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세히보기 2017년 4월 1일

박계리의 스케치 北 | 사라지는 것들을 붙잡기 위해 2017년 4월호

박계리의 스케치 北  64

사라지는 것들을 붙잡기 위해

김학수, , 45x68cm, 1998년

김학수, <평양 남산현 교회>, 45x68cm, 1998년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주최의 ‘한국 근현대예술사 구술채록’ 프로젝트를 통해 문헌사 중심으로 미술사를 연구하던 화가 김학수(1919~2009)를 만난 적이 있다. 필자가 기억하는 그는 모더니즘 시대를 온몸으로 역행하는 예술인이었다. 당대보다 한 발 앞선 미래의 시각언어에 집중함으로써 보다 새로운 언어로 그려내야 할 것을 요구받던 시대의 한 가운데서 오히려 과거의 기억을 더듬던 화가였다.

김학수는 40년 넘게 하루도 빠짐없이 운동을 해왔던 사람이었다. 그렇게 얻게 된 건강으로 매일 붓을 들었다. 단신으로 월남한 그 모습 그대로 가족의 사진들을 벗 삼아 홀로 집을 지켰다. 새해를 맞아 배달되어 온 많은 카드 속의 인간적인 구절들, 그 추억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당대 미술계의 주류였던 김은호의 촉망 받던 제자였지만, 미술계의 유행을 외면한 채 중심 담론에서도 벗어나 있었던 터에 미술사학계에서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인간적이라고 하기에는 자신에게 너무도 철저했지만 그러한 절제 속에서도 따뜻함을 확산시킬 수 있었던 사람, 월남 화가 김학수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월남 화가 김학수, 보이지 않는 기억을 그리다

김학수는 1919년 평양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필방(筆房)을 운영하며 붓을 만들어 팔았다. 김학수는 자연스럽게 붓을 가지고 놀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15세 되던 해에 아버지를 여의고, 18세 때에 어머니마저 세상을 떴다. 김학수는 어린 두 동생과 80세에 접어든 조모를 책임졌다. 양말공장을 전전했고 가구점에서 유리화를 그렸으며 공예품에 장식하는 소일로 돈을 벌었다. 소년가장으로 생업의 전선에서 이러저리 표류했다.

그러던 김학수에게 삶의 전환점이 온다. 1937년에 평양에서 서화동호인들의 모임인 ‘평양서화동호회’가 발족됐는데 김학수는 우연히 이 동호회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의 재능과 삶의 의지를 기특하게 여긴 회원들은 김학수에게 미술을 지도했다. 이후 동호회를 중심으로 평양화단에서 활동하던 김학수는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32세의 나이에 대동강을 건너 월남했고, 이후 남한에서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붓을 놓지 않았다.

김학수는 역사풍속화를 주로 그렸다. 서민들의 일상이 그대로 투영된 그림이었다. 그러나 그가 담아내고자 했던 시대는 현대가 아니라 과거였다. 김학수 작업의 특징은 사라지는 것들을 사라지기 전에 기록하고자 한 점이었다. 한강변을 따라 몇 십 년간 그린 한강풍속도를 작업할 때에도 그 순간의 한강을 있는 그대로 그리지 않았다. 바로 직전 시대의 한강변을 기억하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만나서 들은 이야기와 문헌기록을 철저하게 그림으로 복원해냈다. 아파트가 줄지어 들어서기 이전의 한강, 이념에 따라 분단되기 이전의 한강을 그렸다. 그렇게 김학수는 평생의 기억에서 역사를 꺼내 그리다가 홀로 떠나갔다.

분단으로 인한 가족과의 이별은 그에게 커다란 트라우마를 남겼다. 사라짐, 부재 그리고 결핍에 대한 기억과 상처는 그로 하여금 변화하는 새로운 것에 대한 관심보다는 사라지는 것을 붙잡고자 하는 욕망에 더 집착하게 했다. 이러한 트라우마와 욕망은 그로 하여금 자신이 기록하지 않으면 사라질 역사들을 찾아 아카이브 작업에 매진하게 했고, 이를 표현하는 과정에서 제기될 고증 문제에 대해서도 더욱 철저한 원칙을 고수하게 했다.

김학수가 왜 그토록 사라져 가는 것들을 붙잡으려 했는지 내면을 파고 들어가면 그 속에서 우리는 20세기의 파란만장했던 근대사를 만나게 된다. 전쟁의 상흔으로 모든 것이 파괴되고, 현대화라는 미명 아래 전통과 단절되던 시대, 분단이라는 인위적 장벽 앞에서 북쪽의 땅과 사람들을 자신의 인식지도에서 사라지게 할 것을 암묵적으로 강요받은 시대. 김학수는 그 짐을 모두 지고 살아내야 했다. 그 치열한 현장을 일상으로 겪어낸 평범하고 성실한 한 작가의 트라우마는 기억에서조차 사라지면 영영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릴 것 같은 삶의 장면들을 붙잡고자 하였던 것이다.

사라지는 것들을 기록하고자 한 그의 욕망은 정신과 태도의 문제로까지 확장되었다. 시대적으로는 자신이 살았던 당대의 역사를 그린 기독교 역사화로도 나아갔다. 이를 통해 더 이상 만날 수 없게 된 평양의 사람들을 기억해 냈으며, 그들과 함께 했던 행복한 순간들을 형상화 해 자신의 트라우마를 치유하고자 했다.

그가 그린 분단 이전의 역사풍속화에는 시대를 기록한 문헌뿐만 아니라 20세기를 꿰뚫었던 작가의 경험과 기억, 인터뷰를 통해 알아낸 장면들이 모두 녹아 있다. 이러한 데이터들의 조합은 결국 기억의 지층 간의 융합이었다. 따라서 그의 화면이 얼마나 사실성을 담보하고 있는지 논하는 것보다는, 그의 작품이 과거와 현재의 관계적 양상을 드러내며 기억의 역사로서 발현되고 있다는 사실에 더욱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박계리 / 미술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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