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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동네 리얼스토리 |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2018년 2월호

윗동네 리얼스토리 84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이지명 / 국제펜(PEN)망명북한작가센터 이사장

1990년대 말 북한 전역이 ‘고난의 행군’으로 한창 굶주림에 몸살을 앓던 때다. 어느 날 지인들을 불러 한잔 하려고 시장에 나갔다. 돈깨나 주무르는 사람들이라 늘 신세만 진 것에 보답하고 싶어서였다. 시장 초입에서 나는 어떤 사내와 맞닥뜨렸다. 꾀죄죄한 형색만 봐도 꽃제비가 분명했다. 사내는 가족이 굶어죽어 가고 있으니 한 푼만 도와달라고 사정했다. 생각할 여지도 없이 나는 아침에 아내가 넣어준 돈 중 100원짜리 지폐 한 장을 얼른 꺼내주었다. 당시 100원이면 입쌀 1.5kg을 살 수 있는 돈이었다. 자칫 하다간 또 다른 꽃제비들에게 둘러싸일 수도 있어 나는 사내의 인사도 듣는 둥 마는 둥 급히 자리를 떴다.

한 달 쯤 지났을 때 시내 중심을 가로질러 흐르는 강둑에서 소를 도둑질했다는 죄명으로 총살당하는 그 사내를 보았다. 당시 원유 고갈로 북한 농장들에서 소는 사람 이상으로 귀히 대접받던 때다. 잡은 소고기 한 점 먹어보지 못하고 도살 현장에서 체포되어 세상을 등지는 사내를 보면서도 나는 동정의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북한에서의 현지 총살은 당시만 해도 심심찮게 일어나는 일이었다. 생계형 범죄라 어찌 보면 가슴 아플 수도 있으나 하도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던 때라 총살 장면까지도 평범한 일상처럼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김순애라고 합니다. 채탄공 일만 면하게 해주세요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어느 날 밤. 아내가 딸과 함께 친정으로 가고 혼자 집을 지키고 앉아 있는데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들어온 사람은 뜻밖에도 17살 쯤 보이는 어린 여자였다. 무슨 일이냐고 묻자 무림탄광에서 채탄공으로 일하는 김순애라고 소개하면서 탄광 지배인을 만나 한 번만 도와 달라는 청을 했다. 무림탄광 지배인과 내가 친한 사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여자는 채탄공 일만 면하게 해주면 평생 은혜를 잊지 않겠다며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북한 노동법에서 여자는 직접 부문인 채탄 일을 시키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그 또래면 컨베이어 운전이나 취사원, 사무실 같은 곳에서 일해야 마땅한데 왜 노동법에도 없는 막장의 채탄 일을 한다는 것이 언뜻 믿어지지 않았다. 무슨 사연이 있다고 단정한 나는 마침 다음 날 탄광에 볼일도 있고 해서 자전거를 타고 6km 떨어진 무림에 갔다.

가는 도중 속으로 탄광 지배인을 얼마나 욕했는지 모른다. 원래 탄광이라는 곳은 거칠기 짝이 없는 자들이 일하는 곳이었다. 전과자나 혁명화 대상들, 행정 처벌로 불평과 불만이 가득한 자들로 채워진 작업장이기도 했다. 거친 사내들만 득실득실한 막장에 어린 여성을 들여보내 일을 시킨다는 것은 특별한 사연이 없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지배인을 만나 전후 사연을 들은 나는 허탈해지는 마음의 공허감을 달랠 수 없었다. 김순애라고 하는 그 여성은 알고 보니 1년 전 소도둑으로 사형 당한 그 사람, 즉 바로 내게 시장 초입에서 몇 푼 구걸하던 사람의 딸이었던 것이다. 당시 시내에서 나를 두고 ‘작가 선생’으로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었음은 나만 의식하지 못한 일이었다. 순애는 그때 내게서 돈을 받아 쌀을 사갖고 집에 간 아버지로부터 돈을 얻게 된 사연을 듣고 속으로 얼마나 고마워했는지 모른다고 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소도둑으로 처형을 당한 이후 순애는 처단자 가족이란 죄명을 쓰고 무림탄광 채탄공으로 일하게 되었다. 막장에서 여러 사내들에게 모욕과 성폭력까지 당해도 처단자 가족이란 주홍글씨 때문에 어디 신고 조차 할 수 없는 처지가 서러워 눈물로 하루하루를 버티던 순애는 생각 끝에 나를 찾아오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사실 내겐 시 당위원회나 권력 기관에 아는 사람들이 있어 순애 같은 여자애들을 위해 뭔가 해줄 수 있는 힘이 있었다. 그날 순애는 어려운 사람을 잘 도와주는 선생님이어서 한 번 용기를 내 찾아뵙게 되었다고 말했다.

순애야, 나도 똑같은 처지였단다

그러나 순애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평범한 사람이 아닌 처단자 가족이었기 때문이다. 지배인으로부터 이 일에 개입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말을 듣고 나는 이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 후 순애는 소문도 없이 어디론가 사라졌다면서 보위부의 처사라는 말을 지배인에게서 들었다. 나는 지금도 간절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며 도움을 청하던 순애의 눈길을 잊지 못한다. 작가여서 사회적 지위도 있고 안면도 있어 뭔가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 믿었을 순애. 그러나 나 역시 그러한 정치적 문제에 개입할 수 없는, 어찌 보면 자신과 똑같은 처지였음을 순애가 몰랐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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