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세히보기 2018년 1월 3일 0

북한 장마당 인사이드 | 불패신화 외화(外貨) 2018년 1월호

북한 장마당 인사이드 12

불패신화 외화(外貨)

정은이 / 통일연구원 부연구위원

1990년을 기준으로 북한 시장에서 상품 공급능력이 향상되었다는 근거가 적지 않다. 통일연구원의 북한시장조사 연구팀에 의하면, 구글어스(Google Earth) 및 탈북자 면담 설문조사 등에 입각해 북한 전역의 공식시장 분포 및 운영실태 등을 조사한 결과 공식시장은 2016년 12월 현재 404개이며 관련 종사자는 110만 명에 이른다.

상품단가(P)의 상승과 관련된 근거도 적지 않다. 여기서 P는 단순 물가상승이 아니다. 오히려 물가는 2013년 이후 상당히 안정적이다. 이는 고부가가치 상품의 증대를 의미한다. 물론 쌀, 밀가루, 야채 등 대량 소비품은 여전히 시장에서 내화로 거래되지만 휴대전화, 태양광판, 주택, 정제유 등 100% 외화로만 거래되는 고부가가치 상품도 등장했다.

휴대전화, 태양광판, 주택, 정제유 등은 외화로만 거래

즉 현재 북한의 시장은 같은 시장이라고 해도 그 성격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내화로 거래되는 저부가가치의 시장과 외화로 거래되는 고부가가치 시장으로 분류되는 이중구조에 놓여 있는 것이다. 전자가 진입장벽이 낮다면, 후자는 진입장벽이 높다. 여기서 진입장벽이 높다는 말은 바꿔 말하면 관료의 권력이 절대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게다가 고부가가치의 상품을 파는 시장이라면 관료들의 시장 참여를 유인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실제로 2014년 평양의 평천구역에서 아파트 붕괴 사고가 발생했을 때 준공 검사도 마치기 전에 이미 주민이 입주했다는 사실은 아파트 거래가 시장원리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고위 관료가 나와 대대적으로 사과했다는 사실은 관료도 부동산 시장의 이익배분에 참여하고 있음을 뜻한다.

바꿔 말하면 관료도 점차 새로운 ‘돈주’의 대열에 합류하고 있으며 시장에서의 권력은 외화를 쥔 주체에 집중되고 있음을 뒷받침하는 것이고 또한 이는 그만큼 북한의 시중에 많은 외화가 있으며 상품으로 거래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실제 북한에서는 시장의 발달과 함께 새로운 직업군이 생겨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데꼬’다. ‘데꼬’는 지레 또는 도와주는 사람을 의미하는 일본어 ‘데꼬(梃子, テコ)’에서 비롯된 말로, ‘카라(空, カラ :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음)’ 즉, 맨몸으로 정보만 가지고 돈을 버는 일종의 ‘거간’ 또는 ‘중개인’의 의미로 사용된다. 품목에 따라서는 ‘탄(炭)데꼬’, ‘쌀데꼬’, ‘기름데꼬’, ‘집데꼬’, ‘돈데꼬’ 등 다양하게 지칭되고 있다.

이러한 정보 매개자의 등장은 북한 시장의 구조적 변화를 뒷받침하기에 충분하다. 시장 참여자의 정보 접근이 보다 용이해졌다는 사실은 역으로 정보 부족으로 인해 발생되는 손실 또는 정보 획득의 비용과 시간이 그만큼 절약되어 자원 배분의 효율성을 증대시키고 시장의 효율성을 상승시킬 수 있다.

이와 같이 북한에서 데꼬는 최근 시장의 확대와 함께 생겨났지만 ‘돈데꼬’의 출현은 1970년대 중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북한 당국은 1970년대 중반 후계자 업적 쌓기와 함께 재원 마련을 위해 당·군 등 특권기관의 외화벌이 사업을 허용했다. 이때 수입품만 전문적으로 취급하고 외화로만 구매가능한 외화상점도 함께 설립됐다. 문제는 공급이 극도로 부족한 북한에서 외화 상점에 대한 수요는 상당했지만 일반인은 이에 접근할 수단이 없어 이용이 극히 제한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북송사업을 통해 북한에 입국한 재일조선인 귀국자 등 해외연고자들이 1970년대 말부터 조선은행 또는 친척방문을 통해 외화를 송금 받을 수 있게 되자 일반 주민의 욕구가 상당부분 충족되었다. 해외연고자와 일반 주민 간 환전이 발생하였고 이들을 중개해 줄 암달러상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암달러상은 1980년대 중국의 개혁·개방 바람과 맞물려 확장되었다. 당시 중국은 개혁·개방과 더불어 일부 고소득층이 생겨났지만 이들의 소비수준, 즉 욕구를 충족시켜줄 만큼 경제가 뒷받침되지 못했다.

이 틈을 일본제 상품으로 무장한 보따리 무역상이 메워나갔다. 때맞춰 북한은 중국·일본을 비롯한 해외동포의 친척 방문을 허용했는데, 이들과 함께 유입된 물자가 암시장에서 판매되었다. 이때 TV, 냉동기 등 일본 중고 가전제품은 북한에서도 고가에 거래되지만, 일단 중국으로 건너가면 가격이 수배 급등했다. 공급이 제한된 상황에서 판매자는 가격 결정의 힘을 가졌고 이에 따라 해외친척 방문으로 북한에 오게 된 북한 또는 중국 연고자는 자연스럽게 보따리 무역상이 되었다.

·중교역 보따리 무역상 늘며 외화 유통량 폭발적 증가

이 과정에서 양자 간 물물교환이 증가하면서 필연적으로 외환 거래가 발생하였다. 무엇보다 보따리 무역상이 중국에 가져간 것은 비단 물건만이 아니었다. 증언에 따르면, 1980년대 후반부터 일본 엔(円) 등 외화를 비롯해 심지어 금이 중국에 유입되었다. 여기서 금이 거래되었다는 사실은 당사자 간 외화 거래량이 상당했음을 추론하는 근거가 된다. 금은 부피에 비해 단가가 매우 높아 한번 거래될 때 외화 유통량이 많기 때문이다.

한편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을 경험하면서 북한에서 무역회사에 대한 규제가 완화되자 대량으로 상품이 들어오게 된다. 따라서 기존의 화교나 중국 연고자에 한정된 상품 공급자가 독점 가능했던 구조는 무너지게 되었다. 즉 북한 사람 누구나 장사를 할 수 있게 되면서 주민 중에는 집까지 담보로 걸고 돈을 빌려 장사를 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일반인도 자금만 있으면 회사의 ‘와꾸’(ワーク : 무역허가권)를 빌려 중국과 교역할 수 있게 되었으며 무엇보다 주목할 점은 민간인 중에도 중국과 대량으로 상품을 교역하는 ‘왕(王)도매상’이 생겨났다는 점이다. 특히 왕도매상은 중국에 교역 파트너를 두고 중국에 직접 가지 않으면서 전화상 주문만으로 앉은 자리에서 상품을 받아볼 수 있게 되었다.

이와 같이 북·중교역의 증가는 북한에서 달러의 영향력을 증대시켰지만 무엇보다 2009년의 화폐개혁으로 인해 달러는 저장의 수단뿐만 아니라 거래의 수단으로써의 기능도 더해지게 되었다. 이는 외화가 신뢰의 상품으로써 구축되는 계기가 되었고 한편으로는 그만큼 북한 경제의 개방성, 나아가 주민의 구매력이 증대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댓글 0개

의견을 남겨주세요

댓글을 달기 위해서는 로그인 해야 합니다.

좋아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