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세히보기 2016년 2월 1일 0

이달의 인물 | 한시대, 브라이언트 E. 무어 2016년 2월호

 

미주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 이끌다

한시대 선생(1889.9.18.~1981.5.7.)은 황해도 해주 출신으로 1903년 하와이로 이민 가 그곳에서 중학교를 마친 뒤 샌프란시스코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1914년부터 사탕무 농사를 시작으로 농장사업을 활발히 전개하여 1950년대 한가(韓家)기업을 설립할 정도로 사업가로 성공하였다.

선생은 대한인국민회 딜레노지방회와 다뉴바지방회에서 활동하였고, 3·1운동이 발발하자 전 가족과 함께 거액의 독립의연금을 헌금하여 중국 상하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돕는 데 기여하였다. 1936년 선생은 재미 한인사회의 발전을 위한 실행위원이 되어 대한인국민회를 재건하고 부흥시키는 데 앞장섰고, 새로 재건된 대한인국민회의 중앙집행위원으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대한인국민회 총회관 신축을 위한 건축위원이 되어 1938년 4월 로스앤젤레스에 총회관을 완공하는 데 기여하였다. 선생은 1940년부터 1943년까지 북미 대한인국민회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였고, 특히 1941년 4월 미주지역 9개 한인단체 대표들이 모인 가운데 호놀룰루에서 해외한족대회를 개최하고 대회 부의장으로서 미주 최대의 독립운동기관인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조직해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1944년부터 1945년까지 선생은 로스앤젤레스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위원장으로 활동하며 임시정부 후원과 외교 및 선전활동에 매진하였다. 1944년 10월 미주 13개 한인단체 대표가 모인 전체대표회를 주관하여 외교활동을 전담할 주미외교부위원부를 개조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1945년 4월 샌프란시스코회의가 열리자 해외한족대표단의 단장으로서 국제열강을 상대로 한 선전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광복 후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조국 재건의 일익을 담당하기 위해 국내파견대표단을 결성할 때 단장이 되어 국내 중간세력을 결집하고 통일정부를 수립하는 데 기여하였다. 미국에 돌아온 이후 흥사단 이사장으로 활동하는 등 일평생 조국의 독립과 재건을 위해 헌신하였다. 정부는 미주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을 이끌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외교활동을 전개한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마지막 순간까지 병사들과 함께!

국가보훈처는 브라이언트 E. 무어(1894. 6. 6.~1951. 2. 24) 미 육군소장을 2월의 6·25전쟁 영웅으로 선정하였다. 무어 장군은 미 육군사관학교 교장을 마치고, 맥아더 사령부의 요청에 의해 1951년 1월 31일 미 제9군단장으로 전쟁이 한창이던 한국에 부임하였다. 그는 바로 썬더볼트 작전에 참가, 중공군 및 인민군의 대공세에 맞서 유엔군과 함께 경기도 및 서울 남부 지역에서 반격을 가하는 등 적극적으로 전투에 임하였다. 그는 치열한 전투 속에서도 늘 최전선에서 그의 병사들과 함께 하고자 하였다.

이후 무어 장군은 중공군의 4차 공세로 형성된 중동부 전선의 열세지역을 회복하고, 그 지역 내의 적군을 포위·격멸하기 위해 킬러작전에 다시 참가하였다. 이 작전은 중공군 개입 이후 미8군이 중공군에 대해 실시한 최초의 적극적인 공세 작전이었다. 작전은 1951년 2월 21일 개시되었다. 주요 공격 임무를 맡은 무어 소장의 미 9군단은 양평~횡성 선으로 곧바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2월 24일 정찰을 위해 탑승한 헬기가 여주 근처의 한강에 추락해 전사하게 된다. 목격자에 의하면 무어 장군은 헬기의 잔해 속에서도 끝까지 부하들의 구출을 걱정하다가 숨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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