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고 싶었어요 | “南 자본·기술, 北 자원·인력? 옛날 모델이에요” 2018년 7월호
만나고 싶었어요 | 변학문 북한과학기술연구센터 연구위원
“南 자본·기술, 北 자원·인력?
옛날 모델이에요”
이동훈 / 본지기자
Q. 김정은 시대 북한은 ‘사회주의 강국’ 건설이라는 목표 아래 특히 과학기술에 기초한 국가 역량 강화에 매진하고 있는데, 북한의 과학기술 강국 목표는 구체적으로 어떤 전략에 기반하고 있는지?
A. 북한이 말하는 ‘사회주의 강국’은 정치군사, 과학기술, 경제, 문명 강국을 뜻하죠. 북한은 이미 정치군사 강국은 완성되었다고 하면서 경제 강국 건설을 당면한 핵심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북한이 경제 강국을 달성하기 위한 선차적 과제로 과학기술 강국 건설을 강조한다는 점인데요. 과학기술의 힘으로 경제, 나아가 교육, 국방, 문화 등 국가의 전 영역을 빠르게 발전시키려는 것이라 할 수 있겠죠.
이러한 과학기술 중시 기조가 김정은 위원장 집권 이후 시작된 것은 아닙니다. 김정일 시대부터 이어져 온 것이거든요. 1998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고난의 행군’이라 불린 극심한 경제난에서 벗어났다고 선언하면서 ‘사회주의 강성대국’을 국정 목표로 제시한 바 있는데요. 이때 과학기술을 ‘강성대국 건설의 힘 있는 추동력’이라고 하면서 과학기술 중시 정책을 시작한 것입니다.
김정일 위원장은 2001년 3월에는 ‘정보산업 시대’에 대한 담화를 발표했는데요. 여기서 핵심 주장은 ‘21세기는 사회 모든 영역에서 컴퓨터를 핵심으로 한 IT와 지능노동의 비중이 크게 높아지는 시대이기 때문에, 이에 적응하고 살아남으려면 경제와 경제구조, 교육, 과학기술, 간부에 대한 정책 등 모든 것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때부터 IT를 중심으로 한 첨단 과학기술 육성, 생산과 경영에서 컴퓨터 이용 확대를 통한 산업구조 개선, 과학기술 인재와 지능 노동자 양성, IT 인프라 확충 등이 북한의 주요 정책 목표가 되었죠. 이후 북한은 과학기술 예산을 연평균 20% 늘리면서 컴퓨터 영재교육을 강화하고, 대학에 컴퓨터 학과를 신설했고요. 대학 전자도서관을 순차적으로 건설하고 첨단 분야 연구기관도 육성했으며, 과학자 우대정책을 확대 실행하기도 했습니다.
다른 한편 이 시기에 북한은 ‘선군시대 경제건설 노선’을 표방하면서 국방공업과 국방 과학기술에 많은 투자를 했는데요. 그 결과 장거리로켓과 인공위성의 정밀부품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필수적인 CNC(Computerized Numerical Control), 즉 컴퓨터 수치제어 기술을 자력으로 개발했다고 합니다. 북한은 2009년부터 CNC를 대대적으로 선전하면서, 이러한 국방 과학기술의 성과가 민수 경제, 민간 과학기술 발전의 토대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죠.
현재 북한이 추진하고 있는 과학기술 정책은 김정일 시대의 연속선 상에 있습니다. 그리고 김정일 시대부터 누적된 정책의 효과가 김정은 위원장 집권 이후 본격적으로 가시화되었죠. 그래서 현재 북한은 김정일 시대보다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더욱 강조하면서 과감하게 정책을 펴나가고 있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Q. 과학기술 강국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북한이 인재양성이나 학술적인 부분, 즉 교육정책과 과학 분야의 연구 활성화와 관련해서 어떠한 시도를 지속해왔는지?
A. 북한은 과학기술 인재가 과학기술 강국의 핵심 요소라고 강조하고 있어요. 그래서 모든 인민들이 4년제 대학 졸업 수준의 과학기술 지식을 갖도록 하는 소위 ‘전민 과학기술 인재화’를 지향하고 있죠. 그리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새 세기 교육혁명’이라는 이름으로 교육체제 개혁과 과학기술 교육의 양적 확대 및 질적 강화를 꾀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40년간 유지한 초중등 11년 의무교육을 12년으로 늘리면서 수학과 과학기술 교과 비중을 높였고요. 대학 교육과 연구 수준을 높이기 위해 지역별, 부문별로 주요 대학을 종합대학으로 승격시켜 집중적으로 육성하고 있죠.
북한은 노동자, 농민 등 성인 대상의 과학기술 교육도 강화하려는 노력을 보이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평양에 과학기술전당을 만들고, 이곳과 각 지역, 공장, 농장에 설치된 과학기술보급실들을 국가전산망으로 연결해서 과학기술보급망을 구축한 것인데요. 주민들은 국가전산망을 통해 과학기술전당에 접속해 과학기술 자료를 찾아볼 수 있고, 주요 대학들이 운영하는 원격교육대학 수업도 듣습니다. 지난 4월 20일 북한은 경제와 핵의 병진노선을 종결하고 ‘경제 건설에 총력 집중’을 결정했는데, 이때도 김정은 위원장이 과학기술보급망 확대를 강조했죠.
‘교육의 정보화’도 북한의 교육을 이해하는 중요한 요소인데요. 앞서 말씀드린 과학기술보급망처럼 IT를 이용해 교육환경을 개선하려는 것입니다. 최근 북한은 모든 학교에 전자도서관을 설치하여 국가전산망에 가입시켰고, 교실과 강의실은 컴퓨터를 이용한 수업과 피드백이 가능하도록 바꾸고 있어요. 그리고 전자교과서와 전자강의안의 제작 및 이용을 확대하고 원격강의나 원격시험도 계속 늘려가고 있습니다.
김정은 위원장 집권 이후 북한은 과학 연구를 활성화하기 위해 국가 과학기술 예산을 연평균 7.45% 인상하고, 지방예산과 기업소 기금도 최대한 과학기술 발전에 투입하도록 독려하고 있어요. 2013년부터는 인민생활 향상, 에너지 문제 해결, 경제의 자립성 강화, 지식경제 건설을 목표로 ‘제4차 과학기술 발전 5개년 계획’을 시행했는데요. 이 계획의 기조에 맞춰 자연에네르기연구소를 신설하는 등 연구기관을 확대했습니다.
또한 과학자들의 연구 의욕과 사기를 높이기 위한 우대정책도 강화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은하과학자거리, 위성과학자주택지구, 미래과학자거리, 여명거리 같은 대규모 과학자 주거시설을 건설했고요. 과학자 전용 백화점과 과학자 전용 휴양소 같은 복지시설도 만들었죠. 2016년부터는 전년도에 가장 우수한 성과를 낸 5~6명의 ‘최우수 과학자, 기술자’를 선정하고 있습니다. 이에 더해 “과학자는 사회주의 건설의 선구자” 같은 구호를 만들어 과학자들의 위상도 높여주고 있어요.
Q. 과학기술에 기초한 경제발전 측면에서 특히 제반 산업 및 에너지 분야 등과의 연계 시도는 어떻게 이루어져 왔으며 이를 위한 대외협력은 어떤 모습을 보였는지?
A. 북한은 과학기술 지식이 바로 경제적 이익이 되는, 즉 ‘과학기술과 경제의 일체화’를 지향하고, 생산과 경영에서 컴퓨터 이용을 확대하는 ‘경제의 정보화’를 강조해요. 현재 주력하는 정보화의 목표는 주요 생산공정을 자동화하고, 이 공정들을 컴퓨터망으로 연결해 통합생산체계를 구축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노동력을 절감하면서도 생산성과 경영 효율을 극대화하고 제품의 질을 높이려고 하는 것이죠. 최근 몇 년 동안 평양을 중심으로 상당수의 경공업 공장과 식료품 공장이 통합생산체계를 갖추었습니다.
대학과 연구기관들은 공장, 기업소, 농장의 현대화와 통합생산체계 구축에 필요한 설비와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제공하고 있고요. 또 태양광, 태양열, 지열설비 같은 친환경에너지 기술을 개발해 생산현장에 도입하는 데도 매우 적극적으로 보입니다. 예를 들어 국가과학원은 400kW 용량의 태양광 설비를 개발하고 류원신발공장에 설치해서 공장활동에 필요한 모든 전력을 태양광으로 충당하게 했다고 합니다.
요즘 북한은 대학과 연구기관들이 생산현장 지원에 머무르지 않고 직접 상품을 개발하도록 독려하고 있는데요. 상품을 개발, 판매해서 연구비를 확충하라는 것이죠. 그리고 대학, 연구기관, 기업들의 혁신 경쟁을 자극하기 위해 각종 과학기술 성과 전시회를 1년에 약 30회 열고 있습니다. 각 단위들은 자사 제품이 우수제품으로 선정되면 판매 확대를 위해 수상 내역을 적극적으로 홍보한다고 해요.
북한의 과학기술 중시 기조는 대외정책에도 적용되어 김정은 위원장 집권 이후 세계적 추세에 적응한다는 명분으로 해외 선진 과학기술 도입을 꾀하고 있어요. 대외경제성 부상이 자신들에게 필요한 기술을 가진 해외기업과는 특혜를 제공해서라도 합영 및 합작을 성사시키겠다고 최고인민회의에서 발언할 정도죠. 학술적인 면에서도 김일성대학교를 중심으로 국제 학술행사를 정기적으로 개최하고 있고, 해외 저널에 발표되는 북한 학자들의 논문도 늘고 있는 상황입니다.
북한은 무역에서도 원자재보다 가공품이나 기술제품 수출을 늘리려 하는데요. 이를 실현하려면 제품의 경쟁력이 있어야 한다는 점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ISO, IEC 등 국제품질인증을 필수화한 새로운 품질제도를 만들어 과거보다 엄격하게 관리하고 있죠.
북한은 남북관계에서도 인도적 지원보다 과학기술을 매개로 한 협력을 선호할 것으로 보입니다. 최근 몇 년 사이 간헐적으로 방북한 대북지원단체 관계자들이나 중국에서 만난 한국인들에게 이런 의사를 이미 여러 번 전달하기도 했고요.
Q. 과학기술 분야에서 그간 남북의 협력 과정과 함께 취약점이 있었다면 어떤 부분인지?
A. 남북 과학기술 교류협력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기에 활발하게 진행되었어요. 정부출연 연구기관이나 학술단체 주도의 교류협력, 민간기업들의 교류협력, 재외동포 과학기술자 단체를 통한 교류 등이 주된 형태였죠. 구체적으로는 중국, 일본, 평양 등에서 10여 차례 공동학술행사가 열렸고, 북한 과학기술 실태 조사연구나 학술지 전달 사업도 있었어요. 우리 정부의 지원에 기초한 교류협력과 공동연구도, 비록 대부분이 기초조사나 시험연구의 형태였지만 2009년 3월까지 수십 개 수행되기도 했습니다.
당시 교류협력은 수십 년간 단절되었던 남북 학자들이 직접 만나 서로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계기였어요. 교류협력에 참여했던 분들에 따르면 만남을 거듭할수록 남북 모두 과학기술 교류협력의 필요성을 더욱 절감하게 되었다고 해요. 이 과정에서 과학기술 교류협력의 노하우를 축적한 분들도 여러분 계십니다.
하지만 남북관계와 동북아 정세가 악화되면서 남북 과학기술계도 해외 학술대회에서 조우하는 경우를 빼면 거의 만나지 못했죠. 과학기술 교류협력이 정치, 안보의 종속변수일 수밖에 없음을 새삼 확인한 것입니다. 또 기관 및 단체들이 대부분 독자적으로 교류를 진행하다 보니 그 과정에서 얻은 경험과 노하우도 공동의 자산으로 축적되지는 못했죠.
Q. 향후 북한과 과학기술 교류협력이 본격화되는 국면을 맞는다면 어떠한 점을 깊이 고려하여 추진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A. 무엇보다 교류협력에 대한 우리의 사고가 ‘남측의 자본과 기술, 북측의 노동력과 자원’이라는 옛날식 모델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대신 과학기술을 매개로 남북이 상생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협력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현재의 북한은 2000년대의 북한이 아니에요. 풍족한 수준은 아니지만 극심한 경제난과 절대 빈곤에서는 벗어났고, 20년 가까이 과학기술 중시정책을 지속해서 일부 성과도 거두고 있거든요. 또 앞서 말씀드린 대로 과학기술에 기초한 경제발전, 대외 과학기술 협력에도 상당히 적극적입니다. 이런 점들을 볼 때 북한은 ‘값싸고 우수한 노동력과 풍부한 자원’의 제공자에 머무르려 하지 않을 것이에요.
우리의 기술력, 자본력을 북한과 비교한다면 여전히 전반적으로 우월할 것입니다. 하지만 비교 대상을 주변국들로 확대한다면 어떨까요? 북한의 입장에서 중국, 일본, 미국, 그리고 최근 북한의 협력 파트너로 부상한 싱가포르에 비해 우리가 더 능력 있고 매력적인 협력 파트너일까요? 같은 민족이라는 점을 빼면 이 부분에 대해서 확신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설사 북한 노동자의 저임금을 유지하고 남북 협력을 확대해서 경제적 이익을 얻는다 하더라도, 만약 그것이 청년실업 등 우리의 문제 해결에 직접적인 기여를 하지 못한다면 광범위한 지지를 얻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이런 점들 때문에 ‘남측의 자본과 기술, 북측의 자원과 인력’ 방식의 유효성이 매우 낮아졌다고 봐요. 대신 남북의 관심이 일치하고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이 직접 참여하여 유무형의 이익을 실현할 수 있는 새로운 주제와 형태의 과학기술 협력을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예컨대 남북 모두의 관심과 수요가 높고 각자 일정 수준의 기술력을 확보한 분야를 찾아 비교우위에 입각한 상호보완적 협력을 시도해보는 것이죠. 과학기술 교육 콘텐츠 공동개발, 중소기업 공장 자동화, ‘탄소하나(C1)’ 화학, 친환경에너지 개발, 천연물 신약 개발 등이 떠오르는데요. 또는 남측의 기술이 아니라 북측 기술에 남측의 마케팅 능력을 결합한 중소규모 창업, 스타트업의 가능성도 충분히 따져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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