윗동네 리얼 스토리 | 유골 도둑놈 복 터진 사연 2011년 9월호
윗동네 리얼 스토리7
유골 도둑놈 복 터진 사연
함경북도 청진시에서 있던 일이다. 먹고 살기엔 부족하지 않을 만큼 많은 재산을 갖고 살던 재일귀국민 서태호는 어느 날 가족여행을 하고 집에 돌아와 보니 일본에서 갖고 왔던 부친의 유골단지가 비어 있음을 알았다. 즉시 보안서에 도난 신고를 했지만 허전한 마음을 달랠 길 없어 한숨 속에 날을 보냈다.
그런데 불행 중 다행으로 며칠 후 보안서에서 유골 도적을 잡았다는 연락이 왔다. 한달음에 달려가 보니 40대 중반의 초췌한 사내가 머리를 숙이고 심문실에 앉아 있었다. 얘기를 들어보니 기막혔다. 너무 배가 고파 빈집에 들어가 먹을 걸 훔치며 사는 이 꽃제비 사내가 단지 속에 든 아버님의 유골을 구운 밀가루로 착각해 모두 먹어 버렸다는 것이다
북한 형법은 고의적이던, 모르고 먹었던 인육을 먹으면 무조건 사형이다. 보안원은 이죽거리며 “너 이 자식, 이름처럼 상복 입고 죽을 채비나 해.”라고 말했다. 아마도 도둑의 이름이 ‘상복’이었던 모양이다.
“아버님을 잡수셨다니…이제 우리 아버님”
하지만 그 순간 희귀한 일이 벌어졌다. 당사자보다 서태호가 화들짝 놀라며 보안원에게 “제발 이 분을 살려달라.”고 사정하는 것이었다. 보안원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죽여 달라고 해도 시원찮을 텐데 이분을 살려 달라고? 왜 그러냐 물어보니 아버님을 잡수셨으니 이제부턴 이 분이 아버님을 대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웃어야 될 지, 울어야 될 지 보안원도 입을 벌린 채 한동안 말을 못했다.
본토 주민이라면 모르겠지만 일본에서 살다 온 사람이기에 북한에서도 일정한 기간은 귀국자들이 속해 있던 일본법을 존중해 주었다. 국가재산 절취가 아닌 개인 상호 간 피해문제는 합의에 의해 풀어 주기도 했다는 말이다. 아무튼 사형까지 갈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피해자가 하도 간절히 사정하는 바람에 보안서에서는 유골 도둑을 무죄로 석방했다.
서태호는 적지 않은 돈을 국가에 외화로 헌납한 공적이 있는 사람이기에 이러한 조처가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목숨을 건진 도둑은 감지덕지 서태호에게 매달리며 “이제부터 목숨 걸고 하라는 대로 무엇이던 하겠다.”고 맹세했다.
다음 날 도둑은 서태호의 정중한 초대를 받았다. 도둑질 하러 갔던 집에 다시 이번엔 손님으로 찾아가니 여러 명 되는 식구가 우르르 달려 나오며 모두 예를 표한다. 서태호는 그를 바로 유골 단지가 놓여 있던 방에 모셨다. 깨끗한 하오리(짧은 일본식 겉옷)를 걸치게 하고는 단지가 놓여 있던 상위에 그를 앉혔다.
그 앞에는 가지가지 맛있는 음식들이 한 상 가득 차려졌다. 잠시 후 촛불이 켜지고 자못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차례가 진행됐다. 서태호의 식구들 모두가 그 상 앞에 엎드려 절하며 ‘아버님, 아버님’ 하며 문상을 한다, 도둑은 지그시 눈을 감고 속으로 ‘오냐, 오냐’ 하며 어서 대충 차례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앞에 놓인 차례상의 음식들이 그의 주린 창자를 긁었던 것이다.
그 이후 역시 제사 때마다 상복은 늘 불려가 서태호 아버님 유골을 대신했다. 차례가 끝나면 융숭한 대접을 받았고 돌아갈 때에는 많은 선물을 받았다. 평상 시에도 서태호는 상복을 깊이 배려했고 늘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었다.
자기 아버님 유골을 구운 밀가루로 착각해 먹어버린 상복이었기에 그의 몸은 곧 서태호의 아버님을 대신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서태호로서는 아버지의 유해를 먹어버린 상복이 죽이고 싶도록 미웠겠지만 그 몸속에 아버님이 계신다고 생각하면 천대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오냐, 오냐. 대충하고 먹자…’
아무튼 이건 정말 화가 복으로 바뀐 셈이다. 매일 먹을 걱정으로 도둑질까지 서슴지 않았던 상복으로서는 복이 넝쿨째 떨어졌다. 이제는 잘사는 서태호의 부친을 대신하는 몸으로서 먹고 살 걱정이 없게 되었으니 말이다.
실제로 북한엔 화장법이 없다.
1980년대 어느 때인가. 김일성은 산과 들에 널린 무덤들을 보며 측근들에게 우리도 화장법을 제정하면 좋지 않겠냐고 넌지시 말했는데 고고학자였던 수행원 한 사람이 동방예의지국인 조선에서 아무래도 화장법은 시기상조인 것 같다고 말해 아직까지 그냥 시신을 묻고 있다.
화장법이 없으니 납골당이 있을 리 없다. 그래서 일본에서 귀국한 재일동포가 아버지의 유해를 집에 보관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그 두 사람이 그런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때 이 이야기는 북한 전역에 퍼져 숱한 사람들을 웃겼다.
함북 청진은 1959년 첫 귀국민을 받은 도시로서 북한 전 지역 어느 곳보다 재일귀국민이 많이 사는 도시다. 이 이야기가 사람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질 때 어떤 녀석들은 입맛을 다시며 ‘내게도 그런 기회가 왔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은근히 바라며 그 도둑을 부러워하기도 했다. 그만큼 피폐해진 삶이 부른, 북한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희비극이다.
이지명 / 계간 <북녘마을>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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