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스 |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재선…돌아본 유엔과 한반도 2011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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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재선…돌아본 유엔과 한반도
대한민국에게 국제연합, 곧 유엔(UN)은 정부 수립 때부터 깊은 관련을 맺고 오늘날까지 함께 하고 있는 국제기구이다. 사실 정부 수립과 북한의 남침 격퇴 및 전쟁 재발방지, 그리고 경제성장과 관련하여 우리는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로부터 많은 지원과 격려를 받아왔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치며 이 경험을 바탕으로 국제사회의 평화와 번영에 동참하는 위치로 성장하였다. 특히 반기문 전 외교통상부 장관이 유엔 사무총장이 되면서 유엔은 우리에게 더 가까워지게 되었고, 우리 청소년들은 보다 큰 꿈을 갖게 되었다. 그만큼 국제사회의 발전에 대한민국이 기여해야 할 책임도 커지게 되었다.
유엔, 치열한 남북 체제경쟁의 장(場)
1948년 정부 수립, 곧 분단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 한국의 대유엔 외교는 국제무대에서 북한과 경쟁하며 통일 환경을 조성하는 방향성을 갖고 전개되었다. 대한민국 정부의 정통성을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외교로 우리의 유엔외교는 출발하였다.
1948년 5월 10일 총선거,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있었다. 같은 해 12월 12일 유엔 총회는 총회 결의 제195(Ⅲ)호를 찬성 48, 반대 6, 기권 1로 채택해 대한민국 정부가 합법정부임을 선언하였다. 이처럼 유엔은 대한민국의 건국 및 정부 수립의 정통성을 인정해 줌으로써 대한민국이 발전해나갈 기틀을 마련해주었다.
그러나 유엔의 대한민국 승인의 기쁨도 잠시, 북한의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한국의 유엔 외교는 전쟁을 중단시키고 평화를 회복하는 집단안보외교로 전환하였다.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 주도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북한의 적대행위 중지(S/1501), 대한(對韓) 원조 제공(S/1511), 미국 주도의 통합사령부 설치(S/1588) 등에 관한 결의안을 잇달아 통과시켰다.
당시 우리 정부는 미국 정부와 긴밀한 협의를 통해 집단안보외교를 전개하였다. 그와 동시에 전쟁 기간 중 유엔 총회는 한국재건단 설치, 중국 및 북한에 대한 금수조치를 결의하였다. 우리 정부는 1951년 11월 6일자로 임병직 씨를 초대 유엔 옵서버(대사)로 임명하고 뉴욕에 대한민국 주유엔 옵서버 대표부를 설치하였다.
전쟁이 휴전을 맞자 남북은 더 깊어진 적대감 속에서 대내외적으로 치열한 체제경쟁에 돌입하게 된다. 한국문제를 다시 유엔에 상정시키거나 상정하지 않도록 하는 모순된 외교정책도 체제경쟁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졌다. 휴전협정과 유엔 총회 결의 제711(Ⅶ)호에 따라 개최된 제네바 정치회담이 결국 결렬되자 한국문제는 다시 유엔 총회에서 다뤄지게 되었다.
이때 우리 정부는 유엔을 통해 평화통일을 추구하고 친북 국가들의 북한 대표 초청 시도를 성공적으로 저지해나갔다. 그러나 1960년대 들어 비동맹국가들의 유엔 진출이 본격화 되면서 한국문제를 둘러싼 유엔에서의 논의 구도에 변화가 발생하였다
. 1961년 4월 12일 미국 스티븐슨 대사는 조건부 남북한 대표 동시 초청 결의안을 제안해 통과되었다. 이렇게 유엔에 북한이 초청받는 상황에 직면하여 우리 정부는 한국문제를 유엔에 연례적으로 상정하는 방침을 지양하는 데 초점을 두고 유엔 외교를 전개해나갔다.
남북, 1991년 유엔 동시가입 … 대결외교 종식
한편, 1970년대 들어 데탕트 분위가 조성되자 우리 정부는 남북대화를 거친 후 1973년 ‘6·23 평화통일외교정책’ 선언을 발표해 북한의 국제기구 참여 및 통일까지 잠정조치로서 남북한의 유엔 동시 가입을 반대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국제사회에 천명하였다.
데탕트에 즈음하여 남북한은 유엔 안팎에서 지지 국가를 확대하고 국제적 위상을 높여나가는 방식으로 외교 경쟁을 벌여나갔다. 1970~1980년대에 걸쳐 남북한이 국제무대에서 벌인 체제경쟁 외교의 양상은 세 가지였는데 남한은 공산권 외교를, 북한은 대서방 외교를, 남북한 공통적으로 제3세계 외교가 그것이었다.
사실 1980년대 들어 한국문제가 유엔에서 토의되지 않는 가운데 남북 간 경쟁은 체제 역량의 격차가 남한 우위로 뚜렷해지고 북한의 테러 만행으로 국제여론이 남한 지지로 기울어져 갔다.
1980년대 후반부터 냉전이 해체되는 국제질서의 격동기에 우리 정부는 능동적으로 대처하여 북한과 대화에 나서는 한편, 북방정책을 추진하여 공산권 국가들과의 전면적인 외교관계 정상화를 도모함으로써 유엔 가입의 우호적인 환경을 마련하였다. 여기에는 민주화 달성, 1986년 아시안 게임과 1988년 올림픽 게임의 성공적인 개최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 결과 남한의 유엔 가입을 분단 영구화 책동이라고 비난을 일삼아온 북한도 국제적 고립을 완화하기 위해 유엔 가입을 결정하게 되었다. 결국 남북한은 1991년 9월 17일 동시에 유엔의 정회원국이 되었다.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은 남한의 민주화와 능동적인 외교정책이 만들어낸 외교적 쾌거이자, 한국 유엔외교의 전환점이 되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더 이상 국제무대에서 남북 간 대결 외교는 무의미해졌다.
유엔 가입 이후 대한민국은 “국제평화와 안전, 군비축소와 군비통제, 빈곤 퇴치, 환경보호 및 자연자원의 효율적 이용과 같은 범세계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국제적 노력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선언했다. 그런 입장은 세계화 현상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 방침과 맞물려 있었고, 위 한국의 유엔 외교 방침은 오늘날까지 지속성을 유지하고 있다.
한국은 유엔의 제반 활동에 적극 참여하고 있고, 각종 유엔 기구에 대한 진출이 늘어나고 있다. 한국은 공적개발원조(ODA)가 미미하였지만, 2009년 10월 OECD DAC(경제개발협력기구 개발원조위원회) 가입을 계기로 국제사회와의 원조 규모 격차를 완화하기 위해 GNI 대비 ODA 규모를 2012년까지 0.15%, 2015년까지 0.25% 수준으로 확대해 나갈 계획임을 국제사회에 공약하였다.
안보 분야에서는 북한의 핵개발 및 국지 도발로 유엔 안보리와의 협력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1996년 북한 잠수함 침투 사건, 2010년 천안함 폭침 및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로 인해 규탄 성명이 있었다. 한편, 유엔 가입 이후 우리 정부는 국제평화에 기여하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전개해나갔다.
1993년 소말리아에 250여 명의 공병대대(상록수부대)를 파견한 이래 총 17개 유엔 평화유지활동에 참여했으며, 현재 총 11개 평화유지활동 임무단에 645명을 파견하고 있다.
도움 받던 나라에서 도움 주는 나라로!
인권 분야에서는 민주화를 반영하여 우리나라는 2006년 6월 인권이사회 창설시 이사국으로 피선되었고, 2008년 재선되어 현재는 2008~2011년 임기 이사국으로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또 정부 및 민간 인사들이 유엔 인권, 환경 기구 등에 진출하여 활동하고 있다.
크게 보아 한국의 유엔 외교는 피후원자에서 협력자로 그 지위가 발전하였고, 참여 범위도 안보 중심에서 경제, 인권 등으로 확대해왔다. 이상 살펴본 한국의 유엔외교의 변화·발전은 국제정세의 변화와 그에 따른 유엔의 성격 변화를 반영하고 있지만, 무엇보다 국내 정치·경제 체제의 발전과 능동적인 외교정책 없이는 불가능하였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앞으로 한국은 중간국가(middle power)에 걸맞는 유엔외교 전략을 수립하여 국가이익과 국제사회의 관심사를 조화롭게 추구하는 지혜를 모아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대유엔 외교에서 동북아 평화·번영을 구축하는 지역외교 및 동맹외교와 균형 있게 추구하는 일도 긴요한 과제이다.
이상과 같은 일을 국내의 폭넓은 지지를 얻어 효과적으로 전개해 나가기 위해서는 정부와 민간의 협력체계를 강화하고 남북관계를 안정화 시키는 것이 필수요건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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