 말이 딱 맞는 곳이죠.”
그의 말을 듣고 북한과 비교해 봤다. 북한 회사문화도 권위주의다. 남한 기업과 달리 북한은 직장에 행정조직과 당 조직이 복선으로 깔려있다. 그만큼 직원이 받는 통제와 압박이 크다. 하지만 역으로 행정과 당이 서로 견제하기도 하므로 그 틈바구니에서 직원이 누리는 ‘안정’도 있다. 말하자면 당과 행정이 서로 무리한 독단을 부리지 못하도록 견제되기 때문에 남한 회사와 다른 환경이다. 그래서 선군정치를 한다지만 사회에 군대문화가 서식하기 어렵다.
북한에선 오히려 군대식에 질색하는 경우 많아
북한에선 군대 때 습성을 사회에 나와서까지 지속하는 사람을 두고 사회물정을 모르는 ‘석기(돌머리)’라고 조롱한다. 물론 노동당은 군인들에게 제대하더라도 마음의 군복만은 영원히 벗지 말고 사회에 나가서도 ‘혁명적 군인정신’으로 생활하라고 독려한다. 그러나 사회현실에 정작 부닥치면 그것이 얼마나 비현실적인가를 실감한다. 오히려 군대도 군사행정과 정치조직이 병행하는 만큼 사회문화의 영향이 군대에 옮아갈 소지가 크다. 일부 부대를 두고 “저것도 군대야?”하는 소리를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다.
어쨌거나 필자의 생각엔 곳곳에 잔류해 있는 군대문화가 효율성을 높이는 데 기여할 수는 있겠다 싶다. 하지만 그것으로 비롯되는 인격훼손과 스트레스 때문에 삶에 향기가 없어진다면 문제가 있는 문화다. 통일 후 기업들이 북한에 진출하면서 이런 문화를 그대로 적용할 경우 어떤 시행착오가 생길지도 의문이다. 혹자는 선군정치를 하던 곳이라 별 문제 없을 것이라 하겠지만 오판일 가능성이 훨씬 크다. 오히려 북한주민이 선군정치에 지쳐 군대식에 질색한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도명학 / 망명북한작가ㅏ펜(PEN)센터 사무국장
댓글 0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