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인 남한사회 정착기 | 노동당 간부보다 좋은 차 탄다 2011년 10월호
탈북인 남한사회 정착기28
노동당 간부보다 좋은 차 탄다
추석연휴가 시작되기 하루 전, 구매를 예약한 새 차가 도착했으니 찾아가라는 전화가 자동차 대리점에서 걸려 왔다. 추석을 계기로 자동차 값을 할인한다는 소식을 듣고 신청했었다. 남한에 온 지 4년 만에 승용차가 벌써 두 번째다.
하지만 첫 번째 차는 중고차였다. 값이 200만원이 좀 넘는 낡은 차였다. 200만원이면 달러로 환산하면 1,900달러 정도는 되니 북에서 같으면 결코 쉽게 벌 수 있는 돈이 아니다. 북한 사람들이 러시아 벌목장에 가서 혹독한 시베리아 추위 속에 나무통과 씨름하다 귀국해도 3년 동안 모아 오는 돈이 2천달러도 못되는 경우가 많았다.
한 달 월급으로 중고차 … 꿈만 같아!
처음에는 한 달 월급 정도로도 중고차를 구입할 수 있다는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남쪽에 온 지 반 년 만에 공짜로 중고차를 주겠다는 사람이 있었다. 같은 아파트에 15년 되는 차를 타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내가 면허증을 취득한 사실을 알자 대뜸 자기 차를 줄테니 타고 다니라고 했다. 겉으로 보기에 멀쩡한 새 차처럼 보였다. 시동도 잘 되고 어디 쭈그러진 곳도 없었다.
그런데 아내가 반대하는 바람에 그만두고 말았다. 아내는 남쪽에 온 지 반 년 밖에 안 되었는데 어느새 그렇게 눈이 높아졌는지 부자도 못 되면서 그렇게 낡은 차를 왜 가지겠냐고 했다. 돈을 모아 새 차를 사겠다는 거였다. 그렇지만 자동차를 몰고 남들처럼 드라이브를 하고 싶은 충동을 누를 수 없었다. 얼마 지나 나는 아내 몰래 중고차를 사버렸다. 생산 된 지 10년 쯤 된 것이었다.
그 차를 운전한지 3년이 넘었다. 그 사이 돈도 모아졌고 날이 갈수록 새 차를 사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남쪽에선 누가 어떤 차를 타고 다니는가를 가지고 신경을 쓰는 세태가 있었다. 마치 낡은 차를 타면 없이 사는 사람처럼 보이거나 은근히 자존심이 상하는 느낌을 받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특히 남자들이 더 그랬다.
예를 들면 회사에서 사장님이 자기 부하직원이 자기보다 더 좋은 차를 타고 다니면 건방지다고 여기는 경우가 있었고 어떤 자동차공장 직원이 남의 회사에서 만든 차를 타고 다니면 태도에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곱지 않은 눈총을 받는다는 것도 알게 됐다.
北 ‘갈매기’ 자전거 꿈도 못 꿔!
자동차에 사람의 자존심은 물론 회사의 자존심까지 걸려 있는 것 같다. 날이 갈수록 그런 분위기가 점점 더 느껴졌다. 누가 대놓고 말하지 않는데도 괜히 점점 내가 타는 중고차가 부끄럽게 여겨졌다. 그저 변명은 내 차가 오래되긴 했지만 부품이 일본산이라느니 어쨌느니 하는 말이었다. 사실 북에서라면 내 차도 노동당 군당책임비서의 전용차보다 훨씬 더 좋다. 남쪽사람들이 그만큼 생활수준이 높다는 것을 보여준다.
가끔 남이 새로 뽑은 새 차를 운전해 보면 내 차와는 확실히 느낌이 달랐다. 승차감이 어떻고 스릴이 어떻고 하는 말이 처음에는 무슨 말인가 했는데 이제는 나도 그것을 느낄 줄 알게 되었다. 차에 대해 무식한 아내도 이제는 그런 말을 할 줄 안다. 북에서는 집에 수레도 온전한 것이 없어 늘 남의 것을 빌려 쓰느라 자존심도 많이 구겼던 아내다. 어지간하면 등짐으로 해결하려 하던 그 모습이 아직도 눈물겹다.
나도 하루 왕복 40리나 되는 길을 매일 걸어서 출근했다. 버스도 다니지 않고 통근열차도 멎어버린 긴 출근거리를 10년이나 그렇게 다녔다. 북방의 추위에 눈썹과 턱 밑에 하얗게 성에가 불리고 머리엔 개털모자를 눌러쓰고 종종걸음으로 직장에 가던 시절, 여름이면 뙤약볕 속으로 지나가는 자동차가 피우는 먼지를 뒤집어쓰며 걸었고, 비가 오면 질척거리는 길로 신발에 흙이 몇 kg씩 달라붙은 발로 다녀야 했다.
그 때는 자전거가 제일 큰 소망이었다. 집안에서 제일 큰 재산이 자전거로 취급될 정도인 현실에서 가난에 쪼들린 우리 집 형편에 아이들의 밥그릇을 줄이면서까지 자전거를 마련할 생각이 없었다. 자전거 중에도 일본산이 제일 비쌌다. 국내산도 좋은 것은 있었다. ‘갈매기’ 자전거는 일본산보다 오히려 더 좋았다.
그러나 그것은 일반 주민에게까지 차례질★ 형편이 못 되었다. 국가보위부 산하에서 생산하는 ‘갈매기’ 자전거는 특정 계층의 전유물이라 꿈 꿀 수도 없었다. 그래도 어쩌다 한번 운수가 좋아 친척 방문차 북에 나왔던 재중동포로부터 중국산 자전거를 선사받은 일이 있었다. 심부름을 열심히 들어준 대가였다. 그 때의 기쁨은 남쪽에서 자동차를 샀을 때만큼 큰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얼마 타지 못하고 식량과 바꾸고 말았다.
그렇게 살던 내가 남쪽에 와서 이제는 부자가 된 셈이다. 이제는 군당책임비서도 욕심낼만한 승용차를 나무라며 새 차를 살 정도가 되다니, 오늘의 이 생활이 꿈인지 아니면 북에서의 내 생활이 꿈이었던지 가만히 생각에 잠겨보면 알쏭달쏭하다. 확실히 사람은 옛 처지를 잊기 쉽다.
하지만 다른 사람은 몰라도 탈북자가 옛 처지를 잊어서는 안 된다. 행복하면 할수록 두고 온 고향에 지금도 고통 받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잊는다면 우리가 이 땅에서 아무리 풍요한 생활을 누린다 해도 그것은 옳은 삶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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