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통인터뷰 | “이것이 선무 스타일입니다” 2018년 4월호
통통인터뷰 | 선무(線无) 탈북화가
“이것이 선무 스타일입니다”
조두림 / 본지기자

탈북화가 선무(線无). 탈북화가 선무는 북한에 있는 가족들에게 피해가 될 것을 우려해 얼굴을 노출하지 않고 활동하고 있다. 공적인 자리에서는 마스크나 가면을 착용한다. 본지와의 인터뷰에서도 뒷모습만 촬영하였다.
Q. ‘선무(線无)’라는 가명은 본인이 직접 지은 건지, 의미는?
A. 역사가 있는데요. 2003년 입학한 홍익대학교 미대 재학 시절 남쪽에서 그림 그리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본명으로 활동하긴 어렵고 이름을 하나 지어야겠더라고요. 마침 남한에서 내로라하는 작가들과 모임 중이었는데 시작은 ‘무(无)’였어요. 저는 20년 넘게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는 북한 체제 속에서 살았고, 중국으로 넘어간 이후에는 나라 없는 신분으로 산다는 비참함이 있었어요. 또 남한에 와보니 분단의 비극이 있었죠. 이런 것들이 너무 싫더라고요. 북한에 있을 때는 이데올로기를 당연하게 여겼지만 남한에 와서 살다 보니 그게 없어도 살 수 있더군요. 그래서 “나는 분단선(경계)이 없어지기를 바란다”라는 의미로 가명을 ‘줄 선’ 자에 ‘없을 무’를 써서 선무(線无)라고 짓게 되었습니다.
Q. 혹자는 작품에서의 북한 정치 풍자로 인해 작가를 정치 팝아트 작가로 분류하기도 하는데, 스스로는 본인 화풍에 대해서 어떻게 정의하고 싶은지?
A. 스스로 ‘나의 화풍은 무엇이다’라고 정의 내려 본 적은 없는데요. 사실 저는 정치 팝아트 작가로 분류되고 하는 것에 크게 개의치는 않아요. 그런 부분이 제 작품 활동에 영향을 미치는 것도 아니고요. 일단 제 작품에 북한에서 배운 미술교육, 프로파간다 요소들이 분명히 있기는 하죠. 하지만 그게 곧 ‘북한 찬양’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북한에서는 체제 선전을 위한 프로파간다를 했다면, 남한에서 살고 있는 현재의 저는 ‘나를 위한 프로파간다’를 하고 있어요. 이건 엄청나게 다른 생각인 거죠. 또 세계적으로 이제는 예술의 분야를 가리지 않고 ‘자기표현’을 하는 시대거든요. 괜찮다 싶으면 설치도 하고, 조각도 하고요. 그러니까 스스로도 굳이 화풍이나 스타일을 정해놓고 하는 것은 아니고, 자유롭게 작품 활동을 하고 있어요. 자유롭게요. 시쳇말로 ‘필 받은 대로’ 하는 게 좋은 것 같고, 예술이 재밌는 게 바로 그런 점인 것 같아요.
Q. 김일성, 김정일 등 북한의 최고지도자를 그렸을 때 주변 반응은 어땠는지?
A. 처음에 제가 김일성을 그릴 수 있게 격려해주신 분들 말고는 대부분 “왜 그렸냐?”라는 반응이었죠. 제가 2007년 첫 전시회를 했을 때 김정일 초상화를 걸었다가 경찰 조사를 받았어요. 깜짝 놀랐죠. ‘왜 신고하지?’ 물어보니까 제가 북한 찬양을 했다는 거예요. 일단 김일성, 김정일 얼굴만 있으면 작품 의도와 관계없이 불편한 거죠. 특히 전쟁을 겪으신 세대는 더욱이요. 남한 사회가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어 있는 상태에서 북한 모습이 느닷없이 나오니까 주민들이 신고를 하게 된 거예요. 남한이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생각을 하는 사회라고 봤었는데, 첫 전시에서 그런 경험을 하니까 남쪽도 아직 이데올로기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구나 싶었고, 그러면서 배웠습니다. 내가 몰랐던 남한 사회를 알아가는 과정이었어요.
다음 해인 2008년 부산비엔날레에서는 작품이 철거당하기도 했는데요. 탈북화가 전시는 제가 처음이었거든요. 부산비엔날레 같은 경우는 국가에서 주도하는 행사인데도 불구하고, 작품을 떼가는 황당한 일을 겪은 거예요. 누구도 위로해주는 사람이 없었는데, 처음 보는 외국 작가가 위로를 해주더라고요. “너는 1분 전시했지만 멋진 전시를 했다”며 저한테 박수쳐줬어요. 사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오히려 작품 활동을 더 많이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남북 이데올로기 대립이 너무 뼛속 깊이까지 차있다는 걸 체감하니까요. 내 작품으로 논쟁하고 싸울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서로 어떤 주장을 하는지 알 수도 있을 테고, 그걸 촉발하는 촉매제가 될 수도 있겠더라고요.
Q. 슬럼프는 없었는지, 작품 활동의 전환점을 맞았던 계기가 있다면 무엇인지?
A. 작품 활동을 하기 싫었던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물론 작품에 대한 고민은 계속하죠. 뭔가 좀 더 새롭게 표현하고 싶은 부분에 대해서는 꾸준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만, 홍대에 처음 입학했을 때는 내가 남한에서 그림을 그리고 살 수 있을까라는 걱정을 하기도 했어요. 나는 순수예술을 하는 사람인데 대세는 디자인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제가 경험하고 아는 게 북한이다보니 자꾸 평양의 모습 등을 그리면 교수님들한테 왜 이상한 거 그리냐는 핀잔을 듣기도 했어요. 그래서 ‘나는 여기서 그림 그리면서 살고 싶은데 힘들겠구나’라는 생각을 했었죠.
그런데 제가 대학 3~4학년 때 현장에서 뛰는 강사 선생님들을 보면서 자신감을 얻고 내 갈 길 가면 된다고 다짐하는 계기가 됐어요. 그 신진 강사들이 세상의 미술과 예술 흐름, “이것이 예술이다”라고 할 수 있는 좋은 작품들을 많이 보여주신 게 자극도 많이 됐고요. 저는 그런 것에 대해 전혀 몰랐으니까요. 일단은 이 지구상에 벌어지고 있는 예술 행위들과 그것들을 바라보는, 소위 ‘오픈된’ 생각과 시선을 접하게 됐어요.
또한 진취적이고, 새로운 뭔가를 창조해내는 생각들이었고, 동시에 사람들이 더불어 사는 사회와 동떨어지지 않고 같이 숨 쉬려고 하는 사회적인 메시지들을 전달하는 작가들이 주변에 많았어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사회에 대해서 공부하고 알게 되었고, 남한에 살지 않았기 때문에 몰랐던 기본적 상식 등에 대한 공부를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이런 것도 예술인가?’라고 생각될 정도로 내가 보기에는 말도 안 되는 것들, 그러니까 그 당시 제가 본다는 것은 북한의 시각으로 봤다는 것인데요. 말도 안 되는데 저걸 예술이라고 하고, 그것이 사회에 통용되고 하는 것들이 어떤 의미인지 점차 느끼게 됐어요. 그러면서 ‘어쩌면 나도 할 수 있겠구나’라는 자신감을 얻었죠.
그때부터 이제 ‘내가 무엇을 그려야 하나?’라는 고민을 하게 되었는데요. 저의 그림에서 김일성, 김정일은 빼놓을 수 없는 소재더라고요. 그게 제 삶이었으니까요. 제가 북한에 있을 때 최고지도자는 신적인 존재였어요. 그리고 나의 재능으로 그 지도자를 기쁘게 해주고 싶어서 미술을 열심히 하기도 했고요. 저는 어려서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대학에서 미술교육을 받았고, 군대에서는 선전화가로 활동했습니다. 제 평생이 북한과 최고지도자로 가득 찬 삶이었어요. 물론 작품에서 김 씨 일가라는 민감한 인물들을 다루고 있지만, 이제 어디까지나 그건 저와 제 삶을 이야기하기 위한 것일 뿐입니다.
하지만 작업 초기에는 ‘내가 이걸 이렇게 그려도 되나’라는 두려움이 당연히 있었고, 손이 덜덜 떨릴 정도였어요. 북한에서 그들의 영향력이라는 것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고, 아무리 좋은 내용이라도 함부로 그릴 수 없는 인물들이었거든요. 이러한 상황에서 그들을 비판적 시각으로 캔버스에 옮기려다보니 걱정이 앞서는, 즉 자기검열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처음에는 대단한 용기를 가지고 그렸지만 지금에 와서는 캔버스 안에서 가지고 장난을 치기도 하는 상태가 되었죠. 적어도 지금은 붓이 흔들리는 일은 없습니다.
Q. 작품 활동 초기와 현재 차이점이 있다면?
A. 초기에는 통일을 위해 무엇을 해야만 한다는 ‘사명감’ 같은 게 있었어요. 2008년에 첫 번째 개인전을 열었을 때만 해도 여전히 그러한 마음이 있었고요. 그런데 이제는 거대한 사명감 대신 나 자신을 위해서 하고 있어요. 그림 그리는데 무슨 국가가 필요해요? 이렇게 생각이 바뀌게 된 계기를 굳이 정하라고 한다면 2014년 7월 중국 베이징에서의 개인 전시회가 중국 공안이 입구를 봉쇄하면서 취소된 일인 것 같습니다. 베이징 전시회 준비부터 취소의 과정은 저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나는 선무다(2015)>에 고스란히 기록되기도 했는데요. 이미 경찰 조사, 작품 철거 등의 어려움을 겪어보긴 했었지만 이 사건 이후에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됐던 거 같아요. 복잡한 마음은 물론 세상에 대한 불만도 있었고요.
물론 그전부터 남쪽의 해방 후부터 지금까지 역사 공부도 하고, 다큐도 보고, 주변의 예술가들과 교류도 많이 가지며 이데올로기에 대한 조금 다른 생각을 하게 된 것 같아요. 북한 같은 경우는 온 사회를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만들어가고 남한 사회는 종교, 정치 등 여러 가지 이데올로기가 있는 것들을 보면서 나는 어느 특정한 이데올로기적 조직에 소속되어 있지는 않지만 먹고 살고 있고, 그런 것들이 살면서 보니 최소한 삶에서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결론이 나더라고요. 내가 굳이 어느 조직에 속할 필요도, 그런 이데올로기를 위해서 어떤 사명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고 느끼면서 결국 작품은 개인이 혼자 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재밌게 그리고 있어요.
또한 북한에서 활동과 비교해 봤을 때 차이점을 덧붙이자면 남한에서는 누가 작품을 두고 참견하는 사람도 없고, 내가 내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북한에서의 활동과 너무 큰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죠.
Q. 앞으로도 선전화 풍의 작품을 이어갈 예정인지?
A. 프로파간다 선전화, 이런 것이 북한에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북한 스타일’로 하는 데는 없죠. 북한은 북한만의 스타일을 가지고 놀아요. 북한만의 냄새가 있는 거죠. 그리고 저는 북한에서 선전화가로도 활동했던 작가이기 때문에 그 스타일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술 활동을 함에 있어서 남들이 안 하는 걸 한다는 것은 나와 내 작품을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이런 점을 계획적으로 한 것은 아니고 모든 과정은 자연스러웠어요. 내가 아는 걸로, 내 이야기를 해보자는 것이었죠. 그래서 북한에서 주구장창 해왔던 스타일을 바탕으로 이제는 체제 선전의 목적이 아닌, 나의 생각과 나의 이야기를 넣어서 새로운 것으로 바꾸게 되면 제3의 독창적인 결과물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북한에도 없는 선무만의 스타일인 거죠.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로워질수록 작품은 더 자유로워지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선무 스타일로 좋은 작품들을 많이 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댓글 0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