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세히보기 2016년 12월 1일

박계리의 스케치北 | 경계를 넘어온 여성들 상처로 그려 넣은 산수화 한 폭 2016년 12월호

박계리의 스케치北 60

경계를 넘어온 여성들 상처로 그려 넣은 산수화 한 폭

임흥순, , 비디오 85분, 2016

임흥순, <려행 >,2k 비디오, 86분, 2016

 <려행>을 봤다. 베니스비엔날레 은사자상 수상으로 대중들에게 이름이 알려진 임흥순 감독의 작품이다. 이번 작품은 안양시가 3년마다 개최하는 국내 유일 공공예술트리엔날레인 APAP에 출품되어 주말에 상영되고 있었다.

영화의 주인공은 북한에 살다가 남한으로 건너온 여성들이었다. 이 여성들이 자신들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일본에 살던 아버지를 따라 평양으로 갔던 재일교포 여성은 ‘순혈주의’를 강조하는 북한 사회의 문화에서 받은 상처를 미싱을 돌리며 고백한다. ‘고난의 행군’ 시기에 아들을 위해 먹을 것을 구하러 중국으로 잠시 나갔다가 몸이 팔려 중국 땅 깊숙이 들어가야 했던 한 여성. 험난한 탈북의 과정 중에 이리저리 옮겨져 중국인과 결혼할 수밖에 없었던 여성. 중국인 남편과 자식을 위해 다시 한국으로 와서 돈을 벌고 있는 그녀가 국제전화를 걸어 딸과 중국말로 대화하고 있었다. “한국에 와서 살래?” 엄마의 물음에 단호히 ‘싫어!’라고 말하는, 그 단답형의 까칠한 중국말에 그리움이 가득했다.

아버지, 나 잘 살고 있는 것 맞냐고!”

한 여성은 산에 올라 북에 두고 온 아버지를 향해 술을 따라 올리며 목청껏 외친다. “아버지, 비싼 술도 마셔봐. 보고 싶어. 나는 잘 살고 있어. 나는 잘 살고 있.다.고. 아버지! 나, 잘 살고 있는 것 맞아? 나, 잘 사고 있는 것 맞냐고!” 그녀의 외침이 메아리가 되어 내 가슴에서도 묻고 있었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북에서 온 여성들의 계급과 계층, 삶의 경험과 취향은 모두 달랐지만 함께 있을 때 이들은 그 다양함으로 인한 균열이 아니라 이를 품어내는 묘한 힘을 발산하고 있었다. 그 힘은 여성적 말하기의 매력으로 극장 안을 장악해내고 있었다.

인터뷰 형식의 다큐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환상적이고 상징적인 표현들이 화면에 수시로 교차된다. 이러한 ‘임흥순’적인 영화 형식의 힘은 역설적이게도 내용의 리얼리티를 극대화하고 있었다. 상징과 은유, 환상이라는 표현 형식은 재현해야 할 대상과의 관계에서 여백을 만들어낸다. 임흥순의 영상에서 이 여백들은 대상을 보고 느끼는 감상자 각자의 공감대로 채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 큰 힘은 이들이 이야기하고 있는 장소성, 즉 산에 있었다. 이 여성들은 산을 함께 오르고 또 내려오며 이야기를 나눈다. 날 것의 자연, 산의 바위, 계곡과 암벽을 오르는 이들의 목소리를 따라 함께 오르다 보면 이들이 북한이라는 경계를 넘을 때 드러났을 다양한 모습이 자연스럽게 상상된다. 그러나 곧 각기 다른 삶의 과정을 다 담아내고도 남는 산의 다양성에서 이들이 하나가 되어 가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 모습은 마치 산수화 한 폭을 보는 것 같았다. 기운 찬 산세가 화면 안에 가득했고 그 사이를 사람들이 꾸물꾸물 걸어가며 자신들의 삶을 반추해내고 있었다.

옛 선비들은 산에 오르지 않는 동료들을 비난했다. 그들은 산에 올라 새싹이 돋고 꽃이 피고 열매 맺고 낙엽이 되어 사라지지만 다시 그것을 반복해내는 자연의 섭리를 목도했다. 그러한 끝없는 반복 속에 나무는 자라고 있었고, 우리의 얼굴엔 주름이 생기기 시작했다. 인지하지 못할지라도 우리는 매 순간 이러한 끊임없는 반복 속에서 변화를 거듭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반복과 변화 속에서 결국 우리가 도달하는 곳은 어디일까?

죽음이다. 그렇게 우리는 모두 죽는다. 선비들이 산에 가서 해야만 했던 묵상이란, 1천 년 넘게 그 자리에 서 있는 바위 앞에서 1백 년을 채 살지 못하고 죽는 인간의 찰나의 삶에 대한 묵상이다. 아무리 잘나도 자연의 섭리 앞에서 결국은 모두가 평등하게 딱 한 번 살다 죽는 것이 인생이다.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를 되묻기 위해 선비들은 산으로 향했다.

죽음을 상정하고 내딛는 삶은 공포가 아니라 긍정적 에너지를 불러일으킨다. 이것이 산을 오르며 얻게 되는 또 하나의 가르침이다. 전통시대 때에는 이러한 묵상의 주체로서 인정받지 못했던 여성들이 임흥순의 작품 속에서 자신의 삶을 반추하며 산을 오르고 있었다. 여성들이 산수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 흥미진진한 반란 때문에 무거운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화면이 어둡지 않았고 진지했지만 경쾌했다.

그 산속의 커다란 암벽은 이 여성들을 받아 올렸으며 냇물은 이들을 품어 끊임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온갖 미물들이 모여 사는 산 속에서 공생을 배우며 꿈틀꿈틀 각자의 삶의 역사로 함께 손잡고 걸어가는 이 여성들의 산수화가 오랫동안 머릿속을 맴돌았다.

 박계리 / 미술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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