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의 고향을 가다 | 한국 CF계의 거장 케이블TV 시대 포문 열다 2017년 1월호
명사의 고향을 가다 | 배승남 용산케이블TV 창업주
한국 CF계의 거장 케이블TV 시대 포문 열다
배승남 회장은 한국 CF계의 전설에 속하는 감독이다. 그는 평양 사나이다. 그의 출생지는 평양시 서구 기림리 135번지이다. 평양 서쪽에 사는 사람들이 평양 시내에 들어가려면 배 부자네 집 드넓은 땅을 가로질러야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림리 일대를 아예 배 부자네 동네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배 부자, 배승남 회장의 아버지 배형진 옹은 일찍이 만주로 건너가 무역업을 하였다. 그렇게 해서 번 돈을 평양 서쪽 땅을 사드리는 데 투자하였다. 해방될 때 4살이었던 배승남을 집안 어른들은 일본 이름 ‘아끼오’로 불렀다. 손위 누나는 ‘아끼코’였다. 드넓은 과수원에서 누나 아끼코를 소리쳐 부르면 아끼코 누나는 저 멀리서 달려와 ‘내 동생 아끼오’라고 불러주며 꼭 안아 주었다.
그러다 해방이 되었는데, 만주에서 급히 돌아온 아버지가 어머니를 불러 이렇게 말했다. “여보, 세상이 이상하게 돌아가오. 나는 남아서 재산 정리를 할 테니까 당신이 먼저 아끼오를 데리고 서울로 떠나시오. 시간이 없소. 어서.” 이렇게 해서 이모네와 함께 소년 배승남은 어머니의 등에 업혀 삼팔선을 넘게 되었고, 그것이 아버지와 누나 아끼코와의 영원한 이별이었다. 1946년 봄의 일이었다.
서울 종로구 수송동 39번지 화신백화점 바로 뒤에 집을 마련하였다. 아끼오는 이종사촌 형과 화신백화점에 가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노는 것이 그렇게 좋았다. 그러다가 아끼오는 종로국민학교에 입학하였다. 입학할 때 어머니는 이모부와 상의해서 아끼오라는 일본식 이름을 버리게 하고 ‘배승남’이라는 우리식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때 처음 배승남은 어머니에게 물어보았다.
“오마니, 아끼오라는 이름은 무슨 뜻입네까?” 어머니가 찬찬히 설명해주셨다. “너희 아바지가 그래도 생각해서 지어주신 이름이다. 가을 남자, 추남(秋男)이라는 뜻인데 썩 예술적인 이름이지. 하지만 일본식 이름이니까 이제는 버려야지. 해방된 나라에서는 우리말과 우리글 그리고 자랑스러운 우리 이름을 가져야하지 않겠니.”
얼마 지나지 않아 6·25가 터졌다. 부산 토성동으로 피난을 가 어렵게 지냈고 영도다리 위에서 평양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다시 서울로 올라와보니 화신백화점의 에스컬레이터는 부서져 있었고 화신백화점 네거리에 시체가 무더기로 쌓여있었다. 전후의 황량한 서울거리에서 평양소년 배승남은 집 가까이에 있는 단성사를 드나들기 시작했고 외국 영화에 심취하게 되었다. 먹을 것도 없고 청소년들을 위한 건전한 놀이문화도 없던 그 시절, 훈육주임 선생님의 눈길을 피해서 영화관에 들어가 영상의 세계에 빠지는 것이 그의 유일한 취미였다.
충무로 길거리 캐스팅, 인생의 터닝포인트로
그 때, 배승남 소년의 마음을 사로잡은 영화가 바로 이탈리아 비토리오 데시카 감독의 <자전거 도둑>이었다. 나중에 깨달은 일이지만 실제로 공장 근로자였던 주인공 안토니오와 거리의 부랑아였던 브루노가 열연하는 모습은 꼭 배승남 자신의 신세를 대변하는 것 같았다. 그 후에는 미국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보며 빅터 플레밍 감독으로부터 웅장한 스케일의 영화 전개 과정을 배우고, 배우 크라크 케이블과 비비안 리로부터는 연기에 몰두하는 열정과 예술 세계에 탐닉하는 진지한 자세를 배웠다.
대학에 진학한 배승남은 캠퍼스 분위기에 실망하였다. 전쟁 끝에 어렵게 모인 젊은이들이 피난지에서 얻은 트라우마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공부보다는 휴강하는 것을 좋아하고 도서관에 가기보다는 막걸리집으로 먼저 달려가 허무에 젖는 그런 소모적인 분위기가 싫었다. ‘내가 이러려고 대학에 왔나… 이럴 바엔 내가 좋아하는 영화 쪽으로 일찌감치 빠지자! 등록금이 아깝다.’
이렇게 해서 그날로 그는 충무로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충무로 영화판을 기웃거리고 있을 때, 굵은 뿔테 안경을 끼고 진지한 얼굴을 한 감독이 불러 세웠다. 요즘 말로 ‘길거리 캐스팅’제의를 받은 것이다. “어찌 보면 크라크 케이블처럼 불량스럽게 보이고, 어찌 보면 안쏘니 퀸처럼 팍 튀는 인상이라서 쓸모가 있겠는데요? 이 얼굴에 세월이 가서 주름이 생기면 더 멋있겠습니다. 단역이라도 시켜보지요 뭐.”
일이 쉽게 풀렸다. 그를 캐스팅 한 중후한 신사는 김기영 감독이었고, 카메라 테스트를 했던 사람은 이성휘 촬영감독이었다. 그들은 당시 라디오 드라마로 성공했던 <현해탄은 알고 있다>를 영화로 찍고 있는 중이었다. 얼마 뒤부터 이성휘 감독은 아예 카메라를 배승남에게 넘겨주면서 카메라에 대해 익히도록 했다. 영화 <현해탄은 알고 있다>를 끝내고 난 김기영 감독은 정일성 촬영감독과 콤비를 이루었다. 텁석부리 수염을 기른 정일성 촬영감독은 과묵하고 심지가 깊은 분이었다. 영화 <화녀>를 찍으면서 배승남에게 뼈 있는 말을 해주었다.
“이 바닥에서 정말로 성공하려면 남이 안하는 분야를 생각해서 개척해야 한다. 영화 이거 굉장히 어렵고 힘든 거야. 넌 아직 젊으니까 영화 말고 광고를 해보거라. 한국 광고는 아직 멀었고 광고를 배우려면 일본으로 가야지. 하지만 직접 일본으로 가긴 어려우니 부산으로 내려가서 일본 텔레비전을 보고 몸으로 익혀보는 게 어떻겠냐.”
몸 아끼지 않는 투혼 … 한국 CF계의 ‘큰 손’ 되다
정일성 감독의 조언을 듣고 부산으로 내려와 허름한 여관방에 자리를 잡은 청년 배승남은 하루종일 일본 텔레비전 방송 내용을 공부하였다. 특히 일본 CF를 분석하기 시작하였다. “저 찰나의 예술이 어떻게 해서 사람의 머리를 스치고 가슴에 꽂히게 되는 것일까?” 그 원리를 추적했다. 얼굴이 반쪽이 되어 다시 서울로 올라온 배승남을 보고 정일성 감독은 설렁탕을 사주면서 격려해주었다. “잘 생각했다. 지금은 우리나라에 텔레비전도 별로 없고 사람들이 상업 광고가 뭔지도 모르고 있지만, 머지않아 텔레비전 시대를 맞게 될 것이고 산업계가 제대로 발전하면 CF 시장도 어마어마하게 성장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너의 시대도 열리게 될 거야.”
1970년대가 열렸다. 베트남전에 참전한 군인들이 돌아오며 텔레비전을 가져왔고 중동에서 고생하고 돌아온 근로자들도 텔레비전을 사들고 왔다. <KBS>와 <MBC>, <TBC>에서 텔레비전 방송을 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대한민국에도 텔레비전 시대가 열린 것이다. 제약회사들이 제일 먼저 광고를 시작하였다. 배승남은 자신의 아명 ‘아끼오’를 떠올리며 ‘추남 감독’이라는 예명으로 TV 광고제작을 시작했다. 그는 슬라이드로 만들어지던 광고물을 동영상으로 변화시키면서 한국 최초의 동영상 광고시대를 열었다. OB맥주, 해태제과, 종근당 등의 일이 쏟아져 들어왔다.
특히 일동제약의 ‘아로나민’이라는 제품 광고를 맡았을 때는, 시나리오를 쓰는 단계부터 스텝을 구성하는 일까지 일체를 턴키베이스로 계약하고 마지막 카피 쓰는 일까지도 자신이 직접 하기로 하였다. 약 광고라고 해서 너저분한 인상을 주지 않고 시리즈 형태로 구성된 기업광고를 하기로 하였다. 아주 획기적인 발상이자 모험이었다.
배승남은 촬영을 위해 서해안 고군산 열도에서 출발하는 포경선을 탔다. 15명의 스텝과 함께 남해안의 한려수도를 돌아 부산 오륙도를 휘감고 장승포 앞바다에 이르렀을 때, 망대 위에 있던 포수가 소리쳤다. “고래다!” 추남 감독은 배 난간에 촬영대를 설치하고 자신을 그 촬영대에 밧줄로 꽁꽁 매단 후, 카메라를 솟구치는 고래에 맞췄다. 바닷물을 박차고 뛰어오르는 고래의 꼬리에 포커스를 맞춘 후 카메라 앵글을 고정시켰다. 그렇게 해서 30초의 살아있는 영상을 따낼 수 있었다. 고군산 열도에서 출발한지 15일 만에 포착해낸 30초짜리 리얼리즘이었다. 그 화면의 카피는 아주 간단했다. ‘의지의 한국인, 체력은 국력, 아로나민 … 일동제약!’ 단 세 줄의 카피를 위해 15인의 스텝이 15일 동안 고래 떼를 찾아 헤멘 결과, 30초의 광고신을 얻어낸 것이다.
그 다음 작품은 외로운 등대를 지키는 ‘등대수’라는 광고였다. 역시 15명의 스텝을 데리고 부산 오륙도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2주일을 기다렸다. 오륙도 앞바다로 현해탄을 오가는 선박이 긴 고동소리를 울리며 지나갈 때, 등대수가 손을 흔들어주는 장면 한 컷을 위해서였다. 결과는 역시 대성공이었다.
그 다음으로는 경부선 열차가 100km/h의 고속으로 철로 위를 달릴 때, 기관사가 먼 선로를 응시하는 장면을 구상했다. 스파크를 내며 철로 위를 맹렬하게 달리는 기차 바퀴를 찍기 위해 추남 감독은 기관차 밑으로 내려갔다. 자신의 몸을 기차에 동여매고 불꽃 튀기는 기차 바퀴를 추적하였다. 주인공인 기관사가 울상이 되어 부르짖었다. “감독님, 그러다가 죽습니다. 어서 올라오세요. 제발요!” 평양 사나이 추남 감독은 기어이 그 한 신을 찍어내고 기관사를 달래어 무연한 표정을 짓도록 하였다. 기관사는 땀을 닦으며 먼 선로를 응시하였다. 그렇게 의지의 한국인이라는 광고 시리즈가 텔레비전의 화면을 덮었고 일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웬만한 영화를 성공시킨 것보다 많은 액수의 돈을 벌었다. 그래서 그는 후암동에 저택을 짓고 어머니를 모셨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케이블 TV 시대가 열렸다. 추남 감독은 용산케이블TV를 창업하고 회장에 취임하였다. 어머님의 지극하신 치성 덕분이었을까. 용산케이블TV도 순풍에 돛을 단 듯 잘 운영되었다. 미8군에서는 한꺼번에 3천 가구의 시청을 요구해왔다. <AFKN>의 방송망에 광케이블을 연결해주고 상당한 수익금을 벌어들였다. 미8군 사령관과 하원의원이 여섯 번이나 고맙다는 표창장을 전해주었다.
목숨을 걸고 찍은 광고 덕분에 그는 까다롭다는 미국 CLIO 광고상을 네 번이나 수상하였고, 일본 ACC 광고상도 5회에 걸쳐 수상하였다. 지난 1995년에는 세계 인명대사전 <Who’s who in the world>에도 한국의 상업광고 거장이자 케이블 TV 사업에도 성공한 인물로 등재되었다.
고향 가볼 날 기다리며 평화통일 운동 20여 년째
배승남 회장은 평양에 돌아가지 못하는 대신 평화통일 운동에 앞장섰다.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평통) 자문위원을 20년 이상 역임하였고, 평통 용산구협의회장을 3회에 걸쳐 연임하며 지금도 평통 상임이사로 계속 수고하고 있다. 지난 10년 동안은 중국에 건너가 탈북민들을 보살피고, 중국 랴오닝성 당국자들과 도시개발에 몰두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지금도 중국 랴오닝성 잉커우시의 경제기술고문직을 맡고 있다. 요즘 배승남 회장이 골몰하고 있는 일은 ‘영상광고 박물관’을 짓는 일이다. 우리나라 CF 산업이 일어나던 아날로그 시대의 한국 최초 영상광고물들을 후학들이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도록 일목요연하게 차려놓는 일이다. 수 천 점에 이르는 스틸 사진과 CF 모델들의 사진, 그리고 아날로그 시대 때의 그 정겹던 촬영 기자재들을 우리의 젊은이들이 머지않아 한 곳에서 보게 될 것이다. 평양 사나이 추남 감독, 배승남 회장 덕분에!
작가 / 김광휘
댓글 0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