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계리의 스케치 北 | 혼자 추는 왈츠는 왈츠인가? 2017년 3월호
박계리의 스케치 北 63
혼자 추는 왈츠는 왈츠인가?
‘예술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전준호 작가는 “예술은 우리 삶에 던지는 질문이다.”라고 답한다. 예술과 삶의 관계에 집중하고 있는 그는 우리 삶, 그 평범한 일상의 리얼리티를 탐구해 드러내는 작업을 지속해오고 있다. 진지할 수밖에 없는 작업이지만 그의 작품에는 블랙 유머와 같은 위트가 공존한다. 그만의 매력이다.
오늘은 그의 영상 작품 <형제의 상>을 감상하고자 한다. 아름답고 경쾌한 요한스트라우스의 왈츠 곡에 맞춰 두 남자가 각기 춤을 추고 있는 영상이다. 두 남자는 아름다운 선율에 맞춰 각각의 포즈에 열중하는 가운데 부닥치듯 스치다가 다시 멀어짐을 반복한다. 이 둘은 서로 다른 군복을 입고 있다. 조금 더 예민한 관찰력을 가진 독자들은 이 <형제의 상>이 전쟁기념관에 설치되어 있는 조각 작품 <형제의 상(像)>과 매우 닮아 있음을 알아차릴 것이다.
서울에 있는 전쟁기념관에 설치된 기념조형물인 <형제의 상(像)>은 건축가 최영집, 조각가 윤성진, 화가 장혜용이 함께 작업한 작품으로, 폭 18m에 높이 11m의 대형 작품이다. 이 작품은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작품에 등장하는 두 남자는 형제다. 키가 큰 군인은 한국전쟁 당시에 대한민국 국군 장교로 참전했던 형 박규철을 표현한 것이며, 그가 끌어안고 있는 병사는 조선인민군 병사로 참전했던 동생 박용철이다. 강원도 원주에서 일어난 치악고개 전투에서 적으로 만난 이들의 비극을 소재로 만들어진 청동 조각상이다. 조형물 하단에는 대한민국 각지에서 수집된 화강암 조각으로 제작된 반구형 돔이 설치되어 있는데, 이는 수많은 순국선열들의 희생을 의미한다.
서로 나뉘어 각자의 춤에만 몰두하는 비극의 형제
작가는 이 <형제의 상>의 이미지를 가져와서, 부둥켜안고 있는 두 남자를 분리시켜 냈다. 플라스틱으로 만든 병정은 마치 장난감을 연상시키는 가벼움과 친근감으로 우리 앞에 다가왔다. “우리의 삶을 좌우하는 현실 속 결정적 사건들이 미디어의 ‘농간’을 통해 사소한 이미지로 소비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작가의 발언은 그가 육중한 청동 조각을 가벼운 플라스틱 병정 장난감으로 변이시킨 이유를 가늠하게 한다. 그리고 이 병정 밑에는 모토와 센서를 달아서 요한스트라우스의 왈츠 곡에 맞춰 부드럽게 춤을 출 수 있도록 만들었다.
비극의 형제가 부둥켜안고 통곡했던 전쟁의 아픔은 해체된 듯 보인다. 부드럽고 우아한 요한스트라우스의 왈츠 곡에 맞춰 두 남자는 유려한 춤을 춘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만 몰입한 춤이다. 각자의 춤에만 집중하고 있는 이 두 남자의 모습 속에서 아이러니하게도 한반도가 보인다. 전력을 다해 자신이 보고 싶은 곳만 보고 있다는 점이 그렇다. 세련된 음악에 맞춰 열심히 춤을 추는 병정들의 모습이 동존상잔의 비극을 품은 전쟁기념관 기념비 조각의 리얼리티를 그대로 가지고 온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 앞에 실존하는 비극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더 진한 공감이 된다.
왈츠 속 두 남자는 각자 열심히 춤을 춘다. 아름다운 선율에 맞춰 춤을 추다가 서로 부딪히기도 하지만 금세 다시 흩어지고 스쳐지나간다. 그렇다고 완벽히 분리되지는 못해서 끊임없이 서로를 끌어당기지만 이내 그것이 목적이 아닌 듯 다시 흩어진다. 이 스텝에 이미 익숙할 대로 익숙해진 병정들은 왈츠의 리듬에 맞춰 바삐 움직인다. 열심히 움직여도 보고 나름의 최선을 다하지만, 각자 자신의 포즈에 취해있어서 옆 사람을 돌아보지 못하는 저 모습. 지금 남과 북의 현실과 겹쳐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왈츠는 함께 추어야 하는 춤이다. 아무리 혼자 세련되고 화려하게 리듬을 탄다 해도 혼자 추는 왈츠는 왈츠일 수 없다.
“현실을 비판하지 않고서는 현실의 리얼리티를 제대로 반영할 수 없다.”는 작가는 냉소적 리얼리즘을 독특하게 표현해내며 우리에게 묻는다. 제아무리 훌륭한 무용수가 춤을 추더라도 혼자 추는 왈츠가 왈츠일 수 있을까?
박계리 / 미술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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