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분쟁 25시 | 과거의 영광 사라진 ‘행운의 아라비아’, 통일예멘 2015년 2월호
세계분쟁 25시 10
과거의 영광 사라진 ‘행운의 아라비아’, 통일예멘
예멘은 홍해와 아라비아해를 연해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를 연결하는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다. 고대 예멘은 아라비아 펠릭스(Arabia Felix) 즉 ‘행운의 아라비아’로 불렸다. 이는 예멘이 육지와 바다의 가장 중요한 무역로에 위치하여 막대한 부를 누렸고 유황과 몰약으로 무역이 번창했기 때문이다. 이런 지정학적 중요성으로 제국주의 시대 강대국의 간섭을 받았고 남북으로 분단되어 냉전시대에는 대리전쟁을 경험한 바 있다. 예멘은 1980년대 말 구소련의 해체와 공산권 붕괴 등에 영향을 받아 남북 양측이 통합에 합의하여 1990년 통일을 이루었다. 그러나 현재는 예전의 명성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아라비아 반도 최악의 빈곤상태에 놓여 있다. 또한 내재된 남북 간의 갈등과 남예멘 분리주의 세력의 활동, 알카에다아라비아반도지부(AQAP)의 예멘 거점화 등으로 혼란한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고대 예멘, 행운의 아라비아(Arabia Felix)로 불려
1962년 9월 이맘 아흐마드가 사망하면서 북예멘은 나세르의 아랍민족주의에 영향을 받은 장교들의 권력투쟁이 시작되었다. 아흐마드의 아들인 바드르가 이맘을 계승했으나 압둘라 살라 대령이 이끄는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키며 권력을 장악, 예멘아랍공화국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바드르를 위시한 소위 왕당파세력은 산간지역으로 밀려나 혁명세력과의 무력투쟁을 실시했다. 이러한 무력투쟁은 북예멘 내전으로 비화되었으며, 인접 아랍권 국가들도 그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양측을 지원하면서 국제전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반면에 남예멘은 보다 이념 지향적이고 급진적인 마르크스 레닌주의 세력이 체제를 주도하여 왕당파나 이맘 체제의 유산을 완전히 제거하고 사회주의노선을 지향하는 아라비아지역의 유일한 좌파정권을 세웠다.
남북예멘 양측은 1970년대 초 서로 상대체제를 무력으로 전복시키려는 활동을 벌였다. 북예멘의 사나 정권은 북예멘 내에 남예멘의 반체제세력을 규합하여 훈련시키는 캠프를 만들었으며, 1970년에는 이들을 남예멘통일국민전선으로 재편성하였다. 한편 남예멘의 아덴 정권도 북예멘 내의 급진좌파세력들에게 경제적 지원을 했다. 이러한 상호 체제대결을 위한 적대관계가 1972년 초에는 남예멘점령지대 해방전선(FLOSY)과 남아라비아연맹 등 반 남예멘 체제세력들이 국경지대에 집결함으로써 무력충돌의 위기로 고조되었다. 4월 11일에 남예멘군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된 소규모 무력충돌은 9월 국경지대에서의 무력충돌로 이어져 전면적인 전쟁이 발생했다. 이 전쟁은 약 1개월간 계속되어 양측의 사상자가 4천여 명에 이르렀고, 3만여 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1978년 두 차례에 걸친 북예멘 최고지도자의 암살로 남북 양측은 긴장이 고조되었다. 이러한 긴장은 1979년에 접어들면서 국경전쟁으로 이어졌다. 이 전쟁의 원인은 남예멘이 배후에서 조종한 것으로 알려진 북예멘 정부 전복사건들이었다. 북예멘에서 1978년 9월 살레 대통령 암살미수 사건이 발생하고 10월에는 군 고위장교들에 의한 쿠데타가 모의되었으나 실패로 끝났다. 이렇게 남북예멘의 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어 국경 무력충돌이 빈번하게 발생했고 그러한 무력충돌이 상대편이 원인이 되었다며 상호비방을 되풀이 하더니 1979년 2월에 마침내 대규모 국경충돌이 전쟁으로 비화되었다. 이 전쟁으로 1차 무력충돌 때보다 많은 사상자와 난민이 발생했다.

예멘을 6개 자치주로 구성된 연방제로 전환하는 내용의 새헌법 초안에 불만을 품고 시아파 반군 후티가 정부군에 맞서 지난 1월 22일 예멘을 점령했다. 사진은 앞선 17일 예멘의 수도 사나에서 있었던 폭력 반대 시위의 모습으로 시위대는 ‘우리는 그 어떠한 형태의 폭력과 테러에도 반대한다’는 아랍어 문구를 들고 있다. ⓒ연합뉴스
알카에다, 예멘 남부 여러 도시 장악 … 교전 지속
1980년대 말 냉전의 종식, 동구공산권의 몰락, 소련의 개혁과 개방 등 세계적인 사건들은 남북예멘에도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그간 양 예멘은 이데올로기와 체제에 대한 명분을 놓고 서로 경쟁하였고 자원빈국으로 외부의 군사력, 경제력에 대한 의존도가 컸기 때문에 이들을 지탱해 준 외부의 원조중단이 곧바로 체제에 영향을 미쳤다. 제반조치들이 내외적으로 시행되는 가운데 약간의 마찰과 통합을 반대하는 움직임들이 있기는 했지만 마침내 1990년 5월 22일 남북예멘은 통일을 선포했다. 그러나 통일헌법의 기본 구도 자체와 남북의 기득권 간의 갈등, 군사통합 미흡 그리고 당시 중동의 역학관계를 복잡하게 만든 걸프전쟁의 영향으로 통일예멘은 심각한 진통을 겪게 되었다. 예멘은 통일과정에서 권력의 배분을 놓고 전면전 성격의 내전을 치렀으나 북예멘이 남예멘을 군사적으로 패퇴시켜 통합을 완성했다.
2011년 중동지역을 강타한 민중혁명의 물결이 예멘에도 밀려오면서 알카에다, 반정부 세력, 일반 민중이 합세한 국가 규모의 반정부 투쟁이 전개되고 있어 1994년 내전 발발 이후 국가적으로 가장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다. 반정부 시위에 따른 사회적 혼란을 틈타 알카에다의 공세는 더욱 강화되어 예멘 남부의 여러 도시가 알카에다의 수중에 넘어감에 따라 이들 지역을 되찾으려는 정부군과 알카에다의 교전이 계속되어 현재까지 수많은 사람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2012년에도 알후티 반군과 수니파 세력 간에 발생한 충돌로 약 400명이 사망했으며, AQAP, 샤리아 이슬람 반군, 정부 간 무력 충돌로 인해 약 1,800명이 사망하고 수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2013년 역시 알후티 반군과 수니파 간의 충돌은 이어졌고, AQAP와 정부 간 충돌도 지속되었는데 약 3,400명이 사망하고 1만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불행히도 통일된 예멘은 남북 분단 이전보다 더 심각한 상황을 겪고 있는 셈이다.
조상현 / 군사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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