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분쟁 25시 | 종족 갈등 격화 … 끝없는 보복전, 스리랑카 내전 2016년 9월호
세계분쟁 25시
종족 갈등 격화 … 끝없는 보복전, 스리랑카 내전

스리랑카 소수민족 타밀족 여성들이 지난 2015년 12월 10일(현지시간) 세계 인권의 날에 실종 가족들을 찾아달라며 콜롬보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연합
스리랑카는 인도 동남부에 위치하고 있는 인도양의 섬나라다. 스리랑카의 정식 명칭은 스리랑카 민주사회주의 공화국(Democratic Socialist Republic of Sri Lanka)이다. 스리랑카는 한반도의 1/3에 해당하는 6만5,610㎢의 면적에 약 2천만 명(2011년 기준)의 인구가 거주하고 있다. 스리랑카의 주민은 약 74%가 아리아계의 싱할리족으로 대부분이 불교도다. 그 다음으로 드라비다계의 타밀족이 총인구의 약 9%를 차지하며 힌두교도다. 그 외 무어족, 말레이족, 버거족 등의 소수민족이 있으며, 이슬람교, 가톨릭교가 각각 8%와 6%를 차지하고 있다. 언어는 싱할리어 및 타밀어, 영어가 공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스리랑카는 140여 년간 영국의 식민통치를 받았다. 영국은 식민통치 기간 중 타밀족을 우대하고 싱할리족을 차별하는 분리통치 정책을 실시했다. 독립 이후 차별을 받던 다수의 싱할리족이 반(反)타밀족 정책과 타밀족의 싱할리화 등을 추진하면서 타밀족의 분리 독립투쟁으로 이어져 스리랑카는 내전에 빠지게 된다.
수 힌두교도 타밀족과 다수 불교도 싱할리족 간 대립
스리랑카 자유당을 창당한 솔로몬 반다라나이케(Solomon W.R. Bandaranaike)가 강력한 싱할리화 정책을 추진하자 타밀족의 반발이 시작되었고, 1958년 양측 간에 무력충돌이 벌어져 약 400명이 사망했다. 1971년 싱할리 청년운동단체인 인민해방전선(JVP)에 의한 내란이 발생해 수천 명이 사망했다. 그리고 1977년에는 자프나(Jaffna) 북동부 지역에서 타밀족과 싱할리족이 충돌해 300여 명이 사망하고 3만5천 명의 타밀인들이 강제로 난민촌에 수용되었다. 이러한 충돌은 이후에도 간헐적으로 일어났으나 1983년 7월에 대규모 충돌이 발생했다. 이 충돌은 타밀족 급진파 조직이 타밀족 거주지인 자프나에서 정부군을 습격하여 싱할리족 병사 13명을 살해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로 인해 수도 콜롬보에서 싱할리족이 타밀족에 대해 무차별 보복전을 전개하고 정부군까지 가세하면서 진압 과정에서 1천여 명 이상의 타밀족이 대량으로 학살되고 10만 명 이상의 난민이 발생했다. 타밀족의 완전독립을 주장하며 무장투쟁을 해 온 반군단체인 타밀엘람해방호랑이(LTTE)가 1984~1985년 사이 두 차례에 걸쳐 싱할리족에 대해 대규모 학살을 자행했다. 1987~1989년 사이의 충돌에서는 약 6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것으로 알려졌다.
스리랑카 내전이 최악의 상태에 접어들면서 다수의 타밀족이 포크해협을 건너서 인도의 타밀나두 주(州)로 피신했다. 이에 인도는 1987년에 스리랑카 정부의 요청과 동족 문제라는 명분을 내세워 평화유지군 약 7만여 명을 파병했다. 그러나 1989년 2월 2,500여 명의 사상자를 낸 채 인도군이 철수하게 되자, 1991년부터 정부군과 LTTE 간의 전투가 재개되었다. 특히 LTTE의 테러 활동으로 인도의 간디 총리(1991. 5), 프레마사다 대통령(1993. 5) 등이 사망했다. 1994년에 양측의 평화협상이 재개되었으나 입장 차이로 무산되었다. 1997년 미국이 LTTE를 테러집단으로 규정하고, 스리랑카 정부도 LTTE를 불법단체로 규정하면서 양측의 공방은 한층 더 가열되었다. 1999년 쿠마라퉁가 대통령은 헌법 개정을 통해 연방국가로 전환하고 타밀족이 거주하는 주에 대한 자치권 확대를 포함한 내전종식 계획을 제시했다.
2000년부터는 양측의 평화협상 노력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2005년 스리랑카에서 강경파로 알려진 마힌다 라자팍세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자 무력 충돌이 심화되었다. 이후 정부군에 의해 타밀족 주요 인사들이 암살되고 LTTE에 의한 자살폭탄 테러로 정부군 장성이 살해되는 일도 벌어졌다. 2006년 8월 정부군이 LTTE가 장악하고 있던 항구도시 트리코말리 수로를 확보하기 위해 대규모 공격을 가했다. 이 전투로 양측 전사자가 800명 이상 발생했다. 2007년 7월에 이르러 정부군은 반군의 최후 거점이었던 동부 지역을 장악함으로써 이 지역을 완전히 통제하고 2008년 1월 스리랑카 정부는 동부 지역에서의 승리를 토대로 반군에 대한 대대적인 소탕작전을 전개했다.
2009년에 접어들면서 정부군은 반군을 완전히 섬멸하기 위한 대규모 전과확대 작전을 전개, 5월 16일 스리랑카 대통령은 내전 승리를 선언하였고 다음날 LTTE도 군사적 패배를 시인하면서 27년간 끌어오던 스리랑카 내전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UN에서는 내전 직전 사망한 민간인을 최소 7천 명으로, 1983년 이후 2009년까지 정부군과 LTTE 양측의 사망자를 8만~10만 명으로 추산했다. 또 이 기간 중 약 300만 명의 난민이 발생해 전체 인구의 15%에 육박하는 사람들이 내전의 피해를 입었다.

우간다 지도
“내전 기간 중 사망자 8만~10만 명, 난민 300만 명”
스리랑카는 내전의 상처를 딛고 새로운 국가건설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2012년 5월 15일 개최된 아시아 프로그램에서 스리랑카 외무장관 페이리스는 “스리랑카가 직면한 문제는 타밀호랑이에 의한 공포적 군림이었고, 현재 정부는 발전과 국가적 조화라는 새로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그러면서 그는 전후 많은 난제들이 해결되고 있으며, 특히 스리랑카 북부 지역의 경제는 20%이상 성장세를 보이며 회복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2016년 현재 스리랑카에는 북부 지역에 잔존하고 있는 LTTE 자살테러단의 활동과 불교도, 힌두교도, 이슬람교도 간의 충돌로 간헐적인 피해가 발생하고 있다. 국가의 안정을 되찾으려는 스리랑카 정부의 노력과 국제사회의 공조가 필요한 상황이다.
조상현 / 군사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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