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세히보기 2016년 12월 1일

기획 | 다시 고통스럽지 않으려면 기억해야 ‘포인트 알파’어떻게 활용하나? 2016년 12월호

기획 | 통일독일의 저력, 그들이 분단을 기억하는 법

다시 고통스럽지 않으려면 기억해야 포인트 알파어떻게 활용하나?

 

동서독 주민들의 왕래를 금지한 가장 초기의 말 뚝

동서독 주민들의 왕래를 금지한 가장 초기의 말

동·서독 분단 당시 미군 병사들이 관측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그들의 눈앞에 있었던 분계선 너머에는 인권을 경시하는 정권이 생겨났다. 동독은 대략 10년 주기로 새로운 형태의 장애물을 설치해 경계선의 모습을 바꿔나갔다. 이로써 세상에서 가장 견고하고 통과하기 어려운 차단선이 생겨났으며 여기에 소위 ‘경계의 돌파’를 막기 위한 발포 명령까지 더해졌다. 동독이 경계선에 심혈을 기울이는 목적은 단 하나였다. 바로 동독 주민들이 동독을 떠나는 것을 막는 것뿐이었다.

포인트 알파 관측소, 동독 폐쇄성 현장에서 목도하다

1952년 5월 26일 오토 그로테볼 동독 총리는 ‘독일민주공화국과 독일의 서방 관할지역 간의 분계선 방안에 관한 규정’을 발표하였다. 이 규정은 전체 내독 간 경계선에 높은 철조망 장애물을 설치하고 1,400km 전 구간에 걸쳐 5km 너비의 통제구역을 설정할 것을 명시하였다. 주민들은 이 구역을 ‘출입제한구역’이라고 불렀다. 이 안에서 다시 10m 너비의 관리구역을 두고 출입을 금지하였으며 경계시설 전방에 소위 ‘500m 보호구역’을 설정하였다.

전술하였듯, 신생 동독의 입장에서 가장 큰 문제는 많은 주민들이 서독으로 이탈하는 것이었다. 동독의 지도부는 신속하고 철저하게 계획경제와 재산 몰수에 나서며 완전히 다른 수준의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확립하려는 의욕에 차있었다. 그러나 실상 이 시점에 노동력을 가진 젊은이를 포함해 사업가와 높은 교육수준을 지닌 많은 인적 자원들이 동독을 등지고 떠나갔다. 이에 정치·사회적으로도 동독 내 많은 변화가 생겨났으며 위정자들은 내독 간 경계를 공고화하는 것이 곧 동독을 존속시키기 위한 중요한 전제조건이라고 판단하였다.

1961년 8월 13일 베를린에서는 내독 간 경계를 구분하는 첫 번째 장애물이 설치되었고 이는 내독 간 경계선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틀 뒤인 8월 15일 사회주의통일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은 ‘동독의 서쪽 경계’에 대한 강화된 보안대책과 함께 새로운 강제소개(疏開) 방안을 결정하였다. 포인트 알파 관측소 병사들은 동독이 1972년에 경계시설에 어떻게 자동발사 장치를 설치하였으며 이후 어떤 방식으로 경계시설을 보강했는지 관찰할 수 있었다. 사회주의통일당 지도부는 경계 강화와 관련하여 이미 새로운 계획들을 가지고 있었으며 경계 구간 내 인원들의 움직임을 감지하는 등 막대한 비용이 드는 기술도 거리낌 없이 투입하여 더욱 견고한 시설을 세워나갔다.

엄혹했던 분단의 시기가 지나고 1989년 가을 동·서독 간 경계가 허물어진 이후 포인트 알파 관측소가 존재할 이유는 사라졌다. 1990년 3월 31일 부로 마지막 국경 순찰이 종료되었으며 미군 캠프도 문을 닫았다. 이로써 포인트 알파는 냉전과 독일 분단의 과거 상징물이 되었지만 현재와 같은 형태의 기념비적 박물관으로 탈바꿈하는 것은 간단치 않았다. 미군 캠프는 자연을 복원하려는 주 정부의 계획에 따라 채 10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았던 동독의 경계시설과 마찬가지로 철거될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미군 철수 후 헤센 주 정부는 포인트 알파 관측소 자리의 자연(산림) 복원을 결정하였다. 미군이 사용하던 병영은 철거하는 것으로 결정이 났으며 철거 시점까지 난민 신청자들의 숙소로 사용하도록 결정했다. 이에 따라 1991년 말에 첫 난민 신청자들이 포인트 알파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이들은 1994~1995년까지 체류하였다.

내독 간 국경선 최종 구상

내독 간 국경선 최종 구상

분단 고통 되풀이 안 돼 원형 그대로 보존해야

상황은 1995년 초에 바뀌기 시작했다. 난민 신청자들이 포인트 알파를 떠난 후 전체 시설이 적막감에 휩싸이고 철거를 해야 할 시점이 다가왔을 때 시민들이 새로운 제안을 들고 나온 것이다. 지역 주민들은 포인트 알파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존함으로써 과거 분단의 상처를 새기고 다시금 고통의 역사를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공유하자고 주장했다. 자발적으로 나선 시민들의 보존 의지 앞에 정치권은 지원을 약속했다.

이로써 독일통일과 관련된 특별하며 매우 성공적인 모델인 포인트 알파 설립 프로젝트가 실현되기 시작했다. 1995년 6월 29일 프로젝트 운영주체인 ‘뢴 포인트 알파 국경 박물관’의 창립총회가 개최되었고 포인트 알파 국경박물관과 아카데미의 운영주체인 포인트 알파 재단은 그 운영 재원을 튀링엔 주와 헤센 주 그리고 바르트부르크 카운티와 풀다 카운티, 게마인데 라스도르프, 가이자 시로부터 지원받을 수 있게 되었다. 예전 죽음의 띠 위에 ‘희망의 길’이라고 이름 붙여진 예술품을 설치하는 개별 프로젝트 역시 두 개의 연방주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튀링엔 주와 유럽연합의 지원금을 받아 2002~2003년 박물관 동쪽 구역에 ‘경계의 집’이라고 명명한 전시관을 세웠는데, 실제 동독 국경수비대가 사용하던 순찰로 위에 건물을 설치함으로써 과거의 흔적을 전시물로 바로 활용할 수 있었다.

이전 미군 관측소는 역사적인 시설물을 냉전 및 나토의 동맹전략과 연계시켜 보여주고 있으며 ‘경계의 집’ 내부에 꾸며진 새로운 전시물들은 지역 증인들의 운명을 담은 증언들을 토대로 동독 정권의 실상을 보여주고 있다. 마찬가지로 바르샤바조약기구 회원국들의 군사동맹 성격 등 당시 분단 상황을 국제정치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자료들도 생생하게 전시되어 있다. 이렇듯 포인트 알파 국경박물관의 다양한 전시 내용들을 통해 옛 경계선을 기준으로 존재했던 양측의 반대되는 체제를 직접 비교하는 것뿐만 아니라 복잡하게 얽힌 구조를 입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베르톨트 뒤커 협회장을 포함한 포인트 알파 국경박물관의 회원들과 후원자들은 박물관이 더욱 전문적인 기능체로 발전하고 관에서 제공하는 내용이 언론의 활발한 홍보를 통해 사회적으로 널리 확산될 수 있도록 하는 데 노력해왔다. 그러나 협회장이 자원봉사의 형태로 관여하는 체제에서는 위와 같은 업무를 추진하고 실질적인 효과를 거두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렵기 때문에 독립적인 재단을 설립하여 재단이 박물관의 운영을 맡고 향후 지속적인 발전을 위한 기반을 조성하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설립된 것이 바로 포인트 알파 재단이다. 포인트 알파 재단은 포인트 알파 국경박물관을 독일 분단을 기억하는 장소로, 그리고 냉전 연구와 관련된 자료를 수집하는 장소로 유지 및 발전시켜 나가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또한 포인트 알파 재단은 국경박물관의 유지뿐만 아니라 교육 및 연구 사업의 지속적인 확대를 통해 상설 및 특별 전시를 주요과제로 수행해 나갈 계획을 가지고 있다.

포인트 알파 재단이 제공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은 2010년에 있었던 포인트 알파 아카데미(연수원)의 설치를 통해 완성도가 높아졌다고 할 수 있다. 포인트 알파 재단 이사회는 2009년에 예전에 법원으로 사용했던 가이자 시의 제후 궁전 건물을 아카데미로 사용하기로 결정했으며, 이에 따라 2011년 9월부터 본 아카데미에서 수일 동안 진행하는 세미나가 성황리에 개최되고 있다. 행사 주제들은 포인트 알파의 경험들과 관련 있는 내용을 중심으로 선정되는데 예를 들면 자유의 가치, 자기 책임, 관용, 민주주의 전파, 국제 위기예방 등이다.

결혼 직후 내독 간 국경선이 설치되어 친정을 방문할 수 없었던 여인이 40년 만에 손자를 데리고 경계를 넘게 되었다.

결혼 직후 내독 간 국경선이 설치되어 친정을 방문할 수 없었던 여인이 40년 만에 손자를 데리고 경계를 넘게 되었다.

분단 기억과 만남을 위한 명소로 100만 명 이상 다녀가

지금까지 포인트 알파와 관련한 프로젝트는 지역 주민을 포함해 많은 사람들의 부단한 노력에 힘입어 추진 가능하였다. 지역 주민들은 포인트 알파를 보존해야만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시설물과 지역을 원형 그대로 보존함으로써 그 역사와 교훈을 전해야만 한다고 믿었다. 미군 관측소였던 포인트 알파의 역사는 냉전과 독일 분단의 역사인 동시에 이 장소를 보존하기 위해 싸웠던 헤센 주와 튀링엔 주 주민들의 끊임없는 참여와 용기를 보여준 역사이기도 하다. 주민들의 이러한 열정 덕분에 현재 포인트 알파는 기념비적인 기억과 만남의 장소가 되었으며, 지난 10년 동안 많은 청소년들을 포함하여 약 100만 명의 방문객들이 다녀간 명소 중의 명소로 다시 태어났다.

포인트 알파는 지속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배움의 장소인 동시에 지역에만 국한되지 않은 문화 분야의 등대 역할도 하고 있다. 또한 구동독 사회주의통일당 정권 희생자들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는 역할도 하고 있다. 그 희생자들의 운명과 삶에 관한 이야기를 이곳 포인트 알파에서 기록하며 알리고 있다. 앞으로도 포인트 알파는 분단의 극복과 평화의 길을 향한 가치를 전달하며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리카르다 슈타인바흐 / 독일 포인트 알파 국경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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