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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동네 리얼스토리 | 살아봤으니 그 삶을 안다 2018년 4월호

윗동네 리얼스토리86

 

살아봤으니 그 삶을 안다

 이지명 / 국제펜(PEN)망명북한작가센터 이사장

지난 2016년 5월 한국통일문학포럼 소속 작가들과 함께 압록강 유역을 답사하는 기회가 있었다. 탈북한 사람은 나 한 사람이었다. 일행을 태운 버스가 강을 낀 도로로 달려 강과 건너편인 북한 내부 상황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생소하고도 아픈 정경을 저마다 카메라에 담기에 여념이 없었다. 참가자들은 생경하거나 이해되지 않는 것은 나에게 물었다.

강기슭을 따라 전기선이 늘여진 철길이 쭉 놓여있었는데 세 시간을 달렸지만 레일 위로 달리는 열차는 볼 수 없었다. 비포장인 도로 역시 차 한 대 없이 조용했고 이따금 달구지가 다니는 것이 보였다. 간혹 도로에 서서 흰 연기를 피워 올리는 자동차가 보였는데 차에서 왜 연기가 나는지 내게 물었다. 그것이 목탄차라고 하자 목탄차가 무엇이냐고 되묻는다.

나무를 때 자동차를 굴린다고?

나는 속으로 ‘작가라는 사람들이 어떻게 목탄차도 모를 수 있을까?’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나이가 많은 분들은 “왜정 때 그런 차들이 다녔다”며 “휘발유가 아닌 숯으로 달리는 차”라고 한다. 그러자 젊은 작가 한 명이 북한에 무슨 숯이 그렇게 많아 자동차 원료로 쓰냐고 묻는다. 나는 차근차근 설명했다. 말 그대로 숯이 없어 참나무나 박달나무 단풍나무 등 단단한 나무들을 토막 내어 적재함에 붙인 로(爐)에 넣어 때면서 가스를 얻어 달린다고 말했다.

말하자면 대용 연료인데 참가자들은 어떻게 휘발유를 대신하는지 여전히 의문인 듯 보였다. 그래서 가다가 서고, 서면 가스를 올리려 저렇게 길가에 세워놓고 연기를 피워댄다고 말하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차 밑에서 열심히 풍구를 돌리는 사람이 어렴풋이 보였다.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맞은 편 높 낮은 산이란 산은 모두 벌거숭이였다. 심지어 경사 30도에 이르는 곳에도 밭이 있었다. 저런 급한 경사에서 어떻게 농사를 짓느냐며 모두 놀란다. 5월이라 밭을 일구고 씨를 뿌리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저러다 발을 헛디뎌 목숨을 잃는 일까지 심심찮게 일어난다고 하자 모두 깜짝 놀라 나를 쳐다보았다.

중국 지린성 창바이현에 도착해 하룻밤 묵고 이른 아침 마치 약속이나 한 듯 모두 강 유역으로 산책을 나왔다. 맞은 편은 북한 양강도 혜산 시가지가 펼쳐져 있었다. 굴뚝에서 나는 연기가 이른 아침의 무거운 중압에 눌려 하늘로 솟구치지 못하고 도시를 뒤덮고 있었다.

부지런히 오가는 초췌한 사람들도 보였다. 1동에 4세대, 심지어 6~8세대가 있는 일명 ‘하모니카집’이라 불리는 주민 부락이 눈앞에 있었다. 모두 숨을 죽이고 가난에 짓눌린 도시풍경에 넋을 빼앗기고 있었다. 물동이를 이고 손으로 이마에 떨어지는 물방울을 훔치며 걷는 여자도 보였다.

더욱이 가슴 아프게 보인 것은 찬 강물 속에 발을 담그고 뭔가 열심히 줍고 있는 아주머니들의 애처로운 모습이었다. 5월이면 북방에서는 여전히 추운 계절이다. 그것도 이른 아침 시간에 강물 속에 있다니, 보고 있는 사람조차 으스스하게 추워지는 모습이었다.

무엇을 저렇게 줍는 것이냐고 이구동성으로 물었다. 나는 다슬기를 줍는 사람들이라고 말해주었다. 북한에서는 골뱅이라고 불렀는데 누구도 이를 식품이나 돈 되는 자원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러던 것이 의학적으로 간을 보양하고 간암 치료에 좋다며 중국에서 수입해 들여가는 바람에 너나없이 다슬기 잡기에 나섰다는 것이다.

북한산 다슬기 중국에서 인기 너나없이 추운 강물로

애를 쓰며 다슬기를 주워봐야 그리 큰 돈을 만질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거라도 하지 않으면 어쩌랴. 생계를 위한 일이라면 일신의 고달픔도 잊고 애써도 먹고 살기 바쁜 열악한 북한 주민의 삶을 직접 눈으로 보는 사람들의 모습은 애잔했다. 누구도 말을 꺼내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그들에게 저 모습을 보며 무엇을 생각하는지 물었다. 모두 마음이 아프다고 대답했다. 한민족이 겪는 아픈 모습에 눈물이 난다고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는 사람도 있었다. 얼굴을 싸쥐고 실제로 눈물을 쏟는 작가도 있었는데 대체로 여성들이었다.

나는 하고 싶은 말이 있었으나 분위기를 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호텔로 돌아왔다. 그날 저녁 중국산 맥주에 독한 술까지 곁들이며 풍성한 저녁식사를 할 때 아침의 일이 대화에 올랐다. 한 남성 작가가 내게 그때 무엇을 생각했는지 물었다. 나는 그 생활을 직접 겪었기에 주저 없이 지금의 모습에 몸이 떨린다고 했고 북한 주민들이 고질적인 경제난을 벗어나기 위한 기로에서 이제는 우리가 그들 옆에서 안타까운 마음에 눈물만 보이고 있을 때는 지났다고 말했다.

작가들 모두 심중한 표정으로 긍정을 표하듯 머리를 끄덕였다. 이어 이 답사를 통해 조금 더 가까이 북한 주민들의 삶에 다가가 현실을 보는 노력이 중요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한민족이며 헌법에 정한 대한민국 국민들이기에 하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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