윗동네 리얼스토리 | 모래사장 페트병 2018년 6월호
윗동네 리얼스토리 88
모래사장 페트병
이지명 / 국제펜(PEN)망명북한작가센터 이사장
북쪽 서해 황해남도 장산곶지구에서 군 복무를 하는 군인들은 밀물이 들어오는 시간만 되면 바다기슭에 옹기종기 모여 밀려오는 바다를 예리하게 주시한다고 한다. 혹시 남쪽에서 침투하는 간첩이나 월북자를 잡기 위해 그러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아니다.
지난해 탈북해 한국에 입국한 군인 A는 왜 그러느냐는 질문에 킥킥 웃음을 터트렸다. 파도에 밀려오는 미역 같은 해조류를 줍기 위해 그러는 것은 더더욱 아니란다. 이 사람은 유머가 넘치는 인물이었다. 바다를 지키는 군인이 바다를 살피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말하는 투나 억양이 마치 무엇인가 비웃는 듯한 모양이었다.
밀물 때 바다를 주시하는 예리한 눈
궁금하기도 하고 또 너무 에두르는 것 같아 눈치를 봤지만 정작 이유를 말했을 때는 듣는 사람의 입이 짝 벌어질 정도였다. 바로 파도에 실려 밀려들어오는 페트병을 줍기 위해 그러는 것이라는 대답이었기 때문이다.
순간 번뜩 내 머리에 섬광이 일었다. 올 초 이른 봄 나 역시 북한선교 활동에 적극적인 서울 OO교회에서 진행한 북에 쌀 보내기 운동에 참여했다. 공식적인 지원 사업이 아니고 이를테면 비밀리에 하는 사업이었다. 성금을 모아 페트병 속에 흰쌀을 넣어 썰물이 시작될 때 강화도 앞바다에 던졌는데 내가 참여했을 때에는 거의 500여 kg의 쌀을 페트병에 나눠 넣어 보냈다.
물골이 돌아설 때 던져서 마치 정규 군대의 열처럼 물골을 따라 줄을 지어 바다로 나가던 수백 개의 페트병 대열이 지금도 눈에 삼삼하다. 강화도 맞은편인 북한 황해남도 연안군 일대로 밀려간다는 말을 듣고 그때 나는 목사님을 보고 이런 농담을 했다.
“저도 다시 북에 가야겠어요. 이렇게 쌀이 가는 것을 알았으니 새벽에 나와 몇 개만 주어가면 배고픈 걱정 없이 잘 살 텐데…”
그때 목사님은 “단 한 사람이라도 하나님 사랑을 느낄 수 있게만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라며 두 눈을 감았다. 탈북자 출신인 목사님도 그 순간 배고픔에 허덕이는 북녘 동포들의 모습이 눈앞에 스쳤던 것 같다.
나는 A에게 “집체생활을 하는 군인들이 페트병 쌀을 주어 대체 어떻게 소비하죠? 남조선에서 들어오는 물건임을 지휘관들도 알 텐데, 단속하지 않나요?”라고 물었다. A는 “옛날 소리”라면서 “밀물 때 병사들을 바다기슭으로 내모는 사람들이 바로 지휘관들인데, 먹을 것 앞에서 장사가 어디 있나요?”라고 대답했다.
고개를 끄떡이며 그의 말을 심중하게 들었다. 병사들뿐이 아니란다. 지역주민들도 새벽이면 일부러 미역을 건지거나 낚시를 하는 것처럼 꾸미고 나와 바다기슭을 살핀다고 한다. 심지어 아이들까지 나와 페트병 하나라도 주어들면 환성을 지르며 퐁퐁 뛴다고 한다. 처음에는 왜 그러는가 하고 바다경비를 서던 군인들도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쳐다보았지만 사연을 알고 난 이후에는 단속을 강화해 회수에 열을 올렸다고 한다.
물론 회수한 페트병 쌀은 전부 군부대 식당으로 갔고 또 일부 군인들은 몰래 숨겨 민간에 갖고 가거나 산에 올라 군용 밥통으로 실컷 쌀밥을 지어 먹는다고 했다.
“페트병에 담긴 쌀뿐이 아닙니다. 삐라를 주을 때도 삐라에는 관심이 없어요. 삐라와 함께 떨어지는 1달러짜리 지폐를 찾는 데 정신을 쏟지요. 1달러면 북한에서는 쌀 1.5kg을 살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한 때는 부대 주둔지역에 삐라가 떨어지면 병사들을 동원해 수거하던 것을 최근에는 군인가족들을 동원해 수거합니다. 가족이면 바로 지휘관들의 부인이나 자녀들이니까요”
“후방보급 어려운 상황에서 오아시스 같은 존재”
A는 잠시 뜸을 들인 후 말했다.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소위 병사들이 달러 맛을 보면 안 되니까 하는 것이죠. 총밖에 몰라야 하는 군인들이 자본주의 나라에서 보낸 달러에 관심을 갖는다? 말도 안 되지만 후방보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는 실정에서 그건 마치 오아시스 같은 것이죠”
열악한 생활이 부르는 어쩔 수 없는 유혹. 북한에서는 그 유혹을 자본주의 황색바람이라며 병사들로 하여금 단호히 배격할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굶주린 병사들에게 그런 요구가 받아들여질 수가 있을지는 의문이다. 정기적으로 끊이지 않고 보내는 쌀과 달러에 주소나 성명도 모르는 누군가를 향한 사랑과 정이 담겨 있다. 그 사랑과 정으로 남북이 얼싸안을 그날을 애타게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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