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 이번 기회로 한반도 역사를 바꿀 수 있다 2018년 4월호
시론
이번 기회로 한반도 역사를 바꿀 수 있다
김영희 / 안보∙국제문제 칼럼니스트 (前 중앙일보 대기자)
지난해를 돌아보자. 북한은 7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14형’ 발사에 성공했다. 미국 본토가 북한의 미사일 공격권에 들었다는 충격적인 순간이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9월 유엔 총회 연설에서 북한을 완전히 파괴(completely destroy) 하겠다고 위협했다. 북한은 11월 ‘화성-14형’을 업그레이드 한 ‘화성-15형’ 발사로 응수했다. 사정거리 1만3천km. 미국 동부의 뉴욕과 워싱턴을 사정거리에 둔 미사일이다.
미국이 가장 두려워 한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북한이 아무리 강력한 핵무기를 가지고 있어도 그것으로 미국을 공격할 운반수단 ICBM이 없으면 미국은 북한의 핵공격을 받을 걱정이 없었다. 그래서 미국의 북핵 대책은 핵무기와 물질의 비확산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완전한 비핵화 아닌 해결책에 동의할 수 없는 한국과의 갭이 컸다.
트럼프가 북한 선제공격을 위협하면서 “전쟁이 일어나도 그곳(한반도)에서 일어나고, 사람이 죽어도 그들(한국인)이다”라는, 참으로 야속하고 무책임한 말을 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북한의 화성 계열 ICBM이 미국의 이러한 여유를 박탈하고 버락 오바마 정부의 ‘전략적 인내’에 안녕을 고하게 만들었다.
트럼프와 김정은은 살벌한 말폭탄 공방을 벌였다. 트럼프는 김정은을 “꼬마 로켓맨”이라고 야유하고, 김정은은 트럼프를 “망령난(dotard) 늙다리”라고 모욕했다. 미국 정부와 의회에서는 북한에 대한 선제공격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한반도 사태는 일촉즉발의 위기였다.
트럼프가 말폭탄으로 김정은과 맞상대를 해준 것은 김정은에게는 축복이었다. 트럼프는 김정은을 일약 세계적인 존재로 격상시켰다. 김정은은 세계적으로 각광을 받는 몸이 되었다.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싶어 하는 김정은의 야망을 트럼프가 충족시켜 준 것이다.
일촉즉발 2017년, 반전의 시작은 평창으로부터
평창이 역사적인 반전을 가져왔다. 김정은의 여동생 김여정이 문재인 대통령의 방북 초청장을 가지고 평창동계올림픽 개막식에 참석했다. 김정은은 신년사에서 말한대로 500명 가까운 선수와 응원단과 삼지연관현악단과 김영남 최고인민대표회의 상임위원장을 단장으로 한 대표단을 보냈다. 폐막식에는 대남정책과 전략을 총괄하는 김영철 통일전선부장을 보냈다.
김영남, 김여정, 김영철, 현송월이 표면에서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독점하는 뒷전에서 두 사람의 북한과 미국 실무 책임자들이 만나 북·미정상회담을 논의하고 있었다. 북한 통전부 부부장 맹경일과 미국 CIA 한국 특수임무센터장 앤드루 김이다. 맹경일은 북한 제일의 대남 전략통이다. 앤드루 김은 폼페이오 중앙정보국(CIA) 국장의 신임이 두터운 사람이다. 의미심장하게도 두 사람의 서울 체류기간이 길게 겹친다.
평창의 반전은 4월 말 판문점 남북정상회담과 5월 북·미정상회담으로 결실을 맺는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북한과의 회담에서 협상 의제는 비핵화다. 미국은 북한과의 대화 조건으로 북한이 비핵화 의지를 확실히 밝힐 것을 요구해 왔다. 김정은은 통 크게 나왔다. ‘그래, 북한 체제의 안전보장을 보장하면 비핵화 하겠다’, ‘한·미연합군사연습도 하던 대로 하라’,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핵·미사일 실험을 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한국의 대북 특사단을 통해 미국에 전했다. 트럼프는 대화를 하지 않을 명분을 잃었다.
지금 서울과 워싱턴에서는 김정은의 대남 및 대미정책 ‘U턴’의 의도가 무엇인지에 대한 ‘게싱 게임(guessing game)’이 봄철 백화만발처럼 무성하다. 워싱턴의 대북 강경론자들과 서울의 보수진영은 김정은이 경제제재 완화와 핵·미사일 완성에 필요한 시간을 벌기 위한 위장평화 전술을 쓰는 것이라고 경계한다. 북한이 과거에 합의를 백지화한 전과가 많기 때문에 그런 의심을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러나 김정은의 숨은 계산이 무엇이든 남북 및 북·미정상회담은 문재인 대통령의 말대로 한반도의 역사를 바꿀 수도 있는 하늘의 선물이다. 김정은의 결단을 위장전술로 일축해 버리면 선제타격 말고는 한반도 위기의 출구가 없다. 김정은을 설득할 수단은 차고 넘친다. 제재 완화로 시작하여 북·미수교, 뒤따를 북·일수교로 북한에는 ‘빈 집에 황소 들어가듯’ IMF, 세계은행과 아시아개발은행의 거액의 장기 저리 차관이 밀물처럼 쏟아져 들어간다. 핵·경제 병진에서 뒤처진 경제를 일으키는 데 필수적인 것들이다.
정상회담의 강점은 하향식(top-down) 협상이다. 김정은과 트럼프는 통 큰 합의를 하고 후속 협상은 실무진에 맡기는 스타일이다. 실무진이 디테일에 발목 잡혀 협상이 오래 주춤거리면 두 사람은 직접 담판으로 맺힌 매듭을 끊을 사람들이다. 충동적이고 예측불가능하다고 비판 받던 김정은과 트럼프가 그 충동성과 불가예측성으로 한반도와 동북아의 역사에 큰 획을 긋는 일을 할 가능성이 우리들 눈앞에 놓인 것이다.
극과 극에 선 두 사람을 접근시켜 북·미정상회담에서 비핵화와 평화협정이 교환되는 큰 역사를 만들어내는 무겁고 중대한 짐이 지금 문재인 대통령의 두 어깨에 얹혀 있다. 평창 이후 지금까지 짧은 기간에 ‘정의용-서훈’이라는 환상의 팀을 가동하여 역사의 수레바퀴를 앞으로 잘 움직이고 있다. 트럼프가 대화파 국무장관 렉스 틸러슨을 북한 붕괴론자인 마이크 폼페이오 CIA 국장으로 교체한 것은 회담 주도권을 김정은에 양보하지 않겠다는 적절한 대북 경고 메시지다.
문 대통령, 모든 상상력 동원한 추동자 역할 해야
문 대통령은 북·미 간의 필요불가결한 매개자다. 김정은과 트럼프가 디테일에 얽매이지 말고 큰 틀의 합의를 선언할 수 있도록 모든 상상력을 동원하여 추동자(facilitator) 역할을 해야 한다. 디테일에 관한 합의 축적으로 비핵화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먼저 평화협정과 비핵화에 대한 개념적 합의를 하고 디테일로 내려가는 부챗살(hub and spoke) 방식이다. 그 안에 비핵화와 북·미수교와 남북한 화해·협력이 들어간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한반도 사태는 2017년의 위기보다 더 위험한 수준으로 후퇴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 사이에 문 대통령이 트럼프를 만나는 것도 그래서 중요하다. 중국, 러시아, 일본의 지지와 협력도 필수적이다. 한반도 문제는 동북아 문제이고 그들, 특히 중국의 참여가 없고 중국의 의사에 반한 한반도 문제 해결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들은 비핵화와 평화협정의 확실한 그림이 그려진 다음에 합의의 동의자(endorser)로 초대되어야 한다. 그것이 실패한 6자회담의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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